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12.16 19:23
수정 : 2009.12.16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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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은 ‘들키지 않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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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고나무 기자의 키높이 구두 도전기…취업·면접 시즌엔 판매도 껑충
‘루저’와 ‘위너’를 가르는 기준선이라는 180㎝의 눈으로 본 세상은 어떨까. 벅차고 아름다울까? 지난 10일 한 인터넷 쇼핑몰에서 1㎝, 2㎝, 3㎝ 높이별로 각각 세 종류의 키높이 깔창을 구입했다. 우레탄 재질로 만들어져 발뒤축에만 덧대는 깔창 스타일과 발바닥 전체를 받치는 스타일 등을 섞어 샀다. 당장 토요일 시험했다. 우레탄 재질의 3㎝ 깔창을 목이 올라오는 운동화에 깔았다. 조인 끈을 조금만 느슨하게 풀면 됐다. 발목이 드러나는 단화에 비해 티가 덜 날 것 같았다. 친구들과 약속 장소로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탔다. 높이가 낮아서인지 생각만큼 불편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운동화가 발목을 감싸 삘 위험이 적었다.
180cm 됐는데 왜 아무도 안 쳐다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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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은 ‘들키지 않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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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깔창만으로는 지하철과 버스에서 손잡이를 잡을 때 별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적어도 지하철과 시내버스는 작은 사람에게 더 친화적이다. 시내버스 손잡이 높이는 버스회사 마음대로 정하지 못한다. 자동차관리법에 시내버스 손잡이 높이 최고·최저치가 정해져 있다. 저상 시내버스를 생산하는 대우버스는 시내버스 제품의 경우 손잡이 높이는 ‘보통 사람이 약간 손을 올린 높이’인 1.8m라고 설명했다. 대우버스는 “손잡이가 너무 낮으면 승객 머리에 부딪힐 수 있다. 그렇다고 평균 신장이 높아진다고 손잡이 높이를 계속 높일 수도 없다”고 설명했다. 시내버스에서 지하철을 갈아탔다. 2호선 합정역. 지하철 손잡이는 버스보다 작은 사람에게 더 친화적이다. 지하철 전동차 손잡이 역시 제조업체가 마음대로 만들지 않는다. 국토해양부에서 표준규격을 정해놨다. 손잡이는 대대로 1.7m였는데 지난해부터 ‘여성을 배려하기 위해’ 1.6m 높이 손잡이를 섞어 만든다.
3㎝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았다. 다만, 지하철을 놓칠세라 계단을 뛸 때 불편했다. 뒤뚱거렸고 왼발과 오른발에 번갈아 체중을 옮기기 쉽지 않았다. 혹시 발목을 삘까 봐 엉덩이를 조금 빼 오리처럼 뒤뚱거려야 했다. 다음날 조금 무리를 해서 2㎝와 3㎝ 깔창을 덧댔다. 5㎝ 차이는 작지 않았다. 집에서 가까운 지하철역까지 산책을 하기로 했다. 5㎝ 깔창은 발목에 더 신경이 쓰였다. 체중의 중심이 더 높아졌고 높아진 중심을 이동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180㎝가 됐다고 젊은 여성들이 나를 평소보다 더 쳐다보는 것 같지도 않았다.
왜 남성이든 여성이든 불편한 굽을 감수하는가. 독일의 문화사가 에두아르트 푹스는 여성의 하이힐이 부르주아 남성이 성적 지배권을 갖던 18~19세기에 태어났다고 분석했다. 체중이 발끝과 허벅지에 실려 엉덩이와 허벅지가 굵어지고 성욕이 강화되는 효과를 낳는다고 그는 분석했다. 하이힐은 진창을 피하기 위해 서민들이 신던 신발에서 성매매 여성의 상징이 됐다. 푹스나 70년대의 여성해방론자들에게는 여성 신발의 높은 굽은 없어져야 할 악이었다. 그러나 굽은 시대마다 다른 의미가 있다. 이들 원칙론자는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영국의 디자이너 비비언 웨스트우드는 기형적인 통굽과 펑크룩으로 ‘반항 패션’을 선보이기도 했다.
남자의 키높이 구두는 체형에 대한 영향이나 미적 측면보다 오로지 ‘키’와 관련되는 것 같다. 평소에는 키높이 구두를 신지 않던 남성들도 선, 결혼식, 취업 면접 때 키높이 구두·깔창을 이용한다. “키가 작지 않은 남성도 선을 보거나 취업 면접 땐 더 좋은 인상을 주려고 키높이 신발을 찾는다. 키높이 구두 매출은 월 7000~8000켤레 수준으로 꾸준하다. 본격적인 결혼철인 10월부터는 평소보다 5~10%가량 매출이 오른다.” 금강제화의 설명이다. 사이즈도 240㎜부터 275㎜까지 일반 구두 제품처럼 다양하다. 인터넷 쇼핑몰 지마켓도 최근 3개월 키높이 관련 제품 판매가 증가했다고 밝혔다. 키높이 구두, 깔창, 키높이 캐주얼화 등 남성 키높이 제품 판매 건수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10% 증가했다. 특히 키높이 깔창은 지난 석 달 동안 1주일 평균 판매 건수가 5600여건에 이를 정도다. 마에스트로·티앤지티 등 남성 구두 브랜드 대부분에 키높이 구두 제품이 있다. 닥스처럼 라이선스로 생산된 제품을 받아 공급하기도 한다. 키높이 운동화로 보기는 어렵지만, 빅뱅 등 아이돌 그룹들이 신어 유행이 된 하이탑슈즈도 키높이 대용으로 소비된다. 하이탑은 농구화처럼 발목 위로 올라오는 신발을 가리키지만 목 짧은 스니커즈 등 단화에 비해 밑창이 높아 키가 약간 커 보이는 효과를 낳는다. 아디다스 러닝화 제품인 ‘앰비션 피비’처럼 쿠션을 포함한 굽 높이가 4㎝ 정도인 운동화도 키높이 효과를 보려는 남자들의 손길을 끈다.
업체들이 고려하는 디자인의 핵심은 ‘들키지 않는 것’이다. 금강제화는 키높이 구두도 젊은 감각을 살린 트렌디한 스타일을 중시한다. 이 회사 키높이 구두는 바깥쪽에 35㎜ 굽이 있고 신발 안에 25㎜ 굽이 숨겨져 있어 겉으로는 일반 구두와 비슷하다. 심지어 양말 속에 착용해 신발을 벗어도 들키지 않는 키높이 패드 제품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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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쇼핑몰에서 구입한 3cm 높이의 우레탄(1,2) 깔창과 젤(3)형 깔창. 바로병원은 키높이 제품을 이용한 뒤엔 반드시 스트레칭과 마사지를 할 것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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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탑 농구화도 4cm 키워
여자의 외모를 가혹하고 짓궂게 놀리던 남자의 시선은 이제 남성 자신에게 되돌아왔다. “180㎝가 안 되면 루저”라는 말에 분노한 것은 장애인단체만이 아니었다. 더 가혹한 언어로 여성의 외모를 놀리던 남성들은 진짜 루저라도 된 것처럼 자신에게 내려진 외모의 잣대에 분노했다. 같은 굽이지만, 진흙탕을 건너기 위해 16세기 유럽의 서민들이 신던 나막신, 17세기 스페인의 귀족계급 남성이 신던 비단스타킹과 굽 높은 신발, 프랑스혁명 때 남성들이 신던 부츠는 모두 다른 욕망과 시대상을 드러낸다. 21세기의 한국 남자들은 키높이 구두를 신는다.
※ <즐거운 지식여행5-패션>(게르트루트 레네르트 지음·박수진 옮김/예경 펴냄) 참고
글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사진 박미향 기자 · 촬영 협찬 금강제화 · 락포트 · 아디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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