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0.04.14 22:59 수정 : 2010.04.18 09:00

예전에 조선소였던 시프바우의 전경. 지금은 극장과 레스토랑, 바가 들어선 복합문화공간이 되었다. 스위스관광청 제공

[매거진 esc] 30년간 방치된 슬럼가를 문화·유행의 거리로 재단장한 ‘취리히 웨스트’

제임스 조이스가 거닐었고, 아인슈타인이 공부했던 곳. 레닌이 러시아혁명을 준비했던 은신처이자 다다이스트들이 다다이즘으로 예술혁명을 일으켰던 도시.

고풍스런 건물들이 아름다운 강변과 조화를 이루는 스위스 최대 도시 취리히는 스위스를 찾는 이들이 반드시 방문하게 되는 여행지다. 샤갈이 만든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으로 유명한 프라우뮌스터 교회와 현대 건축의 거장 르코르뷔지에의 혁신적인 건축물, 그리고 스위스가 가장 사랑하는 조각가 자코메티의 작품을 만날 수 있는 스위스 문화예술의 중심지답게 도시 곳곳에 많은 볼거리를 간직하고 있다. 1200개의 분수가 골목마다 숨어 있어 유럽에서 분수가 가장 많은 ‘분수의 도시’이기도 하다.

취리히의 문래동, 청담동이 되다

‘프라이타크숍’ 가방업체 프라이타크가 컨테이너로 만든 가방전시장.

이 유서 깊은 도시의 새로운 매력 포인트로 요즘 뜨고 있는 곳이 ‘취리히 웨스트’, 취리히 서부다. 옛 도심이 수백년 된 옛 도시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취리히 관광의 오랜 레퍼토리라면, 취리히 서부는 현대 도시의 활력과 변화를 만날 수 있는 방문지로 자리잡았다. 칙칙한 공장지대의 버려진 공장 건물들이 공연장과 전시장, 공예공방, 사진 스튜디오, 디자인 사무실로 활용되면서 문화와 유행의 거리로 다시 태어났다.

취리히 서부는 서울로 치면 영등포구 문래동쯤이라고 할 수 있다. 취리히를 가로지르는 리마트강과 철도 사이의 계곡에 자리잡아 오이로파 다리까지 이어지는 이곳은 맥주 양조장, 곡물회사 사일로, 비누공장, 조선소와 제철소 같은 각종 중공업 공장들이 모여 있는 전형적인 도시 외곽 공업지대였다. 1960년대까지 스위스 번영의 상징이었던 이곳은 그러나 80년대 들어 공장들이 비용절감을 위해 다른 곳으로 떠나가면서 도시 속 빈 섬처럼 변하게 된다. 낡고 우중충한 공장 건물, 허름한 저소득층 아파트에 온갖 낙서가 가득한 슬럼으로 전락해 30년 넘게 방치됐다.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꼽히는 취리히의 보이지 않는 그늘이었다.

그랬던 곳이 2000년대 들어 재개발되기 시작하면서 되살아났다. 산업시설과 문화가 만나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는 취리히의 새 명소로 떠오른 것이다. 공장을 리노베이션한 다양한 공간이 속속 입주하면서 취리히 서부는 요즘 취리히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외식과 데이트 코스로 각광받고 있다.


조선소는 극장으로, 제철소는 전시장으로

취리히 웨스트 최고의 볼거리는 단연 ‘시프바우’다. 이름 그대로 ‘조선소’였던 시프바우는 극장과 세련된 레스토랑, 바가 있는 복합문화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시프바우에 들어선 레스토랑.
스위스의 새로운 관광지로 떠오른 ‘취리히 웨스트’

시프바우는 원래 취리히 강을 오가던 증기선을 만들던 조선소였다. 산업 구조가 바뀌면서 문을 닫았던 이 공장을 2000년 취리히 샤우슈필하우스(극장)가 새로운 실험적 문화공간으로 새로 꾸몄다. 이 시프바우 프로젝트가 시발점이 되어 취리히 서부 재개발이 시작됐다.

시프바우는 겉에서 보면 옛 조선소 건물 그대로다. 일부러 남겨놓은 낡은 철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천장이 높아 탁 트인 공장 특유의 넓은 실내가 펼쳐지고, 고급 레스토랑 ‘라살’이 먼저 방문객을 맞는다. 실내 중앙에 자리잡은 재즈클럽 ‘더 무드’는 은은한 간접조명 속에 배관 파이프와 철근이 그대로 노출된 콘크리트 기둥 등을 인테리어 요소로 활용했다. 그리고 가장 안쪽에 스위스 최대의 공연장이 자리잡고 있다. 저녁이면 잘 차려입은 취리히 시민들이 가족이나 연인과 함께 고급 식사와 술, 그리고 연극을 즐기러 찾아오는 취리히 서부의 상징이다.

시프바우 바로 옆에 있는 복합공간 ‘풀스5’는 제철회사 주조공장을 개조했다. 건물 외관을 완전히 새로 고쳐 얼핏 보면 새로 지은 쇼핑센터로 보이지만 넓게 뚫린 실내가 공장건물이었음을 짐작게 한다. 각종 고급 상점들이 내부 가장자리에 입점해 있고, 중앙 넓은 공간에는 기획 전시를 주로하는 전시공간을 배치했다. 1층 레스토랑 ‘그뉘세라이’는 풀스5가 옛 제철소였음을 보여주는 콘셉트로 꾸몄다. 오래된 설비와 작은 용광로를 식당 홀 가운데와 벽 곳곳에 그대로 남겨 뒀고, 메뉴판과 음식 거치대 등도 모두 쇠로 만들어 철공소 안에서 식사를 하는 것 같은 분위기를 연출했다.

시프바우에 들어선 바.
복합공간 ‘풀스5’에 있는 레스토랑 ‘그뉘세라이’

스위스식 ‘느린’ 재개발로 만드는 새로운 문화도시

시프바우와 함께 이 지역의 또다른 명소로 꼽히는 곳은 미술 전시장으로 바뀐 옛 뢰벤브로이 맥주 양조장 건물이다. 스위스의 대표적인 유통업체 미그로스가 설립한 문화재단이 양조장 창고를 미술 전시장으로 바꿔 취리히 서부의 대표적 문화공간이 됐다. 가방업체 프라이타크가 컨테이너로 만든 가방전시장 ‘프라이타크숍’도 독특한 외관이 눈길을 사로잡는 명물이다. 컨테이너 상자 17개를 쌓아올린 이 건물은 단순한 가방가게가 아니라 독특한 건축 디자인 아이콘이자 취리히 서부의 랜드마크 구실을 하면서 관광객들이 건물 구경을 하러 찾아올 정도다.

이런 새로운 실험들이 이어지면서 취리히 서부는 공장 노동자들이 살던 낡은 주거지역에서 뉴욕 첼시나 런던 사우스뱅크 같은 도시 재생 문화지대로 진화하고 있다. 장비업체 마그가 있던 곳에는 내년 취리히시를 내려다볼 수 있는 126m 전망대 건물이 들어서고, 유제품 회사 토니 공장에는 취리히대학 응용과학대와 문화센터가 입주할 예정이다. 19세기 말 노동자들이 일일이 손으로 돌을 쌓아 지은 빕킹어 고가도로와 레텐 고가도로 아래 어둡고 칙칙했던 골목길은 거리 장터로 바꾸는 공사가 한창이다.

순식간에 건물들이 헐리고 또다른 건물이 들어서는 우리와 달리 취리히시는 이 지역 개발을 25년 계획으로 진행하고 있다. 건물을 새로 짓기도 어렵고, 한번 지은 건물은 헐기보다 최대한 활용하는 스위스의 도시계획 문화를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취리히 웨스트는 도시라는 공간과 문화의 역할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새로운 관광 코스다.

‘그뉘세라이’의 철제 차림표.

취리히=글·사진 구본준 기자 bonbon@hani.co.kr


광고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