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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쩌리’라서 행복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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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겉절이 같은 TV 예능프로의 ‘병풍’들이 예측불허 웃음폭탄으로
기사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김치와 겉절이에 대해 알아보자.(요리 기사는 절대 아니다) 배추와 고추 양념, 이런 재료로 만드는 김치와 겉절이는 크게 두 가지 면에서 다르다. 첫째, 김치는 배추를 소금에 오랫동안 절이고 겉절이는 살짝 절인다. 둘째, 김치는 양념을 넣어 저온 상태에서 오래 숙성시켜 먹지만 겉절이는 양념을 버무려서 바로 먹는다. 만드는 과정이 다르니 맛도 다르다. 김치에서는 숙성시킨 시간만큼 깊은 맛이 나지만, 겉절이에서는 막 버무린 짧은 시간만큼 가볍고 바삭한 맛이 난다. 사실 김치와 겉절이의 가장 큰 차이는 만드는 이의 태도다. 김치를 담글 때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날을 잡아 시작하지만, 겉절이는 보통 김치를 담그다가 남는 배추로 만들기 일쑤다. 겉절이를 만드는 때는 겨울 내내 김치를 먹다가 질릴 때다. 김치는 전세계에 내놓는 ‘국가대표’ 음식이지만, 그 누구도 겉절이에 국가를 대표하라 하지 않는다. 김치의 허전한 옆자리를 조용히 채우는 게, 겉절이의 운명이라면 운명이랄까. 겉절이가 달라졌다. 맛이 달라졌냐고? 아니다. 가벼운 맛은 그대로다. 만드는 이의 태도가 달라졌냐고? 아니다. 달라진 것은 겉절이 자신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다. 겉절이가 ‘김치가 되고 싶다’는 불가능한 꿈 대신 스스로를 겉절이라 인정하고 그렇게 부르기 시작하면서 겉절이의 운명이 조금은 달라졌다. 호칭의 힘이라면 이미 잘 알고 있다. 홍길동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만 있었어도 많은 이들이 목숨을 이어갈 수 있었을 것이고, 김춘수 시인도 이름을 불러줘야 모두 ‘무엇’이 될 수 있다 하지 않았던가. 겉절이가 스스로를 겉절이라 부르고, 우리가 겉절이를 겉절이라 부르면서 겉절이는 우리에게로 와서 ‘가짜 김치’가 아닌 ‘진짜 겉절이’가 되었다. 정준하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던 순간 겉절이의 커밍아웃 사건은 지난해 10월 문화방송 <무한도전> 방송 중 일어났다. 추석 특집 오프닝에서 박명수가 ‘겉절이’들과 <무한도전 마이너리그>를 만들어 보겠다고 큰소리쳤고, 그러던 중 정준하를 ‘쩌리짱’이라 부른 것. <무한도전> 제작진은 자막으로 친절하게 설명도 달아주었다. ‘겉절이: 프로그램에서 활약하지 못하고 주변을 맴도는 멤버.’ 박명수가 정준하에게 ‘겉절이(쩌리) 중 으뜸(짱)’이라는 뜻의 ‘쩌리짱’이라는 별명을 붙여주는 그 순간, 정준하의 얼굴에 웃음꽃이 폈다. 늘 방송 분량을 확보하지 못하고 편집의 고비에서 쓴잔을 마시곤 했던 ‘존재감 제로’의 정준하가 캐릭터를 잡아내는 순간이었다. 자신을 존재감 없이 주변을 맴도는 쩌리 중 제일이라고 인정하자 거꾸로 존재감이 생겨난 아이러니한 순간이었다고 할까. 쩌리짱 정준하를 선두로 예능프로그램에서 비슷한 처지의 주변인들, 이른바 쩌리들이 뜬다. 이들이 주목받는 방식은 스스로의 존재 없음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한국방송 <청춘불패>에 출연하는 ‘티아라’ 효민은 자신을 ‘써병’이라고 부른다. ‘써병’은 ‘써니 친구 병풍’의 준말이다. 방송 초기 계속된 편집으로 얼굴이 나오는 컷이 별로 없어 ‘통편집녀’로 불리거나 다른 출연자의 배경 정도에 그치는 ‘병풍’이라고 불리다가 그다음 스스로 카메라에 잘 잡히는 ‘소녀시대’ 써니 옆에서 방송 분량을 확보하겠다는 결의를 다지면서 붙은 별명이다. 효민이 카메라에 잡힐 때는 바로 병풍 얘기를 꺼낼 때다.문화방송 토크쇼 <놀러와> ‘골방토크’에 출연하는 이하늘은 매번 예능에 완벽하게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를 하고 다가올 개편에서 잘릴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토로하며 거꾸로 방송 분량을 확보해나간다. <남자의 자격>에서는 김태원에게 그나마 남은 약골 이미지마저 빼앗기고 애매한 자리에 서게 된 이윤석과 눈부신 비주얼로 보기 드문 고급 병풍이 된 탤런트 이정진이 프로그램 내에서 자신의 존재감 자체를 캐릭터화한 경우다. 최근 인터넷 검색어에 자주 오르내리는 아이돌 그룹의 서열도 이러한 맥락에 있다. 예닐곱명이 동시에 출연하는 예능프로그램에서 자연스레 흐름을 이끄는 중심인물과 멀리서 따라가는 쩌리가 생겨나는 것처럼, 적게는 네명에서 많게는 열세명으로 구성되는 아이돌 그룹에서도 일종의 서열이 생겨난다. 지금까지 멤버 간의 서열이 ‘불문’에 부쳐졌다면, 최근에는 노골적인 표 형식의 서열이 하나의 팬 놀이 문화로 자리잡았다. 서열은 ‘하찮음’이나 ‘대중 인지도’, ‘방송 분량’ 등을 기준으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대중 인지도가 가장 낮거나 방송 분량이 가장 적은 멤버에게는 그 자체를 캐릭터화해 쩌리짱 같은 별명을 붙여준다. 에스비에스 이!티브이 <아이돌! 막내반란시대>는 이렇게 아이돌 그룹에서 인지도가 가장 낮은 막내들을 모아놓고 인지도를 상승시키는 걸 목적으로 한 프로그램이다. 아이돌 그룹 내 서열을 기획 의도로 활용한 영리한 프로그램이다. 20대에서 유행하는 ‘잉여킹’을 아십니까? 시청자와 대중이 쩌리를 다시 보게 된 이유는 뭘까? 카메라 안에서 할 수 있는 얘기가 많아지는 것도 하나의 이유다. <10아시아> 위근우 기자는 “카메라 안에서 할 수 없었거나 불편한 얘기로 여겨졌던 편집이나 방송 분량 등 방송 자체에 대한 이야기가 카메라 안으로 들어오는 지점에서 재미를 찾아가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쩌리라는 캐릭터가 갖는 친근함도 한몫한다. 사람들은 중심부에 서지 못하고 주변을 기웃거리는 쩌리 캐릭터에게서 예기치 않은 웃음을 발견한다. 이들이 내뱉는 자조적인 멘트가 웃음 포인트가 된다. 좀더 넓게는 쩌리라는 인간형에 대한 공감이다. 쩌리짱이라는 단어는 20대 젊은 층에서 유행하는 ‘잉여킹’이라는 단어와 비슷하다. 사회에 필요 없는, 남는 인간이라는 뜻의 ‘잉여 인간’ 상태가 심화되면 만화 <포켓 몬스터>에서 따온 ‘잉여킹’이 된다. 방송 프로그램에서 방송 분량을 확보하지 못하거나 존재감이 없는 자신을 ‘쩌리짱’으로 희화화해 거꾸로 웃음 포인트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사회 시스템에 들어가지 못하고 주변을 맴도는 자신을 ‘잉여킹’으로 부르면서 쾌감을 느낀다. 여기에서 쩌리짱과 잉여킹 사이에 공감대가 형성된다. 쩌리들이 자발적 커밍아웃으로 간만에 카메라 원샷을 받고 있긴 하지만, 겉절이도 봄이나 가을에만 반짝 당기는 것처럼, 쩌리들 역시 ‘쩌리 효과’가 다하면 곧 카메라 밖으로 밀려나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도 쩌리들에게도 쩌리들이 사는 주변부 세상이 있다는 사실, 밥상 한가운데 놓인 김치 자리보다 그 옆자리에 만족하는 이들도 있다는 사실은 기억해두자. 우리의 쩌리짱은 오늘도 이렇게 외친다. “쩌리짱이어서 행복하다”고. 글 안인용 기자 nico@hani.co.kr, 사진 박미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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