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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유내강’ 반기문이냐 ‘투명인간’ 반기문이냐. 그래픽 홍종길 기자 jongge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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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쏙] 유엔 사무총장 2년반…서구언론 평가 극과 극
“기후변화 등 조용한 리더십 발휘” 감싸기반총장 “발로 뛰어 결과로 말하겠다” 각오
“가장 위험한 한국인…성과 미미” 때리기
유엔개혁 반대파·미 네오콘 ‘비판 배후론’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참여정부 외교통상부 장관일 때 별명은 ‘기름장어’였다. 민감한 현안에 대한 기자들의 벌떼같은 질문을 요리조리 잘 빠져나간다고 붙은 별명이었다. 이 별명에는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들과도 어떻게든 타협을 이끌어내려는 친화력에 대한 칭찬도 포함돼 있다. 그런 친화력을 바탕으로 그는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아시아인으로는 두 번째로 사무총장에 올랐다. 최근 반 총장이 세계 언론을 상대로 별명인 기름장어처럼 잘 빠져나가는 능력을 보여줄 것을 요구받고 있다. 지난 6월 말로 임기 5년의 절반을 마친 반 총장에 대해 서구 언론의 평가가 상당 부분 엇갈리고 있기 때문이다. 일부 미국 보수 언론은 반 총장을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한국인’이라고까지 비판했다. 지금까지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한국인은 미국 언론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부를 때 쓰는 표현이었다. 반면 다른 언론은 반 총장이 유엔을 원하는 세계 각국에서 조용한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코피 아난 전 유엔 사무총장은 “총장직은 지구상에서 가장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리”(the world’s most impossible job)라고 말했다. 세계 각국의 이익이 첨예하게 충돌하는 유엔을 지휘하는 사무총장이 좋은 평가를 받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뜻이다. 그렇다면 반 총장에 대한 서구 언론의 비판은 어느 정도 불가피한 것일까? 임기 전반을 마친 반 총장은 이런 평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반 총장은 투명인간? 반 총장에 대해 가장 먼저 비판의 포문을 연 것은 미국의 격월간 외교전문지 <포린 폴리시>다. 이 잡지는 지난달 22일 인터넷판에 ‘어디에도 없는 남자: 반기문은 왜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한국인인가’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필자는 보수 성향의 닉슨연구소가 발행하는 잡지 <내셔널 인터레스트>의 선임 편집자 제이컵 헤일브룬이다.
헤일브룬은 이 기사에서 “반 총장이 기후변화와 테러, 글로벌 금융위기 같은 국제적 이슈에 대처하는 리더십이 절실한 시점인데도 어떤 리더십도 보여주지 못하며 유엔을 무의미한 존재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헤일브룬은 <네오콘의 기원>이라는 책을 쓴 보수 논객이다. <워싱턴 포스트> 자매지인 <포린 폴리시>에 실린 이 글은 또다른 자매지 격인 <뉴스위크> 일본어판에 일본어로 번역되어 게재됐다. 보수적 신문인 <월스트리트 저널>도 거들었다. 14일 이 신문은 반 총장의 임기 절반을 평가하는 기사 제목을 ‘유엔의 보이지 않는 사람(invisible man)’이라고 뽑았다. 이 신문은 반 총장의 측근들이 그를 조용한 외교의 달인으로 묘사하며 유엔평화유지군을 수단에 배치하는 등 그의 역할이 컸다고 말했지만 실제 성과는 미미했다고 평했다. 또 유엔분담금과 평화유지군 부담금을 체납한 미국을 ‘게으른 기부자’라고 비난한 것에 대해서도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도 반 총장의 임기 전반기를 평가하면서 강자에 대한 진실성에서는 10점 만점에 3점, 조직 운용력에서는 2점의 낮은 점수를 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 잡지는 기후변화 등 큰 그림을 그리는 데 있어서는 8점, 평화 유지 역할에서는 6점으로 비교적 후한 점수를 매겼다. “팩트조차 틀린 비판 보도를 한국언론 왜 자꾸 받아쓰나?” 그러나 반대되는 평가도 많다. 미국 <아메리칸 프로스펙트>의 기자인 마크 리언 골드버그는 유엔의 공식 블로그에 “<포린 폴리시>에 나온 헤일브룬의 기사는 진지한 분석이 아닌 터무니없고 우월감에 가득 찬 논설”이라는 비판글을 올렸다. 그는 “헤일브룬은 반 총장이 기후변화에 무관심하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사실무근”이라며 “기후변화 하면 반 총장을 떠올릴 정도로 그는 취임 후 이를 중요한 이슈로 다루어왔다”고 지적했다. 이밖에 <월드 폴리틱스 리뷰>의 마이클 키팅, <유엔 디스패치>의 존 분스트라 등도 <포린 폴리시> 글에 대한 반론을 제기했다. 반 총장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 언론도 여럿이다. <비비시>는 20일 반 총장이 글로벌 리더십이 필요한 부분을 발휘하고 있다는 데 유엔 외교관들이 공감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비비시>는 반 총장이 역점을 두고 있는 기후변화 문제는 그의 조용한 외교가 진정으로 차별화를 이룰 수 있는 부분이라고 높게 평가했다. <에이피>, <아에프페> 등의 국제 통신사들도 반 사무총장 2년 반을 우호적으로 보도했다. 반 총장 쪽은 비판적인 보도에 대해 일단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분위기다. 한 측근은 <한겨레>와의 전화통화에서 “<포린 폴리시>가 격월간지이기 때문에 잡지 제작 일정 때문에 언론 가운데 가장 먼저 기사를 써 관심을 끌었을 뿐”이라며 “대응할 필요를 못 느낀다”고 밝혔다. 오히려 이런 비판성 기사들을 큼직하게 보도한 한국 언론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반 총장을 비판한 언론은 <포린 폴리시> 등 몇 군데에 불과하고 칭찬한 언론이 훨씬 많은데 자꾸 비판 기사만 보도된다는 것이다. 반 총장 때리기의 배후는 네오콘? 그렇다면 서구 언론들은 왜 반 총장을 비판하고 나선 것일까? 우선 유엔 개혁에 반대하는 세력이 의심받고 있다. 반 총장은 최근 비판 기사가 보도된 뒤 <연합뉴스>와 한 인터뷰에서 개혁에 반대하는 세력이 있다는 뉘앙스를 내비쳤다. 반 총장은 ‘하늘 아래 최고 직장’이라 불리는 유엔 직원들의 정년(61살) 연장을 금지시키고 고위직의 재산 공개를 최초 도입했다. 따라서 반발도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폭스 뉴스> 같은 미국 언론들이 이런 과정에서 나온 불협화음을 보도하기도 했다. 강경 보수세력인 네오콘도 비판의 배후로 꼽힌다. 문정인 연세대 교수(정치외교학)는 “반 총장이 지난 3월 미국 의회를 방문해 10억달러 유엔분담금을 아직도 미납하고 있는 미국을 ‘게으른(deadbeat) 기부자’로 비판한데다 지난 1월 가자 사태 때 현지를 방문해 이스라엘을 비판하고 휴전을 요청한 것이 네오콘들의 반발을 산 것”이라고 분석했다. 문 교수는 이런 이유 때문에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에게 붙던 수식어인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사나이를 반 총장에게 쓴 것 같다고 말했다. 외교통상부의 한 간부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비롯해 민주당이 유엔에 우호적인 입장을 표명하자 딕 체니 전 부통령과 가까운 공화당 인사인 헤일브룬이 말이 안 되는 내용의 글을 게재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이 인사는 “이는 임기 절반을 마친 시기인 6월 말 전후에 나올 법한 것으로 시간이 지나면 이 같은 비판은 더 이상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서구 언론이 아시아적 가치에 대해 이해가 부족한 점도 비판 원인 중 하나로 거론된다. 유엔총회 한국대표단을 거쳐 현재 국제해양재판소 재판관인 백진현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국제법)는 서구에서 흔하지 않은 ‘조용한 외유내강형 리더십’에 서구 언론이 익숙하지 않기 때문으로 분석했다. 백 교수는 “반 총장이 미국의 이라크 공격을 반대하며 강한 카리스마의 전임 코피 아난 총장과 비교될 수 있다”며 “서양 문화에서는 강력한 리더십이 익숙하기 때문에 반 총장의 새로운 리더십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수 있다”고 말했다. 네오콘 주도 비판, 반 총장에겐 오히려 약? 오히려 이런 서구 언론의 비판적 보도가 반 총장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해석도 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의장을 역임한 박수길 전 유엔대사는 “유엔에는 세계 각국의 기자가 수백명이 출입하는데다 수많은 블로거들과 외교전문가들로 언제나 북새통”이라며 “이 와중에 반 총장에 대한 비판이 없다면 오히려 이상한 것”이라고 말했다. 박 전 대사는 또 “네오콘은 민주당 버락 오바마 대통령 집권 후 힘을 잃었다”며 “네오콘의 비판은 반 총장이 미국에 할 말은 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어 반 총장의 국제적 위상에 오히려 도움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반 총장은 비판 보도가 나온 뒤 서구 언론에 자신의 조용한 리더십에 대해 적극 설명하고 나섰다. 최근 <비비시> <에이피>와 한 인터뷰에서 그는 꼭 필요한 할 말은 해왔다며 발로 뛰어 결과로 내놓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기름장어의 똑 부러진 정면 돌파 승부수가 과연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지켜봐 달라는 뜻으로 읽힌다. 대신 비판 보도에 대해선 반응하지 않겠다는 방침이다. 한 측근 인사는“반 총장은 지구 온난화 방지를 비롯한 새로운 이슈를 국제사회에 던졌고 오는 12월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새로운 기후변화의정서를 이끌어내는 것을 목표로 부지런히 활동할 계획”이라며, “평가는 그때 해도 늦지 않다”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반 총장은 취임 첫해 2007년에 교토의정서가 만료되는 2012년 이후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모두 온실가스를 의무적으로 감축해야 하는 이른바 발리선언을 하는 등 기후변화 관련 작업에 주력해왔다. 코펜하겐에서 포스트교토의정서 협상이 완료되면 반 총장은 지구적 위기를 풀어나가는 유엔 사무총장으로서의 리더십을 보여주게 된다. 반 총장은 이런 자신감을 바탕으로 20일 <비비시>와 인터뷰하면서 “사무총장 연임은 회원국 결정에 맡기겠지만 또 한번 기회를 주면 감사히 받겠다”며 연임 의사를 처음으로 밝히기도 했다. 미국·중국·러시아 등 유엔에서 입김이 센 국가들과의 대화와 타협을 강조해왔기 때문에 반 총장의 연임은 일단 가능성이 높다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하지만 반 총장의 재임 선거 시기가 한국의 대통령 선거와 맞물려 묘한 억측들이 나오고 있다. 반 총장이 대선 후보로 나올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반 총장의 외교부와 유엔 선배인 박수길 전 대사는 “반 총장이 한국 대선에 관심이 있다는 이야기가 유엔 주변에서도 나오는데, 반 총장 본인은 여러 차례 한국 대선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고 이야기했다”고 말했다. 권은중 기자 detail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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