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11.30 19:16
수정 : 2009.11.30 19:16
[건강2.0]
진료를 하다 보면 아이를 낳은 뒤 이가 약해졌다고 하소연하는 환자들을 종종 보게 된다. 물론 그런 투덜거림에는 소중한 내 아이를 이 세상에 내놓기 위해 내 건강의 일부를 기꺼이 희생했다는 은밀한 자부심이 느껴지지만 말이다. 미국에서도 아이를 한 명 낳을 때마다 이가 하나씩 빠진다는 속설이 있다고 한다. 정말 그럴까?
일반적으로 임신 후반기로 갈수록 임신부의 뼈는 약해지지만 치아는 그렇지 않다. 즉 태아의 뼈를 만들기 위해 엄마의 치아를 구성하고 있는 무기질이 동원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임신을 둘러싼 구강건강에 대한 속설들은 지극히 희생적인 모성애를 강조하기 위한 임신부들의 신화적인 자기 설정에 불과한 것인가? 이것 역시 사실이 아니다. 임신 중에는 자궁의 변화뿐 아니라 구강 내에도 큰 변화가 일어난다.
임신 기간에 일어나는 구강 내 변화는 치아 자체보다는 주로 치아를 둘러싼 구강 환경의 변화에서 비롯된다. 치아의 표면은 타액에 젖어 있는 상태에서 끊임없이 무기질의 상실과 회복을 반복한다.
그런데 임신을 하게 되면 타액의 산성도가 높아져 치아 표면에서의 재강화 작용, 다시 말해 한 번 빼앗긴 무기질을 다시 되찾아 오는 일이 어렵게 된다. 또한 임신 중에는 타액 내의 충치 원인균들이 많아져 임신 상태가 아닐 때보다 충치가 더 쉽게 발생할 수 있다.
임신 중에 잇몸이 붉어진다든지 양치 뒷물에 피가 섞여 나오는 등의 염증성 변화는 더 흔한 증상이다. ‘임신성 치은염’이라고 하는데, 보통 임신 2개월째부터 시작되어 8개월째에 가장 심해지는 경향이 있다. 이런 현상은 임신 기간 중 그 양이 10배까지 치솟는 프로게스테론 호르몬이 일부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호르몬 변화는 염증을 일으키는 세균의 번식을 촉진하고, 이 세균들에 대한 임신부의 면역기능을 약화시킨다. 임신 전에 갖고 있던 잇몸의 가벼운 염증이 임신 중에 더 심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한 임신부 가운데 2~10%는 윗니 잇몸 근처에 ‘임신성 육아종’이라 불리는 덩어리가 생기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주로 임신 2기에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입에서 피가 나오거나 살덩어리가 증식하게 되면, 임신부들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다. 그러나 큰병이 아니니 안심해도 된다.
출산 후 임신성 치은염과 임신성 육아종은 저절로 줄어들거나 없어진다. 또한 칫솔질을 더 철저하게 하고 항균성 구강양치제와 치실 등의 보조도구를 사용하면 임신 중의 충치나 치은염은 대부분 예방과 관리가 가능하다.
여자에게 임신은 분명 여러 의미에서 위험하다. 그러나 최소한 치과적으로, 그것은 관리 가능한 위험이다. 엄마의 이가 하나쯤 빠져나간다 한들 온전한 한 생명을 얻는데 그게 무슨 대수이겠는가. 그러나 예비엄마들이여! 자궁이 아니라 잇몸이 피를 흘리는 불상사만은 막도록 하자.
장현주/일산좋은치과 원장·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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