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07.29 19:23
수정 : 2009.07.29 19:26
|
입식과 좌식이 결합된 ‘한샘 키친바흐’의 식탁.(한샘 제공)
|
[매거진 esc] 수용층에 따라 세분화된 디자인…
툇마루 선반과 움직이는 부엌 가구까지 무한 변신
마흔살 독신남의 생활을 그린 미니시리즈 <결혼 못하는 남자>(한국방송)에서 건축가인 주인공에게 부엌은 작업실만큼이나 중요한 공간이다. 그곳에서 주인공은 자신을 위해 자신만의 입맛에 맞게 요리를 하고 식사를 즐긴다. 이렇게 부엌 공간은 개인의 생활 스타일을 가장 압축적으로 반영한다. 가족의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주방이 아니라, 부엌 자체를 향유하는 장소인 것이다. 30대 여인의 이미지 위로 “부엌일을 즐겁게 하는”이라는 문구가 붙었던 80년대 ‘오리표 싱크대’ 광고가 ‘주부의 청결함’을 대변했던 것과는 큰 차이다.
최근 부엌 디자인의 새 경향은 부엌 수용층이 다양해졌다는 데서 출발한다. 애초 160㎝ 여성 키에 맞췄던 입식 싱크대의 크기가 변화한 것을 시작으로 전자 기술이 발달하면서 터치 오픈 서랍, 자동 슬라이딩 도어 등 디지털 컨버전스 제품이 부엌에 잇따라 자리하고 있다. 이는 주부만 만족시키는 것을 전략화했던 기존 디자인이 소비자들에게 크게 어필할 수 없다는 의미다. 극단적인 예로 지난해 독일 고급 주방 수납가구 브랜드인 ‘포겐폴’은 남성용 주방 가구를 내놓았을 정도다. 짙은 색채로 무장한 세련된 외관이 날렵하고 군더더기 없는 실용적인 가구 형태와 만났다.
|
수납장이 블록형으로 만들어져 이동 가능한 ‘모르비도’.(넵스 제공)
|
|
와인바 등으로 변신 가능한 ‘I 에디션'.(에넥스 제공)
|
아파트 변천사와 더불어 다목적 공간 표방
국내 전문가들도 남성을 위한 주방가구나 1인용 부엌 가구의 필요성을 인정한다. 국내 주방가구 업체 ‘에넥스’의 이용한 디자인 소장은 “부엌 디자인은 분류상 물, 불, 전기시설과 관계하는 설비의 영역이라 쉽게 바꿀 수 없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최근 부엌 가구들은 독신자, 노인, 핵가족 등 수용층의 특색에 따라 ‘기능’의 세분화를 반영하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부엌 디자인은 주택 설계와 맞닿아 있기 때문에 아파트로 대변되는 국내 주거 변천사와 밀접한 영향을 주고받는다. 살림살이의 규모에 따라 사용 가능한, 또는 외부로 드러나 보이는 부엌 공간도 변화할 수밖에 없었던 것. 박해천 디자인 평론가는 “90년대 말 아이엠에프(IMF) 이후 용인 일대에 대형 아파트들이 대규모로 들어서면서 주방 공간이 식당과 주방으로 이원화되기 시작했다”고 했다. 2000년대 이후 쭉 뻗은 대리석 거실과 서구 아일랜드(일반적인 조리대와 독립된 작업대) 키친이 도입되면서 주방이 확대됐고 동시에 주방 내 시각적 볼거리 또한 변화했다. 박 평론가는 “백색가전의 틀을 깨는 장식적인 주방 가구들이 인기를 끌었던 것도 주방 공간이 넓어졌기 때문에 가능해진 것이다. 김치냉장고가 중산층의 로망이 되고, 화려한 꽃무늬가 가전제품 위에 올라온 것도 아파트 건설의 주거 트렌드와 맞물려 작동한 변화”라고 분석했다.
이런 거주 공간의 변화와 맞물려 최근 부엌 디자인은 북카페, 와인바, 공부방 등 다목적 공간을 표방한다. 최근에는 높낮이를 조절할 수 있는 ‘엘리베이션 테이블’을 적용해 아이들을 위한 공부 테이블, 와인바, 남성 키에 맞춘 부엌 디자인도 각광받는다. 주방과 거실의 경계를 허무는 소파, 서랍형 가구가 주방에 적극적으로 들어오는가 하면 아예 ‘주방 가구는 벽에 고정된다’는 통념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듯 각 부분이 이동 가능한 블록형 디자인도 등장했다.
|
왼쪽부터 전통과 자연주의를 내세운 주방가구 ‘소쇄원의 봄’.(넵스 제공) / 주방 가구 안의 미니 주방.(넵스 제공)
|
얼마 전 롯데건설에서 공개한 ‘캐슬 루미니’의 부엌도 변화한 부엌 디자인의 개념을 반영한 예다. 주방 테이블에는 게임이나 애니메이션을 즐길 수 있는 특화된 테이블이 설치되고 좁은 공간의 효율적인 활용을 위해 ‘ㄱ’자형의 부엌 가구를 배치한 것. 지난해 우수산업디자인 지식경제부 장관상을 받은 ‘에넥스’의 부엌 ‘주부 공간’도 요리 작업대의 틀을 깨고 소파와 티브이, 서재 공간까지 일체화했다.
최근 부엌 디자인의 변화는 범용 디자인 또는 모두를 위한 디자인으로 설명되는 ‘유니버설 디자인’의 추구와 맞닿아 있다. 성별, 국적, 문화적 배경, 연령에 상관없이 누구나 무리 없이 사용할 수 있는 부엌을 찾는 것은 결국 다양한 개인에게 맞는 맞춤형 부엌 디자인으로 가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부엌은 누구나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 하지만 사회문화적 특성에 따른 부엌 문화의 정체성을 찾는 것도 중요하다. 일본의 경우 작은 주거 공간에서 내밀한 부엌을 발전시켰듯 국내에서도 수용자들의 신체적 특성, 취향, 생활 방식을 반영한 부엌을 디자인하려는 노력이 다양하다.
서구에서 들어온 입식 주방문화가 한국 생활에서 적합한가에 대한 문제의식도 부엌 디자인에선 끊임없이 제기되는 화두다. 크게 전통의 문제를 건드리기보다, 오랜 좌식문화에서 땅바닥에 앉아 요리하고 어린아이와 노인이 함께 생활하기에 적합한 공간을 찾는 구체적인 일상의 문제를 반영하자는 차원이다. 국내 주방 브랜드 ‘넵스’는 움직이는 좌탁과 선반, 미닫이문과 격자무늬창을 서양식 주방에 혼합한 후 ‘소쇄원의 봄’이라는 이름을 달았다.
|
직선디자인의 틀을 깬 ‘M키친’.(에넥스 제공)
|
벽에서 나와 움직이는 가구까지
올해 1월 출시된 ‘한샘 키친바흐’의 ‘프레임 미스티 오크’도 기존의 서양식 부엌 가구에 한국의 전통 좌식 문화인 마루를 적용했다. 곡선 형태의 매입형 손잡이로 전통 동양 미닫이문의 느낌을 표현한 것. 서구식 작업대인 아일랜드의 앞부분에는 다이닝 바(식사용 긴 선반)를 설치했다. ‘한샘’의 김윤희 수석디자이너는 “서유럽 디자이너들이 첨단을 이끌던 주방 가구도 최근엔 중국을 비롯한 동양 마켓이 커졌다. 우리의 식생활과 상차림 문화에서 새 디자인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최근엔 국내외 젊은 디자이너들이 새로운 부엌 공간에 걸맞은 흥미진진한 부엌 가구나 소품을 내놓는 것도 눈에 띈다. 영국 신인 디자이너 앨릭스 브래들리가 만든 ‘싱글족을 위한 쿠커 세트’는 상자를 열면 다양한 식기들이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다. 그런가 하면 무선 인터넷이 가능한 서비스 솔루션이 도마에 붙어 있어 요리하면서 요리 정보를 동시에 볼 수 있다.
현시원 기자
qq@hani.co.kr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