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12.23 19:16
수정 : 2009.12.27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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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빈 차오가 디자인한 슈에무라 립스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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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디자인 장르간 경계 허물기의 선봉 선 건축가들…
기술적 재능보다 강한 협업 정신 강점
전자 제품 디자인, 포장지 디자인, 그래픽 디자인, 자동차 디자인, 건물 디자인(건축)에 이르기까지 디자인처럼 갈래(장르)가 세분화된 분야도 없다. 사회의 변화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디자인은 진화를 거듭할수록 잘게 쪼개지고 조각나 각각의 성을 높이 쌓아왔다. 최근엔 경계를 넘나드는 디자이너들의 ‘크로스오버’ 작업이 시선을 끈다. 아티스트와 산업 디자이너가 손을 잡는 이른바 협업(컬래버레이션)은 하나의 상식이 된 지 오래, 자신의 전문 분야가 아닌 다른 장르에서 활약하는 디자이너들의 낯선 도발이 눈부시다. 그중에서 국내외의 건축가들이 디자인한 냉장고, 목걸이, 의자, 고속철 등은 장르 간 새로운 교배 방식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고층 건물을 연상시키는 립스틱 뚜껑
일본의 히로시마 항구, 스위스 아로사 카지노 등을 설계했고 2012년에 인천 영종도에 완공될 ‘밀라노 디자인시티’를 설계중인 건축가 알레산드로 멘디니는 최근 엘지전자의 2010년형 김치냉장고를 디자인했다. 건물 외관을 만들듯 냉장고 표면에 ‘초자 인쇄’ 기법을 활용해 번쩍이는 김치냉장고를 디자인했다. 이탈리아, 스웨덴을 비롯한 유럽의 경우엔 건축가들이 제품을 디자인하는 예가 일반화돼 있다. 건축가가 디자인한 가구 등의 제품들을 파는 상점도 일상적이다. 크로스오버라는 말 자체가 무색할 만큼 장르 간 교배가 활발하다. 최근 건축가들의 영역을 넘나드는 디자인 프로젝트가 더욱 각광받는 이유는 뭘까.
⊙ 다품종 소량생산, “내 것은 조금 더 특별히”
우선 근래 다품종 소량생산이 소비자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게 됐다는 점이 하나의 이유다. 과거 소품종 대량생산으로 효율적인 디자인 전략을 고집했다면 최근 패션 브랜드들은 ‘한정판’(리미티드) 라인을 내놓는다. 소수를 위한 제품이더라도 기존 디자인의 틀을 벗어나 새로운 실험으로서의 부가가치를 얻겠다는 전략이다. 건축물에 반영됐던 건축가들의 가치관은 소품 디자인을 통해 변용되고 새 형태를 얻는다. 사회 다양한 영역과 관계 맺는 유기적인 건축 설계로 유명한 자하 하디드가 디자인한 라코스테 슈퍼리미티드 제품은 전세계 1000여개만 한정 생산됐다. 지난여름 국내에 출시된 자하 하디드의 이 신발은 그가 설계했던 건물들의 환상적인 외관을 닮았다. 물결치듯 이음매 없이 쭉 뻗어 있는 신발을 두고 자하 하디드는 “움직일 때 일어나는 신축과 팽창을 고려해 신을 때 형태가 발 모양에 맞게 서서히 변화하는 디자인을 고려했다. 역동적인 대상들의 연결망”이라고 말했다. ‘우아함의 대가’를 자처하는 건축가의 철학이 보라색과 검은색의 신발 디자인에 뚝뚝 묻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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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 하디드가 디자인한 라코스테 신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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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자인의 이름값 “‘그’가 디자인했다”
현존하는 유명 스타 건축가가 디자인했다는 점에서 업체는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는 홍보효과에 일단 주목한다. 나아가 건축가의 제품 디자인은 단발적인 반짝 효과를 넘어 작업의 질에서도 호평을 받는다. 근래 건축가들이 건축과 디자인 영역을 아우르는 트렌드 세터로서 전 방위적 활동을 펼치면서 자기 스타일에 맞는 제품을 찾아간다는 점도 건축가들이 제품 디자인을 선보이는 큰 이유다. 미국의 트라이베카 그랜드 호텔, 싱가포르의 복합공간 선텍 시티몰 등 화려한 건물들을 설계해온 캘빈 차오는 최근 화장품 브랜드 슈에무라의 립스틱 패키지를 디자인했다. 고층 건물의 투명한 유리관을 연상시키는 립스틱 패키지는 제품 내부가 비친다. 슈에무라는 ‘럭셔리 크리스털’이라는 설명을 붙였지만 소비자들이 자신에게 맞는 립스틱 색상을 선택하는 데 실용적이고 편리하다는 게 이 디자인의 큰 장점이다. 대중화된 정도는 차이가 있지만 캐나다 건축가 프랭크 게리가 디자인한 곡선적인 흐름의 목걸이,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클래식한 느낌의 시계 등은 모두 자신의 장점을 잘 반영한 디자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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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이종호 교수가 디자인한 차세대 고속철 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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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간과 사회를 소통시키는 공공디자인
소품이나 상품 디자인이 아니라 공공 시설물을 디자인하는 건축가의 작업은 특히 그 의미가 크다.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건축과 이종호 교수는 지난 2월 같은 학교 디자인과의 김성룡 교수와 함께 차세대 고속철(정식명 HEMU-400X 차량 디자인) 디자인을 세상에 내놓았다. 일본에서 그래픽 디자이너가 신칸센 열차를 디자인한 예는 있지만 건축가가 고속철을 디자인한 예는 세계에서도 보기 힘들다. 건물을 짓는 건축가가 설계한, 이동하는 미래의 고속철은 어떻게 다를까. 통상 산업 디자이너가 제품 트렌드를 분석하는 데에서 디자인을 시작한다면 건축가인 그는 공공재로서의 철도 디자인, 철도가 정차하는 역 등이 사회와 어떻게 관계 맺을 것인가를 먼저 고민했다. 그는 “건축물을 짓듯이 조사를 많이 했다. 테제베를 넘어선 독자적인 프로세스를 도입하는 데 중점을 뒀다. 일본, 프랑스, 독일의 철도를 컴퓨터로 수없이 교배해 새로운 종을 탄생시키는 ‘유전적 알고리즘에 의한 디자인’이라는 방식을 적용했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차세대 고속철을 디자인하는 과정은 공공영역 디자인을 보여주는 리트머스 시험지 같았다”고 말했다. 차세대 고속철의 경쟁자는 비행기라고 본 디자이너의 판단 때문에 의자 디자인은 비행기 비즈니스석의 편안함을 능가한다. 모바일 디자인 전문가인 김성룡 교수와 함께 승객들의 편안함을 고려해 스낵바 등을 꾸렸고 즐거운 문화가 개입될 수 있는 칸막이 방도 넣었다. 내년 3월 초까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는 <메가시티 네트워크: 한국현대건축 서울> 전시에서 고속철 디자인의 모형을 볼 수 있다. 완성된 고속철은 지속적인 업데이트 과정을 거쳐 2015년께 상용화된다.
알바르 알토, 장 프루베의 가구들 지금도 큰 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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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산드로 멘디니가 디자인한 엘지전자 디오스 냉장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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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가 가구나 제품 등을 디자인하는 이유는 그들이 감각적이고 유행에 맞는 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기술 때문만은 아니다. “건축가는 협업에 능하고 한 목표를 향해 나가는 과정에 훈련이 잘돼 있다”는 이 교수의 말처럼 공간적 훈련이 탁월하고 사람들과의 커뮤니케이션에 기반을 둔다는 점에서 건축가들은 오랫동안 타 장르 디자인에 개입해 왔다. 미스 반데어로에, 마르셀 브로이어 등 가구 디자이너를 겸한 건축가들이 20세기 초반 바우하우스를 지휘했고 핀란드의 알바르 알토가 세운 가구회사 아르테크, 장 프루베의 가구 등은 지금까지 세계적인 인기를 끈다. 이에 비해 국내 건축가들의 다른 장르 디자인 작업을 보기란 아직 쉽지 않다. 국내 건축가들이 디자인한 가구나 생활소품 디자인을 접할 수 있었던 예는 2006년 쇳대박물관에서 열렸던 ‘건축가의 가구’전 정도가 이례적이었다. 이 전시에서 건축가 승효상은 철로 가로등과 긴 의자를 만들었고, 건축가 황두진은 탱크 원리를 적용해 흔들의자를 새롭게 해석한 의자를 디자인했다. 건물보다 규모는 작았지만 의미는 작지 않았다.
글 현시원 객원기자
sonvadak25@hanmail.net·사진제공 엘지전자, 라코스테, 슈에무라, 이종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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