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0.02.03 20:45
수정 : 2010.02.06 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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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은·홍미란 작가의 〈미남이시네요〉(위), 노희경 작가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 송지나 작가의 〈모래시계〉(왼쪽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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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배우 상상력 자극하는 김은숙·이미지 전달 강한 홍자매
독립된 작품 아닌 드라마의 구성요소로 봐주길
김수현 작가의 대본은 작가 자신만큼이나 유명하다. 익히 알려진 날카로운 대사나 흡입력 있는 이야기 전개도 뛰어나지만 소품의 무늬까지 명시할 만큼 꼼꼼한 지문은 김수현 대본만의 특징으로 꼽힌다. 2007년 방송된 김수현의 드라마 <내 남자의 여자>에서 5회 초반 주인공 화영(김희애)이 친구인 지수(배종옥)에게 지수의 남편을 사랑한다는 얘기를 하고, 이에 충격받은 지수를 표현한 대목에 이런 지문이 나온다. ‘지수- .....(휑하니 보며 점점점 호흡이 깊고 짧게 빨라지면서/ 의사한테 가서 시범을 보여달라 그러세요)......’ 다음, 과호흡증후군 증상을 보이는 지수를 보고 놀라 호흡을 진정시키려는 화영의 대사는 이렇다. ‘화영-.....(잠시 더 보다가 후다닥 주방으로 가며) 숨 멈춰. 숨 쉬지 마. 숨 쉬지 말고 가만있어 봐 지수야..(지수 상관없고/ 설합 둬개 열어보고 한 설합에서 비닐봉지 꺼내 들어/ 딱 한장인 것보다는 급하니까 서너장 한꺼번에 들고 오면서 한두 장 떨어뜨리는 게 좋습니다/ 지수 옆으로 가 입에 대어주려)’ 김 작가의 말투나 특징이 지문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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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현 작가가 쓴 〈내 남자의 여자〉와 〈사랑이 뭐길래〉, 김은숙 작가의 〈온에어〉(왼쪽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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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막극 대본은 그 자체로 한편의 단편소설
대사의 지문은 드라마 시청자에게는 보이지 않는 괄호의 영역이다. 연기자가 눈물을 흘리는 게 대본에 따른 것인지, 연기자의 선택인지 확인하는 방법은 대본을 확인하는 것뿐이다. 또 대사나 이야기 전개가 아닌 드라마의 영상이나 연기자의 움직임 속에 작가가 숨겨놓은 장치를 발견하는 것도 지문에서 읽어낼 수 있는 또 하나의 재미다. 시청자에게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작가는 지문 속에 맘껏 인물에 대한 생각을 쓰기도 하고, 자기만의 화법으로 연출자와 연기자에게 극의 흐름을 인지시키기도 한다. 그래서 지문에 대한 생각과 지문을 쓰는 방법도 작가들마다 다르다.
드라마 <온에어>, <시티홀> 등을 쓴 김은숙 작가의 대본 지문에는 ‘(!!!)’이나 ‘(!!)’ 같은 느낌표가 많다. “연기자의 생각이나 상상력을 지문에 가둬두지 않으려고 감정지문을 주는 편이에요. 느낌표는 연기자에게 ‘당신이 느낀 감정을 맘껏 표현해 봐’와 비슷한 의미예요. 느낌표의 개수에 따라 그 정도가 달라요. 제 대본을 받은 연기자들은 처음에 당황했다고들 하더라구요. 저는 지문에 ‘눈물을 흘린다’라고 쓰지 않아도 만약 그 순간 배우가 눈물을 흘린다면 그게 솔직한 감정이라고 생각해요.” 드라마 <환상의 커플>, <미남이시네요> 등을 쓴 홍정은·홍미란 작가는 지문을 쓸 때 편하게 쓰려고 한다. “디테일을 전달하기보다 이미지적인 설명을 주려고 노력해요. 예를 들어 <미남이시네요>에서 리더 황태경(장근석)의 지문에 ‘(리더의 카리스마를 보이며)’ 이렇게 쓰는 식이에요. 어떤 말투나 눈빛을 설명하기보다 ‘리더의 카리스마’라는 이미지를 주는 거죠.” 홍미란 작가의 설명이다. 드라마를 보다가 ‘저게 대본에 있는 걸까? 아니면 연기자의 즉흥연기(애드리브)일까?’ 궁금해지는 순간이 있다. 한 드라마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즉흥연기처럼 보이는 장면을 일부러 자주 넣어요. 자세하고 구체적인 지문으로 그런 상황을 주는데, 이렇게 의도하지 않은 것 같은 장면이 드라마에 생기를 불어넣기도 하죠.”
그렇다면 좋은 대본이란 어떤 걸까. 어떤 연출가가 맡아도 작가가 상상한 영상이 나오는 대본, 또 작은 부분까지 상상력을 뻗치는 대본은 좋은 대본이라고 얘기된다. 물론 그 상상력은 작가가 책임져야 하는 부분이다. 한국방송작가협회 교육원에서 드라마 과정을 가르치는 박경희 작가는 “문학적이면서도 그림이 정밀하게 떠오르고 이야기 구조가 잘 만들어진 대본이 좋은 대본”이라고 설명한다. “대본은 영상화법을 구사하는 장르예요. 결국 그림을 그리는 작업인데 그림을 잘 떠오르게 하는 게 좋은 대본의 기본이죠. 드라마 작가 지망생에게는 필사를 많이 하라고 해요. 특히 김수현 작가의 글을 추천해요. 김 작가의 대본은 대사와 심리묘사가 소름 끼칠 만큼 좋아요. 독보적이죠. 김운경 작가는 사람을 잘 그리고, 최완규 작가는 사건을 터뜨리고 마침표를 찍는 정반합의 비트가 강해요. 박정란·김정수 작가는 따뜻하고, 노희경·이경희 작가는 솔직하게 인간의 심리를 얘기하죠.”
드라마 작가들이 좋아하는 대본과 작가는 단연 김수현 작가다. <사랑이 뭐길래> 등의 작품은 대본에 휴대전화를 사용하는 장면만 넣으면 지금 다시 제작해도 얼마든지 트렌드를 따라가는 작품이라고 평가된다. 김은숙 작가는 송지나 작가의 <모래시계>와 노희경 작가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을 꼽았다. 김 작가는 “작가가 하고자 하는 얘기가 선명하고, 대사가 좋은 드라마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박경희 작가는 단막극 대본을 읽어보라고 추천했다. 그가 추천한 대본은 2002년 문화방송 베스트극장으로 방영된 여은희 작가의 <악연>과 2008년 방영돼 좋은 평가를 얻은 <신의 저울>의 유현미 작가가 쓴 2001년작 <오후 3시의 사랑>, 김수현 작가가 1992년에 쓴 단막극 <어디로 가나>, 2007년 한국방송 <드라마시티>에서 방송된 유은하 작가의 <그녀의 별이 반짝일 때> 등이다. “단막극은 짧은 소설 한편처럼 읽을 수 있어요. 추천한 단막극 대본은 대본만으로도 충분히 읽을 만큼 재미있는 작품이에요. 단막극은 드라마의 기본이고 기초인데, 최근에는 단막극이 억울하고 분하게 됐죠.”
대본이 시청자에게 흘러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대본을 공개하는 경우는 방송사 누리집에서 볼 수 있지만, 공개되지 않는 경우는 스태프나 출연 배우의 손에서 손으로, 또 어둠의 경로 등으로 대본은 흘러간다. 드라마 대본을 쓰는 작가들은 시청자에게 대본이 쥐여지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작가들은 “공개되는 걸 원하지 않는다”고 입을 모았다. 홍미란 작가는 “대본은 촬영이라는 목적을 위해 쓰여진 것”이라며 “드라마는 결과물인 영상으로 봐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은숙 작가 역시 “영상 작업의 1차 텍스트인 대본이 공개되면 대본과 연출, 연기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가 나온다”며 “대본보다 연출이 낫다는 얘기는 상처가 되기도 하고, 거꾸로 대본이 더 좋다는 평은 연기나 연출이 별로였다는 뜻으로 들려서 좋지 않다”고 설명했다. 출간을 목적으로 수정된 장면 등을 모두 챙겨 정리된 대본이 아니라 드라마라는 거대한 작업 중 하나의 과정으로 촬영을 위해 쓰여진 대본이 완성품처럼 평가받는 건 부담스럽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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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희경 작가, 홍정은·홍미란 작가, 김수현 작가, 김은숙 작가(왼쪽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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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 쓰는 작가도 다른 대본이 궁금해
마지막으로 작가들에게 궁금한 질문을 던졌다. “드라마를 보다가 ‘이 드라마 대본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나요? 찾아보기도 하나요?” 대답은 다양했다. “같은 작가로서가 아니라 시청자의 입장으로 보고 싶은 대본은 물론 있죠. 그럴 때는 수소문해 보기도 해요.” “보고 싶은 대본이 있어서 시나리오 카페 등에 들어가 자료를 찾았다가 내가 쓴 대본을 발견했는데, 준회원이라 보지 못한 경우도 있어요.” “이미 방송된 드라마의 대본보다 앞으로 나올 드라마의 대본을 찾아보죠. 대본이 좋으면 ‘이 작품과 붙으면 안 되겠다’ 싶기도 해요.”(웃음)
글 안인용 기자
nico@hani.co.kr·사진제공 한국방송, 문화방송, 에스비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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