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09.02 20:53
수정 : 2009.09.02 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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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개통된 지하철 9호선의 내부. 통합디자인 개념을 도입해 질서를 강조한 공간이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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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노선 띠 눈에 안 띄는 9호선 역이 확 눈에 띄는 이유…
장식에서 통합으로, 지하철 공간 디자인 변천사
1974년 지하철 1호선이 국내 첫 시동을 걸었을 때만 해도, 지상이 아닌 지하에 길을 뚫어 교통수단을 운영한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소식이었다. 붉은색 의자에 철제 손잡이, 바닥 타일은 당시 낡은 버스에 비해 기계적이고 세련된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환경 구성에서 핵심은 사용자를 위한 공간 디자인이 아닌, 지하철이 빨리 달릴 수 있는 토목 건설 공사를 효율적으로 끝내는 것이었다. 지하철 노선이 늘어 가면서 지하철 공간 디자인도 시대에 따라 변화를 거듭했다. 동대문운동장역 벽화에 호돌이가 새겨져 있고, 안국역에 전통문양이 장식되는 등 1기(1~4호선) 정거장이 주변 지역을 상징화하는 디자인을 보였다면, 2기(5~8호선) 디자인은 지하공간의 폐쇄성을 극복하려는 색채 계획이 시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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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호선 고속터미널역에는 터미널의 특성상 <여행의 즐거움>이라는 이름의 벽화가 장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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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지하철역 시각적으로 시끄러워
지난 7월 말 개통한 서울시 9호선 지하철 공간은 그간 한국 지하철이 추구한 디자인의 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하나의 나침반이다. 지하철 역사에 미술장식품을 채우는 행위가 이제껏 지하철 환경을 개선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면, 최근 지하철 공간은 디자인이 어떻게 지하철의 활용도를 높일 것인가에 대한 관심으로 변화했다. 먼저 지하철 9호선 공간에는 정거장의 노선 띠, 글자체를 구성하는 환경 색채부터 조명, 마감재 선정, 각종 사인물까지 공공 디자인에 대한 고민이 종합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1~8호선 또한 지하철 공간 디자인을 둘러싸고 다양한 모색을 거듭했지만, 9호선은 새롭게 건설하는 만큼 설계 당시부터 통합적인 디자인을 시도했다는 점이 큰 차별점이다. 9호선은 건축가와 디자이너가 애초 협업을 해 공간의 위계질서를 세우는 데 초점을 맞춘 것. 이를테면 노선색 사용을 자제하고, 안내 사인 및 각종 비상방재시설물이 공간에 잘 드러나도록 한 것이나, 전 역사에 마감재의 재료·색상·규격을 통일한 것이 그러한 결과물이다. 9호선 환경 디자인을 실행한 메카조형그룹의 천호진 실장은 “기존 지하철역 중에는 시각적으로 시끄러운 공간이 참 많다. 9호선은 환승 통로라는 건축 형태와 광고, 시설물, 안내 사인, 미술장식품 등 각종 디자인 요소가 관계를 맺도록 고민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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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호선 구파발역에 설치된 타일 모자이크 벽화. 조선시대 파발마들이 다니던 구파발 지역의 특성을 살린 디자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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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색, 녹색, 주황색 등의 원색을 사용한 1기 지하철과 보라색, 황갈색, 자주색 등의 중간색을 사용한 2기 지하철에 이어 9호선의 첫인상을 결정하는 노선색은 금색이다. “서울 한강을 따라 흐르는 만큼 고급스러운 이미지”라는 설명이 따라붙기도 하지만, 9호선을 탑승하다 보면 기존 노선에 비해 색상의 반복적인 나열이 덜하다. 지금 당신이 탄 지하철이 몇 호 선인지를 강렬하게 인지시켜 주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편리하게 지하철 공간을 이용하고 시각적인 질서를 경험하도록 하는 것이 디자인의 목표였기 때문이다. 메카조형그룹은 “교통공간에 통합환경 디자인 개념을 도입하기 위해 각종 광고와 뒤섞여 공간을 혼란스럽게 하던 노선 띠 활용을 줄이고, 화살표나 픽토그램을 국제 규격에 맞춰 디자인했다”고 설명했다.
지하철 공간에서는 수용자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각종 사인물의 타이포그래피가 매우 중요하다. 영국의 경우 이미 20세기 초에 지하철의 사인물을 재정비하기 위해 뉴 존스턴 서체가 개발되었을 만큼, 지하철 공간에서 서체는 디자인의 필수 요소다. 눈치 빠른 사람들은 지하철 서체가 바뀐 것을 이미 알아챘을 테지만 올해 초 서울지하철 1~4호선은 서울시 남산체와 서울색(기와진회색)으로 서체 디자인이 변경됐다. 전동차 안에 걸린 종합노선도, 수유실, 스크린도어상의 글자가 모두 얼굴을 바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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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지하철 1호선 개통 당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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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하면 신축된 9호선 지하철 공간에는 벽에 걸린 미술작품에서도 통합적 이미지를 부여하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노선 전체에 걸쳐 붓과 먹의 느낌을 살린, 한국의 풍경을 표현한 작품들 위주로 선정한 것. 사실 9호선뿐 아니라 역사 안에 설치된 각종 미술장식품은 지하철 환경을 개선하려는 노력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요소다. 2000년대 초반까지 각 역의 역사적 배경과 지리적 유래를 설명해주는 압도적인 크기의 벽화가 주를 이뤘다면, 2000년대 중반부터는 환승 통로에 현대 미술 작가들의 재기발랄한 작품을 설치하는 등 적극적인 시각 관람의 공간으로 변모했다.
2007년부터 시행된 도시갤러리프로젝트 사업의 일환인 ‘함께 타는 공공미술’은 아예 지하철 환승 통로나 역사 공간을 예술품의 수준으로 끌어올린다. 대표적으로 옥수역 동호대교 기둥에 세련된 바코드 문양을 입힌 양주혜 작가의 <바코드: 빛의 문>은 기존 지하철 벽화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장생도 타일 모자이크 등의 형식을 뛰어넘어 새로운 차원의 예술품을 감상하게 한다. 서울메트로의 김정환 홍보차장은 “지하철 공간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공간이라는 점에서 더 흥미롭다. 건설 당시 기능적 측면에 중점을 찍었던 지하철 디자인은 최근엔 공간을 장식하는 것을 뛰어넘어 다양한 도시 디자인, 지역의 문화적 코드가 만나는 장소”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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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사라진 지하철 내부의 빨간색 공중전화 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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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미국·유럽 등지에서 지하철 공간은 공공 디자인의 수준과 예술적 취향을 드러내는 상징적인 장소다. 바스키아, 키스 해링 등 유명 작가의 그라피티로 꾸며진 뉴욕 지하철이나, 애니메이션으로 바닥과 벽 공간을 꾸민 도쿄 지하철 환경은 각 사회의 이미지와 맞물려 독특한 정체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곳이다. 스페인 바르셀로나 옛 시가지 지역의 지하철역이 에스에프적인 공간으로 디자인되어 도시 환경과 이질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새로운 경험적 장소라면, 영국 런던의 지하철 디자인은 지하철 디자인의 대명사이자 교과서로 평가받는다. 임근혜 미술평론가는 “런던 지하철 디자인은 도시를 연결하는 거대한 네트워크에 전체적인 통일성과 개별적인 정체성을 동시에 부여했다. 이러한 통합된 디자인은 지금도 전세계 공공디자인의 교과서로 여겨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장애인 등 교통 약자에 대한 배려는 부족
지하철 디자인은 장애인·노약자·임산부 등의 사회적 약자들이 이용하기에 적절한지도 중요하다. 국내의 경우 공간의 색상, 시각 안내정보, 환경 장식물 등 대부분 시각적인 매체에 국한되어 있어 약자에 대한 디자인적 배려는 아직 부족하다. 지하철은 공공 디자인의 이슈가 피어나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출구를 찾기 힘들 경우에는 목적지에 다다를 수 없는 가장 리얼한 삶의 공간이다.
글 현시원 기자
qq@hani.co.kr·사진제공 서울메트로, 메카조형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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