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10.21 19:11
수정 : 2009.10.21 19:12
|
김제원 <지큐>(2008.11).
|
[매거진 esc] 예술과 경계 사라지는 패션사진의 최전선…
90년대 이후 한국도 스타 패션사진가 등장
“산책을 나가면 무도회를 만난다. 그곳에서 춤을 출 수도 있겠지. 시간이 좀 여유롭다면 가능한 한 오랫동안 춤을 추고 싶다. 어떤 춤을 추어도 괜찮으리라. 그리고 바라보고 싶다. 또 사진을 찍고 싶다.” 카리스마 넘치는 남성 사진가들이 쥐락펴락했던 패션사진계에서 모델 출신의 여성 사진가 사라 문은 기어코 패션사진계의 거목이 됐다. 그에게는 예술과 패션의 경계를 무너뜨렸다는 평가, 남성이 아닌 여성의 시각에서 패션사진의 영토를 넓혔다는 찬사가 뒤따른다. 사라 문의 사진 안에서 모델과 의상은 자유롭게 춤을 추듯 하나가 된다.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수식어가 모인 패션 기사의 행간으로는 읽히지 않는, 낮은 호흡과 몽환적인 색채가 그의 사진에서는 느껴진다.
“동시대의 거울이자 예민한 센서”
사라 문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패션 사진가 헬무트 뉴턴을 비롯해 미술가인 낸 골딘, 신디 셔먼, 앤디 워홀 등은 모두 첨단 유행의 보고인 패션 잡지를 통해 그들의 작업을 보여주는 데 몰두했다. 강태희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교수는 “이미지 산업의 지표인 패션사진은 현대미술과 끊임없이 관계를 맺었다”며 “대중의 변화무쌍한 기호를 반영하는 동시대의 맑은 거울이자 예민한 센서로서 패션사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
강혜원 <보그>(2009.8).
|
|
박경일 <지큐>(2008.5).
|
예술과 패션, 대중문화와 패션이 서로 구애하듯 협업하는 것은 2009년 한국 패션사진계의 주목할 흐름이다. 초기 패션 잡지인 <의상>의 1979년 가을호는 최신 유행 의상을 입은 여성 모델이 투박한 자세로 정면을 쏘아보고 있지만, <보그> 한국판의 2009년 8월호는 아예 13명의 미술가들과 협업한 ‘패션 드라마’를 기획특집으로 내세웠다. 모델들은 인체를 위로 길게 늘려 초현실적으로 사람을 표현한 이환권의 조각이나 깨진 도자기 파편들을 에폭시로 메워 만든 이수경의 ‘번역된 도자기’ 등과 함께 서거나 앉아 있다. 이 프로젝트의 사진을 찍은 여성 패션사진가 강혜원씨는 “최근 패션 잡지는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에게 옷을 보여주고 그것에 영감받은 새 작업을 제안해 사진에 담을 정도다. 그만큼 미술과의 협업에 적극적”이라고 설명했다.
|
강혜원 <보그>(2009.9).
|
|
박경일 <누메로>(2009.5).
|
1970, 80년대 초창기 패션사진이 외국 사진을 모방하는 수준이었다면 대중문화가 급격히 팽창한 1990년대 이후 유명 스타의 사진이나 패션사진을 찍은 김중만, 구본창, 조세현, 박기호, 강영호, 박경일, 조선희 등의 사진은 독자적인 예술 작업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국외 라이선스 잡지의 국내 유통으로 패션 잡지가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한 2000년 이래 패션사진은 대중문화에 반응하는 매혹적인 ‘트렌드세터’이자 그 자체로 매력적인 작품이 되기를 꿈꾼다. 옷의 디테일을 강조해야 할지, 모델의 황홀한 표정을 찍어야 할지 고민했던 과거와 달라진 것은 그 판단의 중심에 사진가의 개성이 위치한다는 점이다.
패션사진가들은 빵빵한 조명이나 화려한 드레스의 질감, 섹시한 여성 모델의 몸매를 포착하는 데만 몰입하지 않는다. 최근엔 기존 패션사진의 전형화된 표현에 갇히지 않는 신선한 감각의 사진이 늘고 있다. 아름다움에 대한 판단 기준을 재고하게 하는 사진뿐 아니라 유머러스하고 일상적인 감성으로 촬영 현장에서 연극적인 퍼포먼스를 곁들이는 경우가 많다.
|
김제원 <지큐>(2008.11).
|
예로 젊은 패션사진가 김제원씨는 상상에 바탕한 도발적인 컷을 즐긴다. 리처드 애버던이나 조세현의 사진을 보고 감명 받아 패션사진에 뛰어든 그는 기존 패션사진의 매력을 이어가되, 아직 누구도 해보지 않은 새로운 작업을 하고 싶다고 했다. 김씨는 국내 한 절의 스님이 키우던 곰을 데리고 <지큐> 화보를 찍었고, 손에 과일을 쥐게 한 모델에게 권투 경기를 제안했다. 그는 “전국을 돌면서 사진 촬영 장소를 찾고 또 최상의 시각적인 효과를 줄 수 있는 퍼포먼스를 생각한다. 회화처럼 보이는 패션사진을 찍고 싶다”고 했다. 국내 여러 잡지에서 활동하는 강혜원씨는 “유행의 흐름이나 감수성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보다는 상황을 연출하는 데 관심이 있다”고 말했다. 패션잡지 편집장의 가상 화보를 찍을 때 명품 가방을 든 장미희의 도도한 몸짓을 살린 사진이라든지, 기차를 배경으로 한 사진에서 녹색의 기차 의자를 뒤로 길게 보이도록 그대로 살린 것이 그런 예다.
<지큐>, <아레나>, <에스콰이어> 등 남성 잡지의 독자층이 늘면서 남성 모델의 사진이 증가한 것도 패션사진이 다양화해지는 이유다. 패션계의 흐름 자체가 성적 구분이 모호한 유니섹스의 특성을 보이고 있고 이에 영향 받아 사진에서도 다양한 정체성과 스타일을 표현하려는 시도가 늘고 있다. 여성 잡지의 컷은 점점 중성적인 어법을 구사하고, 남성 잡지에는 아기자기한 느낌과 파스텔컬러의 사진이 늘어나는 것도 흥미로운 변화다.
|
사라문 ‘샤넬’ 광고 사진(1997).
|
|
박경일 <에스콰이어>(2008.6).
|
패션사진가 박경일씨는 <누메로> 2009년 5월호에 심플한 민소매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은 채 서로 몸을 밀착한 두 명의 남성 모델을 담았다. 박경일씨는 “꼭 성적인 매력을 강조하지 않더라도, 최근 트렌디한 의상 중에는 새로운 감수성을 재미있게 보여줄 수 있는 것들이 많다”고 말했다.
남성지 증가로 새로운 영역 개척
그가 강조하는 것은 자기만의 스타일, 그리고 여러 경향들이 공존한다는 사실이다. “사진가로서 패션사진이라는 장르에 한정하지 않고 약간의 일탈은 어떻게 가능할지, 자유로운 틀은 무엇일지 고민한다.” 대중문화와 동시대 예술에 첨예하게 반응하는 패션사진은 그래서 오늘도 변한다.
글 현시원 객원기자
sonvadak25@hanmail.net·사진제공 박경일, 김제원, 강혜원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