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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12.23 19:48 수정 : 2009.12.23 19:53

정암사 적멸보궁 옆엔 신라 고승 자장율사가 꽂은 지팡이가 자랐다는 향나무가 있다.

[매거진 esc]
쇠락한 탄광마을에서 사시사철 꽃 축제로
여행자 발길 모으는 정선 만항재·만항마을

만항재는 강원 정선군 고한과 영월군 상동을 잇는 고개다. 해발 1330m, 국내에서 가장 고도가 높은 포장도로 고갯길(414번 지방도)이다. 국내에서 자동차로 정상까지 갈 수 있는 가장 높은 산인 함백산(1573m) 남서쪽 자락이다. 만항재 주변은 사철 꽃밭이다. 봄부터 가을까지 눈부신 야생화밭이, 겨울이면 눈 시린 눈꽃밭이 펼쳐진다.

눈이 오지 않아도 만항재는 꽃밭이 된다. 일교차 벌어진 겨울 아침이면 고개 정상의 숲 전체가 화사한 서리꽃(상고대)으로 덮인다. 동해안 쪽에서 넘어오는 안개 때문이다. “저녁에 안개 살짝 꼈다 하문 영락없대요. 담날 아침 나무마다 그냥 상고대가 얼어붙는 기래요.”(만항재 도로관리사업소 김종수씨)

여름엔 야생화, 겨울엔 눈꽃 절경

서리꽃 날리는 만항재 낙엽송숲.

서해안에 폭설이 내린 지난 주말 강원 산간은 맑게 개었지만, 이른 아침 만항재 정상엔 화려한 서리꽃이 만발했다. 맨몸으로 선 떡갈나무·낙엽송들이 가지마다 섬세한 무늬의 서리꽃을 피웠다. 몰아치는 칼바람에 흩뿌려지는 순백의 결정체들이 봄날 꽃잎 날리는 벚꽃길을 떠올리게 한다. 낙엽송숲 빈 나무의자도, 산자락 무덤들도 조용히 새하얀 꽃잎 세례를 받는다.

서리꽃·눈꽃은 한번 얼어붙으면 매서운 고갯바람에 녹을 줄 모르고 한낮까지 흰 화원을 펼쳐 보이는 때가 많다. 만항재 정상에서 간이매점(야생화쉼터)을 하고 있는 심경숙(50·고한읍 상갈래마을)씨가 말했다. “여기 있다 보믄요. 서리꽃·눈꽃이 을마나 화려한지 아주 말도 못해요. 한번 보고는 잊을 수 없다고 또 찾아오는 분들이 많아요.”

심씨는 만항재 정상에서 16년째 매점을 열고 있는 정선 토박이다. 이웃 이옥선(58)씨와 봄여름엔 함께 운영하고 겨울(12~2월)엔 한 해씩 번갈아가며 혼자 매점을 지킨다.


만항마을 주민이 산죽(조릿대) 새순을 따 덖어 만든 산죽차.

만항재의 우리말 이름은 늦은목이재(늦목재)다. 옛날 고한 주민들은 이 고개를 통해 황지 거쳐 춘양까지 나가 소금을 사왔다. 소금 한 가마니를 지고 고한으로 돌아오면 소금이 녹아 반 가마니밖에 안 남았다고 한다.

고개 바로 밑에 만항마을(고한1리)이 있다. 만항(늦은목이)은 탄광이 들어서기 전까지 화전민 몇 집만 살던 곳이었다. 일제강점기 탄광이 처음 개발된 이래 육이오 뒤엔 ‘쫄닥구데이’라 불리는 소규모 민간 개발업자들이 몰려들며 인구가 늘었다. 1962년 이들이 대단위 탄좌로 통합되고 동원탄좌·삼척탄좌가 채탄을 시작하면서 길을 넓히고 본격적인 탄광마을을 이룬 곳이다.

“그 많던 나무 다 비제끼고 산 파제끼고, 마을을 훌 뒤집어 놓았대니까요.” 고한1리 토박이 주민 방순애(73)씨는 탄광 개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까지는 “나무가 하늘도 안 뵈킬 정도”로 우거져 있었다고 말했다. 아침에 나무 석단 해 지고, 대낮에도 컴컴한 만항재 숲길을 넘어 상동의 여인숙에 팔고, 보리 몇 되 사서 이고 돌아오면 해가 저물었다고 한다.

광복 전후까지 만항마을은 방씨 일가 세 집만 사는 두메마을이었다. 방순애씨는 “우리 외조부가 처음 여기 들어와 살다 방씨 친척들을 불러 함께 ‘판을 치며’ 살았다”고 말했다. 방씨는 어렸을 때 학교가 없어 아랫마을의 절 정암사 객사에 가서 초등학교 과정을 공부했다.(만항마을 일대 땅은 대부분 정암사 소유의 사찰지다) 감자 한 보자기, 좁쌀 한 되라도 갖다 주면 스님이 그렇게 좋아할 수 없었다고 한다.

탄광마을이 되면서 마을은 갑자기 ‘번잡한 도시’로 바뀌었다. 사북국민학교 만항분교는 만항국민학교가 됐고, 60~70년대엔 학생 수가 1000명에 이를 정도로 마을이 급팽창했다. 광업소 사택 빼고도 사는 주민만 600가구에 이르렀다. 술집만 열댓 군데가 생겼고 다방·당구장·중국집까지 광원들로 북적였다. 고한리는 23개 리로 나뉘고, 고한1리에만 13개 반이 생겼다. “들어오는 사람은 줄을 서는데 세내줄 방이 없어 안타까웠을 정도”였다. 고한읍에서 만항마을까지 5분에 한 대씩 버스가 다녔는데 늘 빈자리 없이 채워질 정도였다고 한다.

만항재 정상 낙엽송숲에 서리꽃(상고대)이 만발했다.

탄광산업이 사양길을 걸으면서 마을 규모는 다시 급격히 줄어들었다. 최영석(39) 고한1리 이장이 말했다. “요새는 하루 세 번 마을버스가 다니는데 늘 텅 비지요.” 광원들이 떠난 뒤 집들은 흉물로 남았고 학교는 폐교됐다. 지금은 50가구 100여명, 원주민과 일부 눌러앉은 광원들이 마을을 지킨다.

만항마을이 다시 활기를 찾은 것은 고한읍에 카지노에 이어 스키장이 들어서면서다. 최근 만항마을은 해마다 여름이면 야생화 축제를 열며 관광객들을 끌어모으고 있다. 도로변 담벽마다 야생화를 그려넣고 대형 야생화 사진들을 내걸어 꽃단장을 했다. 이른 봄 눈 속에선 노란 복수초가 피어나고 봄엔 얼레지, 여름엔 노루오줌·둥근이질풀 꽃들이 지천으로 깔리는 마을이다.

“요즘엔 사철 가리지 않고 여행객들이 찾아옵니다. 한겨울엔 만항재나 함백산의 눈꽃·서리꽃을 즐기려는 분들이 오죠.”(고한읍번영회 최동순 회장)

여행객들 발길이 잦아지면서 마을에선 야생화와 산나물 등 청정 먹을거리를 이용한 체험행사도 시작했다. 원룸 숙박시설을 갖추고 곤드레밥·산죽(조릿대)밥 짓기 체험행사를 마련한 유미자씨가 말했다. “여 산나물은요, 마디게 커서 향도 아주 진한 거래요. 산죽도 7월이 넘어야 새순이 나오니까요.” 산죽을 세번 덖어 산죽차를 만들고, 산죽 우려낸 물로 밥도 짓는다. 압화·천연비누 만들기도 진행한다. 토종닭·오리백숙 등을 내는 식당 4곳도 꾸준히 여행객들을 맞고 있다. 대체로 비슷한 식단이지만 각각 황기백숙·옻닭·장뇌삼백숙·곤드레나물밥 등을 주 종목으로 내걸고 사이좋게 영업을 한다.

만항마을 주민들은 집과 담벽을 야생화 그림으로 단장했다.

물한리에는 스키장 들어서

마을의 서쪽 골짜기인 제당골 들머리엔 오래전부터 산신에게 제사를 올리던 서낭당이 있었다. 낡았지만 옛 정취를 간직했던 이 작은 당집이 이달 초 헐려나갔다. 관리해오던 주민이 “너무 낡고 빗물이 새서 번듯하게 새로 지으려고” 헐어냈다고 한다. 이 마을 출신의 한 절 주지 스님이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찾아와, 무너져가는 당집을 보곤 새로 지으라며 공사비를 지원하고 가면서다. 선의에서 나온 마을 지원이었겠으나, 이 마을에 남은 옛 정취 하나를 자취 감추게 한 결과가 돼버렸다.

고한(古汗)이란 이름은 구한말 고토일(古土日)과 물한리(勿汗里)를 통합하며 한 글자씩 따와 붙인 것이다. 두 마을은 고한에서도 가장 오래된 마을이다. 고토일은 현재 고한14리에 속해 있고, 물한리는 하이원 스키장이 들어서면서 사라졌다.

만항마을 여행쪽지

겨울엔 차량 체인 잊지 마세요

◎ 수도권에서 영동고속도로 타고 원주 만종분기점에서 중앙고속도로로 갈아타고 제천나들목에서 나가 38번 국도를 따라 직진한다. 하이원리조트 지나 두문동재 못미처 상갈래삼거리에서 우회전, 414번 지방도 따라 정암사 거쳐 만항재로 간다.

◎ 한겨울 만항재 일대 손수운전 여행길엔 차량 체인을 꼭 준비해야 한다. 찻길이 정상까지 나 있는 함백산에 오르면 금대봉·태백산·백운산 등 고봉들이 한눈에 들어오지만, 경사가 심해 한겨울 차량운행은 피하는 게 좋다. 만항재도 눈이 내린 뒤엔 통행을 막는 일이 잦다. 신라 자장율사가 창건했다고 전하는 정암사는 5대 적멸보궁(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곳) 사찰 중 하나다. 뒷산에 모전석탑인 수마노탑(보물 410호)이 있다.

◎ 만항마을 체험 민박집 함백산들꽃이야기 (033)591-2168. 고한읍번영회 (033)592-5455. 식당은 4곳 있다. 밥상머리(곤드레나물밥·상황오리백숙) (033)591-2030, 만항식당(장뇌삼백숙) (033)591-5196, 만항할매닭집(황기백숙·옻닭) (033)591-3136, 산골닭집(황기백숙·옻닭) (033)591-5007.

고한(정선)=글·사진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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