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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든살의 생애 첫 에스프레소. 박미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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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탐앤탐스와 함께하는 커피 사연 공모전
올해로 아버지는 여든이 되셨다. 올해로 나는 스물아홉이 되었다. 여든 살의 아침은 새벽 4시도 늦다. 내가 단잠의 절정을 달리는 사이, 아버지는 물을 끓여 온도를 맞추고, 시간을 재며 녹차를 우려낸다. 그 번거로운 과정을 거치면 비로소 한잔의 녹차와 아버지의 아침이 시작된다. 오래된 라디오가 찌글찌글 음악을 흘려보내면 아버지는 탐정 돋보기를 손에 들고 새벽 내내 책을 보신다. “나한텐 눈이 제일이다.” 평생 책을 벗 삼아 살아오신 아버지는 종종 묻지도 않은 당신의 신체 랭킹을 발표하시곤 했는데 단 한 번도 ‘눈’이 1위를 놓쳐본 적이 없다. 그런 아버지께서 한두 해 전 백내장 수술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신 적이 있다. 눈이 회복기를 거치는 동안 아버지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어색했다. 책을 읽을 수도, 다큐멘터리를 볼 수도 없었다. 아버지의 일상은 예전보다 더 단조로워졌다. 노인의 하루가 길다는 것을 나는 그렇게 알았다. 어느 날 정기검진을 다녀오신 아버지께 어머니께서 식사는 어떻게 하셨느냐고 묻자 뜻밖의 답변이 돌아왔다. “병원 안에 큰 찻집이 있는데 거기서 커피 한잔 마시니 배부르네. 난 진찰 마치고 거기에서 커피 한잔 마시는 재미로 병원 가.” 커피가 배부르다는 표현보다 더 어색한 건 아버지와 커피의 조합이었다. 그 ‘찻집’이란 이름 자체로 문화가 된 유명 커피전문점이었다. 된장녀의 표지라 불리는 커피잔을 들고 만면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고 계셨을 아버지를 상상하니 어쩐지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지루한 직장생활을 달래줄 취미거리를 찾아 인터넷을 배회하던 나는 오랫동안 벼르던 모카포트를 ‘지르기로’ 결심했다. 이곳저곳에서 포트를 이용한 에스프레소 추출 방법을 한참 읽어가던 나는 무언가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가만, 이거 어딘가 낯이 익은데….’
그건 아버지였다. 2그램의 찻잎 계량으로 시작되는 아버지의 새벽 녹차 의식은 ‘번거롭지만 그게 묘미’라는 점에서 에스프레소 추출 과정과 닮아 있었다. 아버지의 일상을 채울 새로운 취미를 선물해 보자는 욕심이 생겼다. 상품이 배송된 건 때마침 토요일 오후. 나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상대로 작은 에스프레소 추출 강좌를 열었다. 바닐라아이스크림에 에스프레소를 얹어 아포카토를 만들고, 우유를 섞어 라테를 만들어 보일 때마다 남학생의 질문이 이어졌다. 호기심과 즐거움이 한데 묻어나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며 나는 조심스레 실습을 권했다. 하지만 아버진 손사래를 치시며 급히 자리를 뜨셨다. ‘포르르르~ 포글포글~’ 같은 날 늦은 오후, 포트 끓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버지였다. 비록 서툴지만 아버진 배운 순서에 따라 보일러통에 물을 채우고, 커피를 눌러 담아, 불 위에 포트를 올리고선 시간을 재어가며 그 곁에 서 계셨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운 찻잔에 조심스레 에스프레소를 담아 내셨다. 여든 살, 생애 첫 에스프레소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박규희/서울 서대문구 홍은1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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