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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탑은 21세기에도 예술가들에게 호기심과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소재가 되고 있다. 홍세연 작 <바벨탑>.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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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독서광 노동효의 썸플레이스 <바빌론의 탑>과 카비르 사막
표면 형성 물질에 따라 여러 종류의 사막이 있다는 걸 스물이 넘어서야 알았다면, 사막이 남극과 북극에도 있다는 걸 서른이 넘어서야 알았다면 너무 무식한 걸까? 이란의 카비르 사막 언저리를 지나가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꿈꾸던 모래사막은 아니었지만 분명 식물이라곤 자랄 수 없는 자갈과 돌로 뒤덮인 땅이었다. 처음에는 드디어 사막을 보게 되었다고 좋아라 했다. 그러나 첫 경험의 환희는 다음날도 같은 풍경을 지나는 사이 한 달째 잊고 물을 주지 않은 화초처럼 시들어버렸다. ‘똑같은 풍경’은 ‘아무것도 없는 풍경’과 다를 바 없었던 것. 결국 내가 할 일이라곤 버스 유리창에 기대어 공상을 하는 일밖엔 남아 있지 않았다.
어렸을 땐 사막 어디쯤에 바벨탑이 있으리라고 상상했지. 아마도 그런 상상의 뿌리엔 <바벨2세>가 있었을 거야. ‘김동명’으로 둔갑한 ‘요코야마 미쓰테루’의 만화는 환상과 실재를 혼동하는 소년 특유의 재능에 힘입어 사막을 사라진 바벨탑이 숨겨져 있는 장소로 여기게 만들었지. 모래폭풍 한가운데 거대한 건축물. 나이가 들면서 바벨탑이 각 시대의 예술가, 고고학자, 과학자에게 수많은 호기심과 영감을 불러일으켰다는 것도 알게 되었지. 브뤼헐의 <바벨탑>, 콜데바이의 지구라트 발굴,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 등등.
집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바벨탑에 대한 생각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책 한 권을 선물로 받았다.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 연애소설쯤 되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작가의 휘황찬란한 이력은 제목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에스에프(SF)문학계에서 가장 권위를 자랑하는 휴고상, 네뷸러상, 존 캠벨 기념상, 로커스상을 휩쓴 작가. 여덟 개의 중단편 중 첫 편, 제목을 보는 순간 눈과 활자 사이에 파지직 전류가 흐르는 느낌이었다. <바빌론의 탑>.
일찍이 내가 알고 있던 에스에프소설이 아니었다. 배경은 미래가 아닌 과거였고, 공상과학적인 사물이 등장하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고대인의 ‘상상’을 ‘실재’라고 상정한 뒤 새로운 세계가 구축되고 있었다. 바빌론의 탑은 대홍수를 일으킨 적이 있을 정도로 엄청난 수량을 담고 있는 ‘천장’과 ‘지상’을 잇는 팽팽한 밧줄 같은 것. 이란에서 온 힐라룸은 천장을 뚫기 위해 탑의 꼭대기로 올라가는 여정을 시작한다. 어떤 이들은 탑에서 태어나 탑에서 죽고, 평생 지상을 밟지 않은 이들도 있다. 탑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이고, 길. 이윽고 그는 천장에 도착하고 천장을 뚫던 중 엄청난 양의 물에 휩쓸린다. 그가 천신만고 끝에 빠져 나온 터널 밖의 세상. “그는 탑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 소식을 전할 작정이었다. 이 세계가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지를 그들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이 소식은 <올드 보이>의 반전쯤은 무릎 꿇게 하는 스포일러가 될 테니 그로부터 직접 들으시길.)
국내에도 110층이 넘는 초고층 빌딩들이 세워진다는 소식을 자주 듣게 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미 초고층 빌딩에서 살고 있다. 주상복합빌딩의 경우 영화관부터 음식점까지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모든 것이 갖춰져 있다. 우리들은 이미 바빌론의 탑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일까, 도시가 왠지 콘크리트 사막 같다.
노동효 여행작가·<길 위의 칸타빌레>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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