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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8.05 19:01 수정 : 2009.08.05 19:01

[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고려 이전 소금 제도에 대한 문헌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고구려 때 소금을 해안 지방에서 운반해 왔다는 대목이 있다. 소금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다른 고대 세계에서도 귀중품으로 대접받았다. 봉급을 뜻하는 영어 단어 샐러리(salary)는 로마 군인들이 소금(salarium)으로 월급을 지급받은 데 연유한다.

고려 태조(9~10세기) 때 도염원을 설치해 나라에서 소금을 직접 만들어 팔아 재정 수입원으로 삼았다. 고려말 충렬왕은 권세가가 소금세를 어지럽히자 그들의 소금판매권을 도로 회수해 국유화했고 충선왕은 염원을 설치해 국가가 소금을 전매하게 하였다. 그럼에도, 귀족과 권세가는 소금 가마솥을 소유해 염정을 어지럽혔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세력가들이 염전을 장악해 국가가 염세를 제대로 거두지 못했다. 18세기 균역법이 시행되면서 비로소 체계적으로 염세가 징수되기 시작했다. 조선 후기에는 염전의 규모, 생산성, 소금의 품질 등에 따라 염전별로 세금이 차등 징수됐다.

1907년 인천에 최초로 근대적인 천일염전이 생겼다. 이후 조선총독부가 1945년까지 소금을 전매했다. 소금 전매제도는 1961년에 없어져 이후 국유 염전과 민영 염전으로 양분된다. 1970년대부터 국산 천일염의 수난이 시작된다. 공업화가 진전되면서 공업용 소금 수요가 늘어 기계염이 많이 생산됐다. 국산 천일염은 미네랄이 많아 공업용으로 최악이었다. 게다가 외국의 값싼 소금이 수입돼 소금값이 내려가자 정부는 소금의 가격 경쟁력을 우려해 천일염 염전 폐전책을 썼다.

고나무 기자·자료 제공 소금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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