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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7.08 21:21 수정 : 2009.07.11 11:02

1인 독재 카리스마에서 남녀 커플, 집단체제 거쳐 전문가 진행까지 시청자를 웃기고 울리는 엠시들

[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1인 독재 카리스마에서 남녀 커플, 집단체제 거쳐
전문가 진행까지…시청자를 웃기고 울리는 엠시들

왜 유재석은 계속 뜨고, 신동엽은 뜸하고, 자니 윤을 떠올리게 했던 박중훈의 진행은 외면당했을까? ‘행사의 주인’(MC: Master of Ceremonies)을 뜻하는 엠시는 사전적 의미와 달리 언제나 무대의 주인공일 수는 없다. 캄캄한 무대에 조명이 켜지는 순간 등장하고 작별인사를 하는 책임자지만, 자신이 아닌 다른 스타들을 빛나게 하는 게 주된 임무이기 때문이다. 능력 없는 사람이 메인 엠시가 될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는 냉혹한 방송의 세계에서, 무대를 호령했던 스타 엠시들도 이어달리기하듯 차세대 스타에게 마이크를 건네주어야 했다.

최근 각광받는 스타 엠시들은 다재다능한 엔터테이너의 기질을 저변에 깔고 있으면서도 본격적으로 자신의 재능을 뽐내지 않는다. “방송을 장악한다기보다, 자연스러운 엠시가 각광받는 시대”라고 말하는 <세상을 바꾸는 퀴즈>(문화방송)의 김유곤 피디는 “밝고 명랑한 캐릭터의 이휘재, 진중한 김제동, 순간 재치가 돋보이는 신정환 등 엠시들의 실제 성격에 기반을 두고 프로를 계획한다. 요즘 같은 트렌드에 프로그램의 매력에 맞게 엠시 스타일을 교정시킨다는 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진행병’에 걸렸다고 놀림받는 유재석이지만 녹화 현장에서는 상대방을 높여주는 실제 ‘성격’에서 나오는 화법이 남을 웃기는 기술보다 힘이 세다.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허항 피디는 “‘빅뱅’이 게스트로 출연했을 때 난 춤 잘 못 춘다며 빼는 것 같다가도 어느새 삐거덕거리는 막춤으로 빅뱅의 댄스를 돋보이게 하더라. 상대방은 탁월한 사람이라는 전제로 이야기를 듣고 타인의 기를 살려주다가 자신의 유머를 살짝 올려놓는 스타일”이라고 평했다.

군사 독재 시대에는 엠시도 독재자 스타일

스타 엠시 흥망잔혹사
지금과 달리 1960, 70년대를 풍미했던 엠시는 시청자들이 보기에 세상에서 가장 말 잘하는 사람이요, 가장 웃기는 재치꾼이었다. ‘후라이보이 곽규석’과 ‘쓰리보이’, ‘땅딸이 이기동’ 등 극장 쇼와 티브이를 휩쓸었던 엠시들은 ‘원맨쇼’의 승부사들이었다. 30년 남짓 쇼 프로그램을 제작했던 홍순창 전 한국방송 피디는 “과거 일인 엠시의 인기는 군사독재 사회의 문화와 연관이 있다”고 말했다. “70년대 말까지는 엠시 한 명이 카리스마 넘치는 군주의 위치에 서 있었다. 게스트에게, “당신! 노래 그만하고 내려와!”라고 말하면 내려와야 할 정도였다. 일인 독재 체제에서 쇼 또한 지도자가 앞에서 혼자 이끌어가는 게 합당하고 자연스러워 보였던 것”이라고 했다.

지금은 프로그램 시청률로 성공의 당락이 평가되지만, 과거엔 엠시에 대한 집단적 반응이 더욱 중요했다. 1988년부터 <전국노래자랑>을 진행한 송해, 해외동포들에게 한국 가요를 전해주던 <가요무대>의 김동건이 한국적 정서를 전하며 국민적 호응에 일답했다면, 89년 국내 최초의 1인 토크쇼를 표방하며 나타난 사회자 자니 윤의 진행도 당시엔 큰 이슈였다. 미국 토크쇼 여러 개를 한꺼번에 흉내낸 듯한 버터 느낌 나는 말발과, 늦은밤 시청자들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안녕하세요! 자니 윤입니다”로 은근하게 시작했던 진행은 이후 이홍렬 쇼, 주병진 쇼 등 1인 토크쇼의 활약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80년대 말 임성훈, 이덕화, 변웅전 등의 무게감 있는 남성 진행자와 말 수 적은 여성 진행자의 더블 엠시가 선전했던 것은 보조 엠시와의 궁합이 중요하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의 엠시 이덕화가 “여러분의 덕화, 인사드려요!”라는 멘트를 내뱉을 때, 어깨에 뽕 들어간 원피스를 입고 있던 김청은 아름답긴 했지만 진행에 있어선 약자였고 이덕화를 믿어서인지, 실수도 종종 했다. 하지만 최근엔 메인과 보조 엠시가 만나는 방식 자체가 다양해졌다. 올 4월 고전적 사회 방식을 유지해왔던 <가족오락관>이 끝나면서 허참, 임성훈, 이덕화 등 오른편 여성 엠시만 수없이 갈아치웠던 남성 사회자의 카리스마도 이젠 보기 어려운 추억이 된 것이다.

대신 최근 시청자들은 메인과 보조 엠시 사이에서 일어나는 실제 리얼리티, 종잡을 수 없는 대화와 제스처에 주목한다. 사회자 한 명이 강하고, 보조 한 명이 옆에서 돕는 식의 강약 구도는 진부한 형식이 됐다. 각 엠시들의 말과 행동에 따라 힘의 배분도 달라진다. 몇 해 전부터 하나의 장르가 된 집단 엠시의 등장도 시청률을 상승시키는 성공적인 자구책으로 자리잡았다. <일요일이 좋다-패밀리가 떴다>(에스비에스)의 장혁재 피디는 “게스트들을 통해서 뭔가 뽑아낸다는 설정은 지루하다. 집단 엠시들은 프로의 주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각 상황에 강력하게 반응한다. 의외의 상황이 생겨난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형식”이라고 말했다. 엠시 한 명에 의존하는 단조로움을 피할 수 있고 각 엠시의 캐릭터에 따라 다채로운 상황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재미보다 강하게 어필하는 전문가들


최근엔 전문 분야에서 활동하는 일인 엠시의 활약도 눈에 띈다. <유희열의 스케치북>과 김창완이 진행하는 <음악여행 라라라>가 대표적이다. 최근엔 케이블 채널 ‘예당아트’에서 <조윤범의 파워클래식>을 진행하는 바이올리니스트 조윤범이 화제다. 그는 얌전함과 고상함으로 무장됐던 기존 클래식 프로 엠시들과는 180도 다른 쾌활한 진행으로 이름나 있다. 전문적인 음악 지식과 실제 연주 경험을 바탕으로 내뱉는 멘트는 지루할 틈이 없다. 풍부하고 드라마틱한 몸짓으로 슈만이 정신병 때문에 겪은 고통과 음악적 환희를 설명할 때면 한 편의 1인 뮤지컬을 보는 듯하다. 뜨거운 지지를 받고 있는 <시네마 천국>(이비에스)의 인터뷰 진행자 이해영 감독도 엠시가 보편적인 만인의 스타가 아니라, 이젠 마니아들 앞에서 선전하는 전문적인 매력이 있어야 한다는 걸 보여준다. <시네마 천국>의 손승우 피디는 “이해영 감독의 진행은 말만 잘하는 엠시보다 영화를 좋아하는 시청자들에게 훨씬 더 진심으로 어필하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 최장기간 엠시: <가족오락관>(한국방송)의 허참

1984년 4월 2일 첫 방송부터 엠시를 맡았던 허참. 올해 4월 프로그램이 폐지되면서 26년 최장수 엠시라는 기록은 마침표를 찍게 됐다. “몇 대~몇”을 외치던 허참이 진행한 방송 분량은 1237시간. 탤런트 정소녀, 오영실 아나운서 등 21명의 여자 엠시가 옆자리를 거쳐 갔다. 허참은 ‘스피드게임’, ‘고요 속의 외침’, ‘사구동성’ 등 451개나 되는 꼭지를 소개했다.

■ 최고령 엠시: <전국노래자랑>(한국방송)의 송해

1988년 5월 <전국노래자랑>의 마이크를 잡은 뒤, 지금까지 전국 곳곳을 유랑하고 있는 송해. 1927년생으로, 올해 여든셋이다. 1994년 5개월 동안 자리를 비운 당시, 시청률이 급하강했고 항의전화도 폭주했다.

■ 최초의 오락 토크쇼 엠시: <자니 윤 쇼>(한국방송)의 자니 윤

‘88 올림픽’이 성사된 바로 다음 해인 1989년, 해외동포 코미디언 자니 윤은 국내 최초로 오락과 예능이 가미된 토크쇼 엠시가 된다. 엠시의 이름을 프로그램 전면에 내건 것도 당시로선 이례적인 일. 사회자를 초청해 인터뷰를 나누는 정통 토크쇼로는 1982년부터 십년 동안 방송된 김동건 아나운서 진행의 <11시에 만납시다>가 효시로 꼽힌다.

■ 1970년대의 아나테이너: <명랑운동회>(문화방송)의 변웅전

아나운서와 엔터테이너라는 단어가 만난 ‘아나테이너’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다. 1960년대에도 이미 ‘아나테이너’는 있었다. 변웅전 전 아나운서는 1969년 <유쾌한 청백전>을, 76년부터 85년까지는 <명랑운동회>를 진행했다. 푸른색 추리닝을 입고 호루라기를 불던 변 전 아나운서는 일요일 아침 스타들의 운동경기를 중계했다.

글 현시원 기자 qq@hani.co.kr, 그래픽 임호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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