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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급반은 ‘원더우먼’…고급반은 ‘시빌 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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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슈퍼히어로 그래픽노블 단계별 추천작들
소설과 만화를 아울러, 허구의 캐릭터는 대개 그를 창조한 작가와 운명을 함께한다. 하지만 슈퍼히어로들은 수많은 작가의 손을 빌려 무려 7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 생명력을 이어 왔다. 각기 다른 그림체, 필체, 세계관을 통해 끊임없이 재창조되면서 당대와 유기적으로 호흡해 왔다는 점이 슈퍼히어로 그래픽노블의 독보적인 매력. 코믹스 영웅들의 가장 진화한 모습들이 우선적으로 선보인 국내 그래픽노블 출간작들의 숲에서 길을 잃지 않는 방법을 단계별로 소개한다.
1. 슈퍼히어로 초급반 : 훌훌 넘기며 읽는 영웅들의 탄생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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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트맨: 이어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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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만화영화 속 영웅들의 기억만을 가지고 있거나 할리우드 영화 캐릭터로 각색된 캐릭터들만 보아왔다면 당신은 변명의 여지 없이 초급반이다. 이런 경우 우리에게도 낯익은 슈퍼히어로들이 홀로 등장하거나, 지나치게 복잡하지 않은 형식과 구조의 그래픽노블을 먼저 접하는 편이 옳다.
초심자들을 위한 최고의 작품은 <월드 그레이티스트 슈퍼히어로> 시리즈다. <슈퍼맨: 땅 위에 평화를>, <배트맨: 범죄와의 전쟁>, <원더우먼: 진실의 영혼>, <샤잠: 희망의 힘>, 〈JLA: 탄생의 비밀〉, 〈JLA: 자유와 정의〉로 구성되어 있는 이 시리즈는 슈퍼맨, 배트맨, 원더우먼, 캡틴 마블을 비롯한 디시 코믹스 슈퍼히어로의 탄생과 그들의 결사체인 ‘저스티스 리그 오브 아메리카’(JLA)에 대한 애정 어린 기록들을 담고 있다. 타블로이드 판형으로 웅장한 그림체를 시원시원하게 감상할 수 있는데다 서사 구조도 단순명료한 편. 배트맨의 탄생과 관련하여 조금 색다른 해석을 접하고 싶다면 프랭크 밀러의 <배트맨: 이어 원>도 읽어봄 직하다. 최근 개봉작인 <아이언맨 2>를 본 독자라면 영화와는 다소 다른 관점에서 아이언맨을 소개하는 <아이언맨: 익스트리미스>를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2. 슈퍼히어로 중급반 : 초인들도 뭉쳐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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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덤 컴〉, 〈하우스 오브 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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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히어로들이 뭉쳤다. 그리하여 이야기들도 조금씩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점심시간에 중국음식점에서 짬뽕, 자장면 통일하기도 쉽지 않은 인간사처럼 슈퍼히어로들의 사회에도 조금씩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하우스 오브 엠>에는 마블 코믹스 슈퍼히어로들의 결사체 ‘어벤저스’가 등장한다. 그리고 사건의 주된 동기는 ‘엑스맨’의 세계에서 발생한다. 한때 엑스맨의 일원이었던 스칼릿 위치가 자신의 능력으로 현실 세계를 완전히 교란시키면서 지구상의 권력은 엑스맨 시리즈의 슈퍼빌런(초인 악역)인 매그니토의 손으로 넘어간다. 슈퍼히어로들도 과거의 기억을 모두 잃어버린 상황. 유일하게 이전 세계의 기억을 가지고 있던 울버린이 스파이더맨, 아이언맨, 데어데블과 같은 동료들의 기억을 일깨우고 다시 규합하여 매그니토에게 맞선다는 줄거리. <펄스>라는 가상의 잡지 텍스트들이 챕터 사이에 수록되어 있어 그리 어렵지 않게 그래픽노블만의 독특한 형식과 매력을 만끽할 수 있다.
<킹덤 컴>은 디시 코믹스 슈퍼히어로들의 동아리, 즉 저스티스 리그의 먼 미래를 다룬다. ‘슈퍼맨’ 클라크 켄트와 ‘배트맨’ 브루스 웨인은 이제 나잇살도 붙고 흰머리도 늘어난 풍채로 등장한다. 게다가 슈퍼히어로들의 수가 늘어나면서 자신의 할 일이 더는 없다고 판단한 슈퍼맨은 현역에서 은퇴하여 농사를 짓고 있다. 하지만 애초 정의를 수호하겠다던 슈퍼히어로들이 지나치게 난립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혼란에 빠진 세상을 보다 못한 슈퍼맨은 다시 원년 저스티스 리그 멤버들과 함께 질서를 바로잡고자 돌아온다.
3. 슈퍼히어로 고급반 : 고뇌하지 않는다면 초인의 유니폼을 벗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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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크릿 워〉, 〈시빌 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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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천동지. 하늘이 식겁하고 땅이 흔들린다. 그 숱한 초인들 중 하나만 현실 세계로 튀어나온다고 해도 약이 없을 텐데, 이제 영웅들이 편을 가르고 처절한 사투를 벌인다. 마블 코믹스의 <시크릿 워>는 중앙정보국(CIA)으로 대표되는 미국 공작정치에 관한 노골적인 은유다. 어느 날, 슈퍼히어로들이 하나둘 암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어벤저스를 관장하는 비밀 기관 ‘쉴드’는 라트베리아라는 제3국에서 미국 내 슈퍼빌런들을 매수하여 어벤저스를 와해시키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음모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스파이더맨, 데어데블, 울버린 등 엄선된 슈퍼히어로들이 라트베리아로 급파되지만 그 배후에는 더욱 엄청난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 비밀문서, 녹취록과 같은 ‘쉴드’의 내부 자료 형식을 빌려 온 텍스트들이 수시로 등장하는데다 그 텍스트들이 스토리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어 상당한 집중력을 요한다.
<시빌 워>는 연대표상으로 볼 때 <시크릿 워>의 다음에 위치하는 시대의 이야기. 역시 온갖 슈퍼히어로들이 난립하면서 사회문제로까지 불거지게 되자 국가에서는 ‘슈퍼히어로 등록제’를 시행해 그들을 특별관리하려 한다. 이제 마블 히어로들은 등록제에 찬성하는 쪽인 아이언맨 파와 반대하는 캡틴 아메리카 파로 나뉘어 내전을 벌인다. 이야기 구조나 형식은 복잡하지 않지만, 최근 출간된 <시빌 워: 아이언맨>처럼 같은 사건을 바탕으로 슈퍼히어로들의 다른 관점을 보여주는 풍성한 에피소드들이 가지를 치고 있다.
9·11 이후 미국의 현실에서 직접적인 영감을 얻었다고 술회한 프랭크 밀러의 <배트맨: 다크 나이트 스트라이크 어게인>은, <왓치맨>과 함께 그래픽노블 역사의 중요한 분기점으로 언급되는 <배트맨: 다크 나이트 리턴즈>(1986)의 속편. 슈퍼맨의 적인 렉스 루터가 미국의 대통령으로 군림하고 있는 세상에서 대다수의 슈퍼히어로들은 수용소에 억류되어 있다. 렉스 루터에게 약점이 잡힌 슈퍼맨은 그의 앞잡이 노릇을 하며 슈퍼히어로들을 탄압하고, 어느덧 노인이 되어 버린 배트맨은 아톰, 그린 애로 등 동료 영웅들을 규합하는 한편 자신의 제자들을 양성하여 혁명을 도모한다. 사색적인 대사의 향연과 선 굵은 그림체를 통해 그래픽노블의 진수를 만끽할 수 있는 것과 함께, ‘슈퍼맨과 배트맨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라는 지극히 초딩스러운 질문에 대한 답도 이 작품에서 찾을 수 있다.
4. 슈퍼히어로 박사과정 : 뉴스를 꺼버리지 않는 사람들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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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이 포 벤데타〉, 〈왓치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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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런 무어는 코믹스를 그야말로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고 평가받는 작가다. 심지어 프랭크 밀러조차 그로부터 받은 영향이 지대했다고 말할 정도이니, 그래픽노블을 이야기하면서 앨런 무어를 빼놓는 것은 대단한 실례가 될 것이다.
“이 만화는 뉴스를 꺼버리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만화다.” <브이 포 벤데타>(1981)의 공저자인 데이비드 로이드가 쓴 머리말의 마지막 문장이다. 독재국가로 변모한 영국에 ‘브이’라는 이름의 가면 무법자가 등장한다. 비인권적인 경찰권력을 응징하는 데서 출발한 그의 활약은 마침내 혁명의 도화선에 불을 붙이는 데에 이른다. 대처리즘이 지배하던 1980년대 영국의 암울한 사회상을 반영한 이 작품의 누아르적인 색채는 이후의 ‘어두운’ 그래픽노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액션물에 가깝게 각색된 <브이 포 벤데타> 영화판만 본 독자라면 반드시 읽고 원작에 경의를 표할 필요가 있다.
<브이 포 벤데타>가 도발이었다면, <왓치맨> (1986)에 이르러 앨런 무어는 슈퍼히어로물의 근간을 뒤흔든다. 과거 찰턴 코믹스의 잊혀진 슈퍼히어로들을 주인공으로 복원시킨 이 작품에서 폭로하는 것은 영웅들의 콤플렉스와 추악한 만행들이다. 1960~70년대 국내외 정세의 격변기에 슈퍼히어로들이 어떻게 이용당해 왔는지, 그리고 통제받지 않는 힘과 신념은 어떤 위험을 내포하고 있는지를 철학적으로 고찰한 <왓치맨>은 한 컷도 허투루 보아서는 곤란할 정도로 치밀한 구성의 그림에 문학적인 대사와 내레이션, 신문기사의 형태를 빌려 온 텍스트 페이지까지, 이후에 등장한 숱한 그래픽노블의 전형을 창조했다.
앨런 무어, 프랭크 밀러와 함께 그래픽노블계의 ‘명예의 전당’에 나란히 이름을 올려야 할 이가 있다면 바로 닐 게이먼이다. 그의 대표작은 <샌드맨>(전 10권). 꿈의 세계에서 활동하며 어린이들을 악몽으로부터 보호한 1970년대 디시 코믹스의 슈퍼히어로 샌드맨을 재해석한 이 작품에서 샌드맨은 신의 존재에 가깝다. 무의식의 흐름을 따르는 꿈과도 같이 끝간 데 없이 펼쳐지는 상상력과, 동서양의 신화, 현대 대중문화, 심지어 디시 코믹스 슈퍼히어로물의 세계를 넘나드는 인용과 패러디의 향연이 압권이다. 에피소드마다 서로 다른 작화가들이 참여하여 다양한 그림체를 즐길 수 있다는 점 또한 <샌드맨>의 독보적인 매력이다.
◎ 시공사 전략마케팅팀 정남익 과장의 추천 그래픽노블 | <샌드맨>(아마노 요시타카가 작화를 담당한 <샌드맨> 외전 〈The Dream Hunter〉도 곧 출간 예정), <왓치맨>(앨런 무어의 또다른 대표작인 <프롬 헬>도 출간을 앞두고 있음), <시빌 워>, <헐크: 플래닛 헐크>, <슈퍼맨: 레드 선>
◎ 세미콜론 강병한 편집팀장의 추천 그래픽노블 | <배트맨: 허쉬>, <배트맨: 이어 원>. 비슈퍼히어로 그래픽노블 중에서는 <씬시티>, <푸른 알약>, 그리고 철학적인 유럽 에스에프 <어둠의 도시들>(5월 중 출간 예정작)
◎ 블로그 ‘부머의 슈퍼히어로’ 운영자 이규원의 추천 그래픽노블 | <월드 그레이티스트 슈퍼히어로> 시리즈, 그중에서도 <샤잠: 희망의 힘>. 강추작은 <슈퍼맨: 레드 선>. 초심자들의 필견작은 <헐크: 플래닛 헐크>, <아이언맨: 익스트리미스>
글 조민준 객원기자·사진 박미향 기자·자문 이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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