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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의 예수원은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침묵과 기도의 시간을 갖고 오기에 좋은 곳이다. 노동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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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독서광 노동효의 썸플레이스
<진보와 빈곤>과 강원도 태백 ‘예수원’
기독교인도 아닌 내가 ‘예수원’을 방문하게 된 건 엉뚱하지만 ‘크리스티아니아’ 때문이었다. 크리스티아니아는 기존 질서에 얽매이지 않은 채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코펜하겐의 버려진 군병영지에 모여 살면서 자연스레 형성된 공동체. 그들은 ‘인간은 법이 아니라 상식에 기초한 직접민주주의를 통해 스스로의 삶을 꾸려나갈 수 있다’는 이상을 현실 세계에서 구현하는 실험을 해왔다. 그런데 최근 덴마크 정부가 아파트 단지를 짓기 위해 크리스티아니아를 철거하기로 했다는 뉴스를 접하고 나는 우울해졌다. 그러나 한편 호기심이 생겼다. 비록 남한 사회를 자본주의 사회라고 일컫지만 그 틀을 벗어난 사람들이 있듯 또다른 삶, 또다른 사회를 꿈꾸는 실험실도 있지 않을까? 인터넷을 통해 ‘공동체’를 찾아보았다. 전국 곳곳에서 다양한 실험들이 이뤄지고 있었다. 그리고 중세 수도원 같은 ‘예수원’의 모습과 마주치는 순간 마음이 동했다. 방문 예약을 하기 위해 전화를 걸었다.
태백 하사미 분교 앞에 이르자 ‘예수원’ 이정표가 방향을 가리켰다. 오솔길의 끝에서 커다란 돌비석이 나를 맞이했다. 이렇게 씌어 있었다.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라 - 레 25: 23 中’ 산비탈을 따라 늘어선 건물들. 돌로 외벽을 쌓고 갈대를 엮어 놓은 지붕. 영화 속에서나 본 중세 유럽 마을로 들어선 것만 같았다. 간단한 신상 기록을 하고 손님부 담당자의 뒤를 따라 방문자 숙소로 올라갔다. 다다미가 깔려 있는 방 안에는 열 명가량의 방문객이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나는 2박3일간 그곳에서 지냈다. 하루 세 번 다 함께 식사와 기도를 하고, 침묵 시간엔 오솔길을 따라 숲을 거닐었다. 산책에서 돌아오면 벽난로가 있는 도서관에서 <진보와 빈곤>을 읽었다. 예수원에서 이뤄지는 실험의 토대는 <성경>과 헨리 조지의 <진보와 빈곤>이었기 때문이다.
헨리 조지는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부는 쌓이고 사회는 진보하는데 인간의 삶은 왜 더 빈곤해지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고민했던 19세기 미국의 사상가. 그는 빈곤의 가장 큰 원인이 토지사유제에 있다고 여겼다. 전 국민이 낸 세금으로 건설되는 철도, 도로, 항만 등등. 사회기반시설의 확충으로 사회는 발전하지만 그로 인한 토지가격 상승의 혜택은 땅을 가진 자들에게 돌아간다는 것. 당시 베스트셀러였던 그의 저서는 톨스토이에게까지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부활>에서 농민들에게 토지를 나눠주던 네플류도프는 헨리 조지의 이름과 주장, ‘지대공유제’를 명시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예수원에선 매일 점심식사 뒤에 중보기도를 했다. 수능 합격, 사업 번창이 아니라 자연재해로 피해를 본 먼 나라의 이웃들을 위해, 용산에서 죽은 이들과 그 가족들을 위해. 기도 내용은 무척 구체적이었다. 아마도 인터넷과 구독신문인 <한겨레> 때문이었으리라. 나는 하나님이 그 기도를 모두 들어줄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비록 이곳 사람들이 외진 데서 살지만 현실과 동떨어진 세계에서 살고 있는 건 아니라는 것을. 어쩌면 현실과 동떨어진 세계에서 살고 있는 건 방송·신문을 통해 매일같이 뉴스를 접하지만 바쁜 일상에 쫓겨 이웃의 고통을 남의 일처럼 여기며 사는 우리들이 아닐까? 2박3일을 보내고 나오는 길, 물음표 하나가 따라왔다.
노동효 여행작가·<로드 페로몬에 홀리다> 저자 newcross@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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