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9.10.28 21:00 수정 : 2009.10.28 21:00

(왼쪽부터) 영국 패션 브랜드 버버리의 베스트셀러 트렌치코드. 2009년 가을/겨울 버버리 프로섬 컬렉션에서 선보인 트렌치코드.

[매거진 esc] 실용적인 군복에서 출발해 미니드레스까지 진화해온 트렌치코트…패션을 넘어 문화적 상징으로

옷장에서 한숨 쉬는 소리가 들린다. 범인 색출을 위해 옷장을 열었다. 옷장 한구석에서 가을색 트렌치코트가 천장을 쳐다보며 한숨을 쉬고 있다. 가을이 왔다는 소리다. 트렌치코트를 꺼내 입고 출근길에 나서면, 매일 똑같은 풍경도 때로는 흑백으로, 때로는 세피아톤으로 다르게 보인다. 마법 망토가 마법사에게 신비의 힘을 주는 옷이라면, 트렌치코트는 기분을 흔들어 놓는 신기한 옷이다.

트렌치코트 매개로 소셜네트워킹 사이트까지 등장

트렌치코트의 역사는 영국 브랜드 버버리의 역사와 맥을 함께한다. 1856년 토머스 버버리가 영국 헴프셔 지방에 포목상을 열면서 시작된 버버리의 역사는 1888년 통풍이 잘되면서 방수 기능을 가진 직물 개버딘을 개발하면서 그 첫 장을 쓰기 시작했다. 1901년 토머스 버버리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보병들을 위해 개버딘으로 만든 우비에 기능성 견장, 허리띠, 디링(D-ring) 등을 더한 코트를 만들었는데, 이게 참호라는 뜻의 ‘트렌치’가 붙은 트렌치코트다.

군인들을 위해 만들어지고 군 장교의 제복으로도 널리 입혔던 트렌치코트는 지극히 실용적인 디자인에서 출발했다. 총이 어깨에서 미끄러지지 않도록 하는 견장과 사격할 때 어깨를 보호하는 플랩, 바람이 들어가는 걸 막아주는 소매끈, 수류탄 등을 걸기 위한 벨트 등이 트렌치코트의 실용성을 말해주는 장식이다. 깃을 세울 수 있고 주머니가 많은 것도 군복의 특징 중 하나다. 트렌치코트는 전쟁이 끝난 다음 전쟁터가 아닌 도시로 그 무대를 옮겨 일반화되고 대중화되면서 멋스러운 코트로 자리잡았다.

(왼쪽부터) 2009년 가을/겨울 버버리 프로섬 컬렉션에서 선보인 트렌치코드. 패션 브랜드 닥스의 2009년 가을/겨울 트렌치코드. 라푸마에서 출시한 고어텍스 소재의 트렌치코트.

트렌치코트는 시간이 지나면서 본래의 디자인에서 조금씩 진화했다. 소재에 있어서는 2000년대 이후 면이나 실크, 얇은 오간자, 우비가 연상되는 타페타 소재 등이 트렌치코트에 사용되면서 조금 더 가볍고 잘 구겨지지 않는 트렌치코트가 제작됐다. 아웃도어 브랜드 라푸마는 등산복 소재로 사용되는 고어텍스를 트렌치코트에 적용시킨 제품을 선보이기도 했다. 패션브랜드 닥스 신사복 이지은 디자인실장은 “디자인은 무릎까지 내려오는 긴 기장과 허리에서 엉덩이까지 일자로 내려오는 기존의 실루엣에서, 엉덩이를 살짝 덮는 짧은 기장과 허리선을 살린 실루엣으로 변신을 거듭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색상 역시 베이지색과 남색 등 무채색 계열에서 아이보리색, 분홍색 등 다양한 색상의 트렌치코트가 나오고 있다. 트렌치코트는 ‘가을과 초겨울에 겉옷으로 입는 옷’이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가을뿐 아니라 사계절 모두 입을 수 있고 코트뿐 아니라 미니 드레스로도 입을 수 있으며 10대부터 60대까지 입을 수 있는 전천후 패션 아이템으로 자리잡고 있다.


버버리는 100년 넘게 트렌치코트의 명가로 인식되어왔지만 1990년대 들어 트렌치코트의 변하지 않는 디자인 등으로 소비자들에게 점차 외면당했다. 버버리의 브랜드 가치는 하락했고 버버리 트렌치코트는 지루한 아이템이 됐다. 버버리의 구원투수는 2001년 구치와 디케이엔와이(DKNY)의 수석 디자이너였던 크리스토퍼 베일리였다. 크리스토퍼 베일리가 버버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영입되면서 버버리와 버버리 트렌치코트는 적극적인 변신을 시작했다.

크리스토퍼 베일리는 버버리의 새로운 라인 ‘버버리 프로섬’을 통해 버버리와 트렌치코트의 현대화를 이뤄냈다. 2008년 봄/여름 컬렉션에는 스쿠버다이버의 옷에서 영감을 받은 스쿠버 트렌치코트, 가죽 소재로 만들어 빈티지 느낌이 강한 트렌치코트 등을 디자인했다. 2010년 봄/여름 컬렉션에서는 트렌치코트를 허리 라인을 올린 하이웨스트 미니 드레스로 응용한 의상을 선보였다. 트렌치코트의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는 버버리는 최근 트렌치코트를 매개로 한 소셜네트워킹 사이트 ‘아트 오브 트렌치’(www.artofthetrench.com)를 열었다.

버버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크리스토퍼 베일리가 직접 그린 트렌치코트 일러스트레이션.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는 트렌치코트의 매력은 그 성격에 있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 가을에 적합한 소재의 특성은 트렌치코트에 ‘가을’이라는 계절감과 외로움, 고독이라는 성격을 부여했다. 영화도 한몫했다. 비비언 리와 로버트 테일러가 트렌치코트를 입고 나온 영화 <애수>, 험프리 보가트와 잉그리드 버그먼이 트렌치코트를 입어 화제가 됐던 영화 <카사블랑카> 등 1940년대에 제작된 영화는 트렌치코트에 감성적인 코드를 덧입혔다.

트렌치코트는 남성을 위해 디자인됐지만 점차 그 영역을 여성복으로 넓혀갔다. 트렌치코트가 남성에게 남성성을 드러내준다면, 여성에게는 오히려 여성성을 극대화시킨다. 영화 <크레이머 더 크레이머>의 메릴 스트립와 영화 <언페이스풀>의 다이앤 레인이 영화 속에서 그랬던 것처럼 남성적 선이 살아 있는 트렌치코트를 입은 여성한테는 지적인 분위기와 함께 불안함이 느껴진다. 이를 두고 스타일리스트 김성일은 그의 책 <아이 러브 스타일>(시공사 펴냄)에서 트렌치코트의 매력을 “이중적인 아름다움”이라고 썼다.

크리스토퍼 베일리는 한 인터뷰에서 “나에게 버버리 트렌치코트는 모든 코트 중에서 가장 매력적인 코트”라며 “여러 방향으로 진화할 수 있기 때문에 내가 작업한 모든 의상 중에 가장 다재다능한 아이템”이라고 말했다. 이지은 디자인실장은 “역사를 가진 트렌치코트는 패션에서 고전이나 다름없다”며 “트렌치코트의 역사를 재해석하고 실루엣 등을 현대에 맞게 다시 디자인하는 작업은 디자이너에게 무척이나 매력적인 작업”이라고 설명했다.

디자이너들에게도 흥미로운 모험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것들이 쏟아져나오는 패션계에서 100년이 넘는 시간을 견뎌냈다는 것만으로도 패션의 ‘고전’이 된 트렌치코트는 아마 사계절에서 가을이 사라지지 않는 한 또다른 얼굴로 계속 그 역사를 이어갈 것이다. 앞으로 또 어떤 디자이너의 손을 거쳐 어떻게 변주되고 응용될까. 패션 아이템을 넘어 문화적 상징이 된 트렌치코트의 앞날이 궁금해진다.

안인용 기자 nico@hani.co.kr

사진·자료 제공 버버리코리아, 엘지패션


광고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