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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위부터) 1. 2009 가을/겨울 시즌 폰트 세트. 2. ‘돌체 엔 가바나’ 브랜드명으로 작업한 패션 폰트. 3. 2010 봄/여름 시즌 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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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패션 아이템으로 알파벳 글자체 만든 그래픽디자이너 양윤정씨 인터뷰
하늘색 킬힐을 신고 걷는 모델의 두 다리 사이에 루이뷔통 벨트가 채워지면 알파벳 ‘에이(A)’가 되고, 둥그런 샤넬 가방에 히피풍의 옷을 입은 구부러진 팔이 올라가면 ‘비(B)’가 된다. 글래디에이터 슈즈를 신은 다리에 가죽 부츠를 신은 다리와 플랫폼 슈즈를 신은 다리가 붙으면 ‘이(E)’다. 흑백의 꽃무늬 옷을 입고 새침하게 허리에 손을 짚은 팔은 ‘피(P)’, 기하학적 무늬의 구두를 신은 두 다리와 노란색 가방을 든 두 팔이 교차하면서 만들어내는 모양은 영락없는 ‘엑스(X)’다. 서른개가 넘는 팔과 다리, 구두, 가방, 옷자락, 액세서리가 모이면 스물여섯개의 알파벳 글자가 완성된다.멀리서 보면 울퉁불퉁한 알파벳 글자체이고, 자세히 보면 하나하나 패션쇼 런웨이에서 선보인 패션 아이템이다. 패션과 폰트가 만났다고 해서 ‘패션 폰트’라고 이름 붙여진 이 글자체는 패션지 <보그> 한국판에서 ‘인 보그’(In Vogue)라는 글자로 처음 보게 됐다. 패션지 위의 수많은 패션 아이템 사진 속에서 혼자 조용히 물구나무서기를 하는 ‘브이(V)’는 주위의 글자마저 숨죽이게 하는 신기한 분위기의 글자였다. 이달 월간 <디자인>을 보다가 다시 한번 패션 폰트와 마주했다. 크기는 작았지만 서커스를 하듯 기묘한 모양새를 한 패션 폰트는 또 한번 눈을 사로잡았다. 글자체 디자인인 타이포그래피 영역과 실제 패션 영역 사이에 위치해 뭐라 정의 내릴 수 없는 패션 폰트를 보면서 여러가지 질문이 떠올랐다.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패션 폰트를 만들어낸 그래픽디자이너 양윤정(사진)씨를 수소문했다. 네덜란드에서 공부하는 그와 전화·이메일로 얘기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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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디자이너 양윤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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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세인트요스트대학에서 그래픽디자인 석사과정을 밟고 있는데, 석사 논문이 패션 쪽이라 논문과 관련해 파리에 와 있다. 논문은 그래픽디자인과 패션 브랜딩에 관해 쓰고 있다. 패션에 원래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니었는데, 패션 폰트 작업을 하면서 관심을 갖게 됐다. 그래서 관련 분야 논문을 쓰게 됐다.”
“만들다 보면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 나와”
그래픽디자이너로 일을 한 지 얼마나 됐나?
“삼성디자인학교(SADI)에서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을 전공하고 웹디자이너로 일을 했다. 웹디자이너로 일을 하다가 마케팅 일을 배우기도 했다. 그러다가 회사를 그만두고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일을 했다. 네덜란드에 온 건 2008년쯤이다.”
언제, 어떻게, 왜 패션 폰트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됐나?
“그래픽디자이너로 일을 하면서 주요 관심사는 타이포그래피였다. 이미지로 폰트를 만드는 패션 폰트 작업은 2007년에 시작했다. 패션은 우선 시각적으로 화려하다. 매년 두번씩 정기적으로 트렌드가 바뀐다. 그런 패션을 타이포그래피에 이용할 수 없을까 생각하다가 문득 떠오른 아이디어다. 폰트는 보통 하나를 만들면 그 자체로 완성되고 그렇게 쓰이지만, 패션 폰트는 시즌마다 새로운 폰트를 만들어낼 수 있다. 아이디어는 이어지지만 이미지는 정기적으로 바뀌는 게 흥미로웠다. 2007년부터 시즌마다 새로운 폰트를 만들고 있다. 시즌마다 트렌드를 반영해 새로 만드는 폰트 세트가 계속 쌓이면 패션의 역사가 된다는 점도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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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도쿄 디자인 페스타 전시를 위해 제작한 엽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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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도쿄 디자인 페스타 전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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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마다 폰트 느낌이 확실히 다른가?
“색깔만 봐도 다르다. 봄/여름에는 색깔이 화사하고 밝다. 마찬가지로 겨울/가을 시즌에는 어둡다. 예를 들어 밀리터리룩이 그 시즌의 트렌드면 패션 폰트 역시 색깔이나 아이템 면에서 그러한 트렌드가 확 드러난다.”
보통 타이포그래피 작업과는 다를 것 같다. 어떻게 작업하나?
“매 시즌 컬렉션이 실린 잡지를 오려서 붙이면서 폰트를 만든다. 사이즈가 다 다르지만 그만큼 잡지의 양도 많기 때문에 이미지를 구하는 건 어렵지 않다. 어려운 점도 있다. ‘오(O)’나 ‘큐(Q)’, ‘에스(S)’처럼 곡선이 들어간 글꼴은 만들기가 쉽지 않다. 재미있는 건 손으로 작업하기 때문에 예상치 못한 조합이 나온다는 거다. 컴퓨터로 타이포그래피 작업을 하면 보통 의도한 대로 손이 따라간다. 패션 폰트 작업은 한정된 자료로, 내가 100% 통제하지 못하는 환경에서 작업을 하기 때문에 만들다 보면 예상치 못한 형태가 나온다. 일반 타이포그래피 작업과 다른 부분이다.”
패션 브랜드명을 패션 폰트로 작업한 것도 있더라.
“<보그> 한국판의 요청으로 한 작업이었다. 색깔이 뚜렷한 각 패션 브랜드와 디자이너의 성향을 반영해 패션 폰트를 제작하는 거였는데, 생각보다 힘들었다. 예를 들어 캘빈 클라인의 경우에는 딱딱한 이미지가 많아서 쉽지 않았다. 돌체 앤 가바나는 리본 디테일을 많이 이용했다. 이 작업을 하면서 좋아하게 된 디자이너는 벨기에 출신의 패션디자이너 마르탱 마르지엘라다. 색깔을 쓰는 방식과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내는 그의 디자인이 좋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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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폰트의 변형 과정을 보여주는 폰트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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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는 메시지다. 시즌마다 패션은 우리에게 다른 메시지를 전한다’는 문구가 쓰인 엽서 작업이 인상적이었다.
“2007년 도쿄에서 전시를 하면서 만든 엽서다. 작업을 할 때마다 이미지가 메시지라는 생각을 항상 한다. 글자체는 하나의 이미지이고, 그 이미지가 바로 메시지라는 점이다. 패션 역시 시즌마다 이미지를 통해 다른 얘기를 해준다는 걸 얘기하고 싶었다.”
계절마다 다른 색상… 파리 전시도 계획
망 위에 실로 글자체를 만든 ‘헬베티카 와이어넷’ 작업은 어떤 작업인가?
“보통 폰트는 종이 위에 인쇄된다. 그런데 폰트가 종이 위가 아닌 다른 배경 위에 있으면 어떨까 해서 시작한 작업이다. 폰트 자체가 이미지가 되어서 다른 공간에서 어떻게 보이는지가 궁금했다. 그래서 투명한 망에 실로 엮어 폰트를 만들었다. 이런 식의 이미지 폰트 작업이 아직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미지 폰트 작업에 대한 시도는 꾸준히 있다. 스위스나 프랑스에서는 실제 종이를 잘라 입체적인 글자를 만드는 3차원(3D) 폰트 작업도 하더라.”
패션 폰트 작업에 대해 주변 그래픽디자이너나 네덜란드 학교의 반응은 어떤가?
“그래픽디자인의 역사를 중요시하고 개념적인 작업을 주로 하는 이곳 네덜란드에서 교수님들의 반응이 호의적인 건 아니다. 이미지 폰트 작업은 아무래도 미적이고 장식적인 부분이 많이 강조되니까. 패션 폰트의 경우 실제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는 활자로 만들기에는 걸림돌이 많은 부분도 있다.”
앞으로 어떤 작업이나 활동을 할 계획인가?
“논문도 패션 쪽으로 쓰는 만큼 패션 폰트의 연장선상에 있는 일을 하게 될 것 같다. 상업적인 영역에서 실제 타이포그래피와 브랜드가 연계되는 부분에서 일을 하고 싶다. 여름에는 파리에서 패션 폰트 관련 전시회도 할 계획이다.”
안인용 기자 nic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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