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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다 잘난 그녀, 놓아줄까요. 일러스트레이션 최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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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한동원의 오케이 상담실
데이터 야구는 김성근 감독 일, 감독 눈치 보다 알아서 마운드 내려오는 투수 될래?
Q 전 스물여섯살, 키 180, 평균보다 좀 낮은 외모에 좀 마른 몸매입니다. 지금까지 변변찮은 연애 한번 못 해 보다 올해 저보다 두살 많은 여성과 연애중입니다. 문제는 원래 남 신경을 그리 쓰지 않던 제가 연애를 하면서 점점 걱정이 많아진다는 겁니다. 제 직장은 누가 봐도 괜찮은 직장인 것도 아니고, 월급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녀 나이 스물여덟, 결혼이라든지 미래에 대한 생각이 가득할 텐데 저 같은 놈을 만나도 될는지요. 아직 변변하게 모은 재산도 없고, 그렇다고 집이 유복하여 도움을 바랄 처지도 안 됩니다. 대학도 제가 벌어 다녔고. 성인이 되고 나선 집에 크게 의지해본 적도 없습니다. 아무튼 제 욕심 때문에 그녀를 붙잡아선 안 된다는 생각이 자꾸 맴도네요. 그녀 정도면 솔직히 저보다 더 좋은 조건의 남자를 충분히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추신. 그녀는 결혼한 친구들을 많이 부러워하는 것 같아요. 경제력이나 조건 등을 얘기할 때도 많네요. 그리고 남들보다 못사는 건 안 좋아하더라구요.
A 필자가 평소 개봉영화 적정관람료 산정에 다망하다 보니 고민상담 업계에 몸담은 경험 매우 일천하다만, 뭐, 결국 ‘어떤 영화를 볼 것인가’나 ‘어떻게 연애할 것인가’나 따지고 보면 별반 차이가 없는 일이므로, 답변드리면 다음과 같다.
① 그걸 왜 니가 걱정하세요. ② 그만하면 너도 충분히 잘났어요. ③ 데이터 야구는 김성근 감독님께 맡기세요. 항목별로 세부 정리해 보자. 일단 ①번. 의뢰인의 진술로 미루어보건대, 의뢰인의 여자친구는 특별한 이변이 없는 한, 의뢰인이 오지랖 넓게도 대신 해주고 있는 걱정을 약 14배가량 세분화된 시나리오에 따라 약 357배가량의 빈도수로 시뮬레이션하고 있으리라 사료된다. 뭐, 그게 아니라도 최소한 의뢰인보다는 많이 한다. 왜냐. 본인 일이거든. 본인 걱정은 그 누구보다도 본인이 제일 확실하게 한다. 그리고 그 시뮬레이션 결과, 다시 말해, ‘의뢰인 같은 놈’하고 만나도 될지 안 될지를 겁나 생각한 결과, 그녀는 의뢰인을 만나고 있는 거다. 그게 아니었다면 의뢰인은 지금 이런 사연을 보내고 있었겠지. ‘여친하고 헤어졌는데 너무 괴로워요’ 등등.
다음 ②번. 의뢰인은 대학도 본인이 번 돈으로 나왔고, 성인 된 다음에는 집에 크게 의지한 적도 없다고 했는데, 이게 고민인지 자랑인지 필자 다소 헷갈린다만, 아무튼 이것이 사실이라면 결론은 이렇다. 너도 그만하면 꽤 잘난 놈이군요. 아시다시피 요즘 대학 등록금은 사회문제다. 대충 사회문제가 아니라 본격 사회문제다. 웬만한 알바나 적금 정도로는 쉽게 커버가 되지 않는 액수고, 그래서 뉴스에서도 ‘방학기간에도 알바전선에서 구슬땀을 흘리는’ 어쩌구 하면서 보도를 해대는 거 아니겠나. 둑 쌓고 강바닥 파고 할 돈으로 이런 거 커버해주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그런 거 안 해주는 이런 카인드오브 나라에서 자기 힘으로 대학을 나왔다는 건 대단한 거다. 필자 개인적으로는 이런 올림픽 중계방송스런 어휘를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만, 장하다, 고까지 말할 수도 있겠다. 근데 혹시 농협이라도 터셨는가? 아니, 정말로 궁금해서.
그리하여 ③번.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변하게 모은 재산’이 없는 관계로 26년 만에 처음 사귄 애인하고 자진해서 헤어지겠다면, 뭐, 말리지는 않겠다. ‘사랑하기에 그대 떠나리’ 한판 멋지게 해 보고 싶다면, 그래야지 어쩌겠어. 하지만 이를 결행하기 전에 한번 생각해보기 바란다. 스물여섯살에 ‘변변하게 모은 재산’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이 비(정지훈)군 등등을 빼고 과연 몇 명이나 있는지를. 아, 물론 부모님 재산 센터링 받은 경우는 제외고.
기왕 시작한 김에, 이것까지 생각해보기 바란다. 지금 의뢰인이 하고 있는 고민을 정상적인 방법을 통해서 당장에 해결할 수 있는가? 그리고 현재 의뢰인의 상황을 여자친구는 전혀 모르고 있는가? 둘 다 아니잖아. 그런데도 여자친구는 의뢰인 계속 만나고 있고. 그럼 여기에서 의뢰인이 할 수 있는 건 없다. 만일 그녀가 의뢰인의 데이터를 완전 분석해서 선수교체 시기를 결정하는 에스케이 김성근 감독님 야구 스타일 같은 타입이라면 특히나 그렇다. 투수 본인은 앞으로 공 300개도 던질 수 있을 것 같은데, 감독님께서 데이터에 기초해서 바꾸시겠다면, 어쩌겠어. 내려와야지.
하지만 감독님께서 가만히 계시는데도 ‘그래, 우리 감독님은 데이터에 철저하시니까, 지금쯤 나를 마운드에서 내릴 생각을 하고 계시겠지. 나를 바라보시는 저 미묘한 눈길은 바로 그 신호야. 그러느니 차라리 내가 자진해서 내려가자.’ 뭐, 이런 생각을 해갖고는, 투수가 갑자기 공 던지다 말고 제 발로 마운드에서 걸어 내려오면, 그거 얼마나 골때리겠어. 그리고 바로 이게 의뢰인이 구상하고 있는 야구다. 강판당할까봐 두려운 나머지 내가 먼저 내려와 버리는 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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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원의 오케이 상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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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도 연애는 야구가 아니다. 이기고 지는 것도 없고, 실패도 없다. 연애란 건 시작 그 자체로 성공인 거다. 게다가 연애는, 어쨌거나 좋은 거다. 그러니 부디 데이터 야구는 김성근 감독님께 맡기고, 의뢰인은 지금의 연애나 충분히 즐기시라.
오케이?
한동원 영화평론가
※ 바뀐 듯 안 바뀐 듯 뭔가 어색한 거 벌써 눈치채셨습니까? 관계면과 엔터테인먼트면을 채우던 필자와 대담자들이 송년특집호에서 슬쩍 자리를 바꿨습니다. 여기서 퀴즈. 본래의 칼럼과 맞는 필자의 짝을 찾아주세요. 맞히신 분들께 esc가 새해 복 갑절로 기원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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