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07.29 19:15
수정 : 2009.07.29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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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을 찍은 사진. 같은 사람이라도 수염을 기르면 식별하기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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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1839년 사진 발명 뒤 시작된 범죄 관련 사진의 긴 역사
범죄 관련 사진 하면, 먼저 험상궂게 생긴 범인의 얼굴 사진(프로필 사진)이나 과학수사 드라마에서 감식반원들이 급하게 범죄 현장에 도착해 이리저리 찍어대는 사진이 떠오른다. ‘범죄사진’(forensic photography)은 이 두 종류의 사진을 가리킨다. 이 사진들에는 긴 역사가 숨어 있다.
사진이 발명되기 전 19세기 초는 주민등록증이 없던 시대. 범죄자들은 수시로 이름을 바꿔가며 범죄를 저질렀다. 당시 경찰은 범인을 식별하는 법을 주로 자신의 ‘기억’에 의존했다. 경찰은 수시로 감옥을 방문해 죄수들을 강당에 모아놓고 빙빙 돌게 했다. 출옥 뒤 다시 범행을 저지를 가능성이 높은 범죄자들의 인상착의를 자신의 기억에 단단하게 박기 위해서였다. 다른 방법은 범인의 인상착의를 글로 묘사하는 것이었다. 찢어진 눈, 매부리코, 큰 광대뼈, 까만 피부 등. 하지만 이 두 방법은 당시 자본주의와 대도시의 발달로 급격히 늘어나는 범죄자들을 식별하는 데 한계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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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높이를 분류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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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사진은 범인을 식별할 수 있는 유용한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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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정면·측면 사진 범인 검거 큰 몫
1839년 탄생한 사진은 즉시 경찰의 관심을 끌었다. 사람의 기억이나 언어 묘사는 주관적인 데 반해 사진은 그야말로 얼굴을 ‘있는 그대로’ 스캔하는 객관적인 도구라고 여겼다. 최초의 범죄사진은 1843년 벨기에 경찰이 찍은 범죄자 초상사진이다. 1854년에는 스위스에서 여러 장의 범죄자 얼굴 사진을 각 지방에 뿌려 도망중인 흉악범을 검거하는 데 처음으로 성공한다. 하지만 범죄사진은 경찰이 처음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범인 식별 효과가 거의 없는 것으로 점차 드러났다. 사진은 같은 사람을 찍었더라도 자세나 조명 등에 따라 달랐다. 사진의 형식이 통일되지 않으면 사진들끼리 비교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하기 시작했다. 이 문제는 1883년 범죄수사학의 창시자이자 파리 경시청 감식요원인 알퐁스 베르티용(Alphonse Bertillon 1853~1914)이 해결한다. 그는 사진의 규격화를 위해 모든 촬영 조건을 동일하게 고정시켰다. 얼굴 정면보다 측면이 식별력이 더 높다고 판단해, 처음으로 측면사진을 범죄사진에 도입하기도 했다. 베르티용은 2000명의 흉악범들의 얼굴 사진만을 따로 모아 ‘사진수첩’을 만들어 경찰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심지어 그는 얼굴이 뭉개진 시체의 신원을 밝히기 위해 얼굴을 복원한 다음 몸을 붙여 찍는 ‘시체사진 촬영법’을 고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초상사진의 범인 식별 효과는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얼굴은 나이 또는 범인의 변조(수염이나 머리를 기르거나 자르는 경우)에 따라 쉽게 달라 보였다. 촬영 조건을 완벽히 같게 하기는 더욱 어려웠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사진이 제공하는 ‘닮음’이라는 정보가 주관적이었다. 서로 닮은 두 장의 사진이 과연 동일한 인물에서 나왔는지를 여러 명의 감식반원들에게 물어봤을 때 의견이 양분되는 경우가 많았다. 베르티용은 신체측정법, 체계적인 언어묘사법 등 다른 식별 기술을 개발해 사진 식별력의 한계를 극복하려 했다. 그러나 19세기 말 지문기술이 등장하자 당시 첨단 과학수사법으로 알려진 베르티용의 모든 식별기술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하지만 베르티용 식별기술에서 정면·측면사진은 지금까지도 쓰이고 있다.
19세기 경찰이 범인 식별을 위해 사진을 이용했다면 같은 시대 범죄학자들은 범죄 원인을 밝히기 위해 사진을 이용했다. 이탈리아 범죄학자 체사레 롬브로소(Cesare Lombroso 1835~1909)는 범죄 원인을 사회적이 아니라 생물학적으로 설명하려고 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 내면에 깊숙이 숨겨진 사악함과 폭력성은 얼굴 표정과 형태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는 4000여장의 범죄자 사진을 비교·분석한 뒤 ‘범죄형’ 얼굴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범죄형의 특징은 턱이 굉장히 크고, 수염이 없으며, 눈빛이 강하고, 머리숱이 많으며, 이마가 튀어나오고, 눈이 사시며, 코가 비틀어졌다.” 범죄자는 범죄를 정말로 저질렀는지는 상관없이 얼굴 생김새에 의해 규정되었다. 이 사이비 과학은 19세기 말 다른 범죄학자들의 혹독한 비판을 받고 곧바로 후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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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을 촬영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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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검을 사진으로 남겨 이후 범인 검거의 자료로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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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문 활용 뒤 사진은 범죄현장 보전용으로
범인 식별 기법에서 지문이 사진을 대체한 뒤 사진은 범죄 현장을 기록하는 데 주로 쓰였다. 범죄 현장 사진을 처음 고안한 사람도 베르티용이었다. 그는 범죄 현장에서 핏자국, 머리카락, 지문 등 사건 해결에 결정적 단서가 될 만한 것들이 훼손되기 전에 사진으로 보존했다. 그는 또한 범죄 현장을 사진으로 찍어 현장에 있던 침대, 책상 등과 같은 사물들의 실제 크기나, 시체와 책상의 실제 거리 등을 간단한 계산으로 알 수 있는 ‘측정 사진법’도 발명했다. 그에게 사진은 길이를 재는 자와 같이 일종의 측정도구였던 셈이다. 베르티용 이후 범죄 현장 사진은 더욱 발전했다. 사진은 자외선, 적외선 등 비가시광선을 이용하여 지문, 정액, 발자국 등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증거물들을 찾아내 기록했다. 사진은 여기서 기록이자 ‘발견’의 수단이다. 최근 디지털 사진의 발달로 범죄 현장에서 찍은 사진의 화질을 쉽게 개선시킬 수 있다. 디지털 사진은 또한 잘못된 각도에서 찍은 사진을 올바른 각도에서 찍은 사진으로 교정한다. 이 교정은 범죄 현장에 있는 사물들의 실제 크기를 산출하는 데 필수다.
19세기 경찰이 범죄자를 식별하기 위해 도입한 범죄사진은 이후 경찰의 영역을 떠나 사회의 가장 취약한 계층으로 점차 확대된다. 20세기 초 서양의 국가들은 부랑자, 매춘부, 외국인 노동자들을 관리·통제하기 위해 이들의 프로필 사진을 범죄사진처럼 찍었다. 범죄사진의 형식은 2차 세계대전 전후로 마침내 모든 국민에게까지 확대되었다. 우리가 날마다 지갑에 넣고 다니는 주민등록증, 운전면허증, 학생증 등 다양한 신분증 사진 뒤에는 19세기 탄생한 범죄사진의 어떤 흔적이 남아 있다. 범죄사진은 현대 예술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1923년 마르셀 뒤샹은 자신의 정면과 측면 프로필 사진을 붙인 ‘현상금 2000달러 공개수배’라는 작품을 제작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1960년대 앤디 워홀은 범죄사진의 형식을 차용해 실제 범죄자 사진을 붙여 작품을 제작하기도 했다.
글 박상우·사진 프랑스 파리경찰문서고 제공
◎ 박상우/중앙대 첨단영상대학원 연구원. 프랑스 사회과학고등연구원(EHESS)에서 사진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외국어대 등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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