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08.26 20:24
수정 : 2009.08.29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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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린의 해삼요리. 김대중 전 대통령이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을 고려해 소화가 잘되도록 담백한 소스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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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미식가 고 김대중 전 대통령 단골 음식점 주방장 회고 …
“건강 나빠졌을 땐 짱뚱어탕 보내드려”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미국 국무장관,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국 대사, 탕자쉬안 전 중국 국무위원, 고노 요헤이 전 일본 중의원 의장,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 글레프 이바셴초프 주한 러시아 대사 ….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국장에 참석한 여러 나라 조문단 명단이다. 이들 외에 평범한 시민들이 꽃을 바치고 묵념했지만, 기자들의 펜과 카메라는 이들을 일일이 기록하지 못했다. 김 전 대통령이 생전에 중산층 등 보통 사람들이 주인인 세상을 지향했음을 떠올린다면 이는 좀 불공정한 일이다.
는 보통 사람들이 가진 김 전 대통령의 기억 가운데 두 개를 길어올렸다. 걸출한 정치인에게 연설하고, 원고를 쓰고, 분노하고, 사랑할 에너지를 주었던 보통 사람들이다. 중국음식점 ‘홍린’의 장병화 주방장과 남도음식 전문점 ‘포도나무집’의 이화숙씨가 그들이다. 잘 알려지지 않았던 취임 전후 김 전 대통령의 모습을 그들의 기억에서 찾아볼 수 있다. 김 전 대통령은 종종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과 비교된다.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은 젊은 시절 간소한 옥수수 음식에서 말년에 모잠비크식 해산물요리까지 가리지 않고 음식을 즐겼으며, 특히 치킨 커리 등 닭요리를 좋아했다고 <가디언>은 썼다. 김 전 대통령과 관련된 음식으로 대부분 ‘홍어’를 떠올리지만, 그는 실제로 만델라처럼 가리지 않고 모든 음식을 잘 먹었다. 특히 중국 음식은 그의 숨은 즐거움 가운데 하나였다.
기름기 대신 담백한 음식 선호
홍린 장병화(55) 주방장이 기억하는 디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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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린 장병화(55) 주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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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1981년부터 2001년까지 마포구 호텔서교 중식당에서 일했습니다. 김 전 대통령께 본격적으로 음식을 대접한 건 새정치국민회의 총재 시절인 1995년쯤입니다. 저는 비서관에게 그날 김 전 대통령의 몸상태를 물어본 다음 메뉴를 정했습니다. 아침식사는 했는지, 속은 괜찮은지 등 정황을 물었죠. 속을 달래시라고 가끔 제비집수프를 해드렸습니다.
즐겨 드시던 요리는 해삼·전복요리입니다. 이희호 여사는 탕수육을 좋아하셨죠. 주말에는 가족과 함께 찾으셨습니다. 소스 등 요리 스타일은 그때그때 김 전 대통령의 입맛을 고려해 달리했습니다. 되도록 매운 소스는 피했습니다. 담백하고 향긋한 소스 위주였습니다. 가령 해삼요리는 굴소스로 만들었습니다. 수프도 담백하게 만들었죠. 요리 뒤 식사로는 쇠고기 유니자장을 특히 좋아하셨습니다. 같은 메뉴라도 이걸 식사로 먹느냐 독한 중국 술의 안주로 먹느냐에 따라 맛을 달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 전 대통령은 술을 안 마셨기 때문에 소화 잘되는 메뉴와 스타일을 고른 것입니다.
김 전 대통령은 음식을 남기는 법이 없었습니다. 식성이 좋아 뭐든 잘 드셨습니다. 요리가 7~8가지 나와도 자기 몫의 요리를 다 드시고 마지막에 식사로 자장면까지 다 드셨습니다. 이처럼 새정치국민회의 총재 시절부터 1998년 청와대에 들어가시기 전까지 많게는 한 주에 세 번 이상, 적게는 한두 번 제가 일하는 중식당을 찾았습니다. 의원, 보좌관까지 한 번 올 때마다 40명 이상의 음식을 준비했던 기억이 납니다. 1997년 당선 직후에도 취임식 전에 두 번 오셨습니다. 임기중에는 한 번 제 음식을 찾아 청와대로 보내드렸습니다. 불행히 퇴임 뒤엔 모시질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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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화 주방장은 호텔서교를 나와 홍린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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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전 대통령은 진지한 사람이라고 종종 보도됩니다. 제 기억에도 그랬습니다. 원래 농담을 잘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한 번 예외가 있었어요. 국민회의 시절 의원들과 회의를 마치고 식사하러 왔습니다. 수십 명이 함께 있었죠. 평소처럼 해삼요리를 먼저 접대했습니다. 직원은 김 전 대통령의 접시부터 요리를 덜었습니다. 그 뒤 차례대로 다른 의원과 당직자들의 접시에 요리를 덜었습니다. 직원이 다른 접시에 요리를 다 덜기 전에 김 전 대통령이 자기 몫을 다 드셨던 모양입니다. 김 전 대통령이 직원에게 “있으면 더 주게”라고 하자 직원이 “정확히 사람 수대로 덜어서 남은 게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이때 김 전 대통령이 장난스레 웃으며 자기 앞에 앉아 있던 한 측근에게 “어이 ○○야, 네 거 이리 내”라고 농담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김대중’이라는 이름 석 자를 기억한 과정도 특이합니다. 1985년 무렵 저는 동교동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정치에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언제부턴가 골목마다 경찰이 신분증 검사를 시작했습니다. 출퇴근할 때마다 ‘대체 왜 이러는 거야?’라고 구시렁거렸습니다. 하루는 용기를 내 경찰에게 물었죠. “김대중씨를 모르세요? 가택 연금된 김대중씨가 동교동에 살아요”라고 외려 이상하다는 듯 저를 쳐다봤죠. 김대중이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기억한 날이었습니다. 10년쯤 뒤 그분에게 요리를 대접하리라곤 그땐 생각지 못했습니다. 퇴임 뒤 몸이 안 좋다는 뉴스를 보고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제게 김 전 대통령은 단순히 정치인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알던 고객이자 인간이었으니까요.”
도망가지 말고 악수라도 해둘걸
포도나무집 이화숙(51)씨가 기억하는 디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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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나무집 이화숙(51)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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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전라도에서 서울로 올라와 식당을 한 게 벌써 8년 전입니다. 저는 대통령 시절이나 야당 총재 시절엔 김 전 대통령에게 직접 음식을 해드린 적이 없습니다. 그저 신문에서 보는 ‘훌륭한 정치인’이었죠. 처음으로 김 전 대통령에게 음식을 보내드린 것은 퇴임 뒤 첫 신년 하례식을 한 2003년 무렵입니다. 제가 직접 가서 음식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2005년으로 기억합니다. 김대중도서관에 직접 찾아갔습니다. 정치인 등 김 전 대통령과 50여명의 명사들이 모이는 자리에 드릴 음식을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떡국 등 음식 준비를 제가 도맡아 했습니다. 매생이도 들고 갔지요. 짱뚱어(농어목 망둑어과의 바닷물고기로, 뻘에 산다)탕도 종종 해드렸습니다. 건강이 심하게 나빠졌을 땐 짱뚱어 여러 마리를 푹 고아서 갖다드렸습니다. 이걸 ‘고를 낸다’고 하는데 여러 마리를 고아도 커피잔으로 한 잔 나올까 말까 했죠. 또 동교동 자택에 김치, 젓갈 등의 밑반찬도 갖다드렸습니다. 깨죽도 자주 해드렸습니다. 저희 식당은 지난해 8월 서교동으로 옮기기 전까지 동교동에 있어서 신선한 음식을 바로 갖다드릴 수 있었죠. 식당 위치를 옮긴 뒤 김 전 대통령의 건강이 계속 나빠져 자주 입원하셨죠. 그때 짱뚱어탕과 깨죽을 자주 보내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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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이 악화했을 땐 짱뚱어탕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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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직접 음식을 하러 갔을 때 후회되는 일이 있습니다. 생활한복까지 갖춰 입고 기념관을 찾았죠. 김 전 대통령이 저를 보고 비서관에게 누구냐고 물으시더군요. 비서관이 “오늘 음식을 해줄 분”이라고 설명하자, 제게 오라고 손짓하더군요. 너무 떨려서 가까이 가지 못하고 꾸벅 인사만 하고 부엌으로 들어가버렸습니다. 후회스럽네요. 악수라도 해둘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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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나무집은 퇴임 뒤 김 전 대통령이 자주 음식을 사다 먹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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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 대통령이 사랑했던 음식을 맛보려면?
◎ 포도나무집 | 삼합, 꼬막, 짱뚱어탕 등 남도음식이 두루 보통 이상의 맛을 낸다. 주요리와 함께 제공되는 갓김치·배추김치·파김치 등 다양한 김치 맛이 일품이다. 삼합 대 6만5000원, 중 5만5000원, 소 4만5000원, 짱뚱어탕 1만2000원 등이다. 마포구 서교동 (02)322-1220.
◎ 홍린 | 보통 중국음식점과 달리 담백하고 깔끔한 맛이 특징이다. 해삼 요리 등 해산물이 맛있고, 짬뽕·자장 등 기본 식사도 느끼하지 않고 깔끔하다. 오룡해삼 5만원, 전가복 6만원, 짬뽕 6000원 등이다. 강서구 화곡동 (02)2608-6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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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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