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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05.12 19:56 수정 : 2010.05.15 16:43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노르웨이의 숲’에서 ‘1Q84’까지 세계를 매료시킨 하루키의 생애와 라이프스타일





무라카미 하루키 열풍이 멈추는 지점은 어디일까?

한국과 일본에서 동시에 밀리언셀러를 기록한 〈1Q84〉의 경이적인 판매고는 국경의 울타리를 훌쩍 넘어선 하루키 문학의 힘을 새삼 보여준다. 4월16일 자정 〈1Q84〉 3권이 판매 개시되자 일본 전역의 각 서점에서는 한시라도 빨리 읽고 싶어 하는 팬들이 장사진을 쳤다. 3권을 출판한 일본 신초(신조)사는 판매 개시 12일 만에 100만권을 돌파했다고 발표했다. 지난해 5월 동시 출간된 1, 2권을 합치면 일본에서만 〈1Q84〉 350만권 이상이 1년 새 판매됐다. 한국에서도 4월 말 100만권 판매를 돌파하는 등 하루키 열풍이 식을 줄 모른다. 2권 마지막 부분에서 권총 자살을 시도한 아오마메는 과연 죽었는지, 살아서 꿈에서도 그리는 덴고와 재회할 수 있을까? 하루키의 삶과 스타일, 세계관을 하루키 전문가인 임경선씨가 낱낱이 추적했다. 〈1Q84〉의 작품 배경과 하루키 소설 세계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하루키가 말하는 하루키’와 하루키에 열광하는 국내팬들의 목소리도 전한다.

“솔직히 그런 것 할 시간에 맛있는 장어덮밥이나 먹지!”라며 자기 개인에 대해 쓰이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낯가림 심한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61). 하지만 어쩌나. 글은 글쓴이 자체이기도 하니, 글이 우리를 지독히 매료시킬 때 우리는 글쓴이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게다가 숨겨진 라이프스토리는 그의 소설 이상으로 흥미진진한 것을.

미국 소설과 팝송에 무섭게 빠져 지낸 청소년기

어른들한테 호감을 주는 학생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하루키, 그렇다면 그는 ‘비호감’ 학생이었다. 적당히 나쁜 짓, 연애질도 하고, 적당히 민폐도 끼친 건강한 청춘. ‘요새 젊은 애들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건지, 쯧쯧’ 소리를 들어가면서 학창시절을 보내는 것이 가장 유익하고 정상이라고 믿었던 그가 평범한 불량학생과 다른 점이 있었다면 무섭도록 책을 읽고 음악을 들었다는 점이다.

항구도시 고베에서 태어나 성장한 소년 하루키를 찾으려면 동네 서점이나 공립 도서관을 기웃거리면 되었다. 일문학 교사였던 부모님은 외동아들 마음껏 책 사보라고 서점과 외상을 텄고 집도 온통 책 천지였다. 중학교 시절엔 이미 세계문학전집을 독파하며 특히 그중에서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나의 북극성’이라 부를 정도로 좋아했다. 고교생이 되자 외국 선원들이 고베의 헌책방에 팔고 간 영문 페이퍼백에 몰두하며 이때부터 커트 보니것, 트루먼 커포티, 레이먼드 챈들러, 스콧 피츠제럴드 등의 미국 소설의 매력을 알게 되었다. 원서라 내용의 절반은 이해가 안 가서, 틈만 나면 영어사전을 왼손에 들고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재미 삼아 노트에 번역해 나갔다. 클래스메이트들은 ‘별 이상한 놈’이라고 수군거렸다지만 이 자발적인 취미는 훗날 수많은 영미 소설 번역작업의 단단한 기초가 되어주었다.

음악은 청춘의 또다른 동반자였다. 용돈만 받았다 하면 점심을 굶는 한이 있어도 로큰롤 엘피(LP)판을 사고, 기회만 있으면 고베시에서 열리는 각종 콘서트를 찾아다녔다. 14살의 중학생 때 난생처음 아트 블레이키의 재즈공연을 보러 가고, 마일스 데이비스의 리듬감을 초기 소설의 자양분으로 삼기도 했다. 현재도 변함없이 그의 취미는 중고음반 수집이지만 올드록과 재즈를 넘어 이젠 콜드플레이, 라디오헤드, 오아시스, 백의 팬을 자처하는 등 새로운 음악을 끊임없이 찾아 듣고 있다. ‘소년성’은 그래서 유지된다.

하루키의 사생활을 엿보다 (※클릭하시면 더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수업도 취업도 데모도 관심없던 대학시절, 건진 건 ‘아내’

하루키의 대학시절은 ‘캠퍼스의 낭만’과는 거리가 멀었다. 와세다대학 문학부 연극과에 입학했던 1968년은 ‘전공투’(전국학생공동투쟁회의)라 불리는 학생운동이 정점이던 시대. 하루키는 전공투가 몰락하자마자 일본의 대기업에 서둘러서 순순히 취직을 해버리는 운동권 학생들을 보면서 어떤 이데올로기나 ‘주의’(ism)도 따르지 않기로 결심했다. 대학에선 수업 대신 학내의 연극박물관 열람실에 처박혀 동서고금의 시나리오를 무차별적으로 읽으며 시나리오작가의 꿈을 막연히 꿈꿨지만, 나중에 시나리오가 탄생하기 위해선 ‘팀플레이’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뒤도 안 돌아보고 시나리오의 꿈을 접었다. 그 외엔 신주쿠 음반가게나 술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한 해에 200편 이상의 영화를 보며 지냈다.

대학시절 그가 단 하나 ‘건진 것’이 있다면, 그것은 지금의 아내 다카하시 요코다. 그녀는 대학에서 사귄 두 친구 중 한 명이었는데 다른 한 명도 여자다. 22살이라는 나이, 우리나라로 치면 전라도-경상도 커플이라 할 수 있는 간토-간사이 태생이라는 출신지역 차이로 집안의 반대에 부닥치지만 두 사람은 끝내 결혼식 없이 부부가 되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화장이나 파마를 해본 적이 없는 심플한 화이트셔츠 같은 여자, 요코는 이후 하루키에게 가장 든든한 파트너이자 능력 있는 편집자 노릇을 했다. 원고를 완성하면, 가장 먼저 아내에게 보여주는 것은 불변의 법칙이었고, 아내의 심사를 무사히 통과해야만 담당 편집자에게 보여줄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일러스트작가 안자이 미즈마루는 하루키의 인간관계에 대해 “굉장히 낯을 가리지만, 인간관계의 깊이에 대해선 완벽한 그 무언가가 있다. 한번 사귀면 진짜 오래간다”고 귀띔을 했다. 이는 고단(강담)사출판사의 편집자인 사이토 요코씨가 하루키의 데뷔작부터 시작해 무려 25년이라는 세월을 줄곧 하루키의 담당 편집자로서 함께해온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하루키의 사생활을 엿보다

재즈카페 주인장 시절 갑자기 ‘소설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섬광처럼

가난했던 학생 부부는 대학을 마치기보다 빚을 내서 도쿄 외곽에 예전에 키웠던 고양이의 이름을 딴 ‘피터 캣’이라는 재즈카페를 열었다. 하루키는 영화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High Fidelity)에 나오는 젊은 중고레코드숍 주인장 존 큐색의 생활상을 보노라면 재즈카페 주인장 시절의 자신의 모습을 추억하게 된다고 했는데, 그 너스레와는 달리 ‘피터 캣’은 독특하고 고집있는 주인장 덕에 꽤나 단골몰이를 했다. 주말에는 라이브밴드 공연을 열기도 하고 좌익영화를 상영하기도 하며 주인장은 매일 밤 의식처럼 자신이 다음날 입을 셔츠를 정성스레 다림질하기도 했다. 그가 매체 인터뷰를 싫어하게 된 계기 중 하나도 재즈카페 주인장 시절에 하도 매일 밤 손님 상대로 대화를 해야만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장사를 관둔 후로는 정말 말하고 싶은 사람하고만 말하고 싶었다고.

‘피터 캣’의 영업은 순조로워 가게는 도심으로 이전도 하고 대학도 7년 만에 졸업했다. 이 모든 것이 평온했던 어느 화창하게 갠 오후, 그는 야구장에서 불현듯 ‘소설을 쓰자’고 결심하게 됐다.

“돌이켜보면 그 감정은 순간 극심한 사랑에 빠졌을 때와 비슷했죠. 그 찌릿한 느낌은 숙명적인 사랑의 감정, 그 자체였어요.” 가게 문을 닫으면 그는 아내 몰래 새벽의 어두운 바 카운터에서 30분씩 짬을 내 소설을 써내려갔다. 그것이 군조신인상을 수상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첫 작품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였다. 30살 때였다.

성공적인 소설가 데뷔 이후 환갑을 맞기까지

하루키 주요 소설 및 연보

철저한 개인주의자였던 하루키는 소설가로서 데뷔 뒤 일본 문단의 집단적이고 권위적인 풍토를 배격하며 자신만의 심플하고 성실한 스타일을 만들어나갔다. 긴자에서 비싼 술을 접대받는 것보다 동네 생선가게에 직접 들러 그날의 신선한 생선을 골라 집에 가서 직접 요리해 먹는 것이 더 행복한 그였다. 새벽에 일어나 오전엔 글을 쓰고 오후엔 달리기나 수영 등의 운동을 하거나 중고음반가게를 돌아다닌 뒤 저녁엔 술 한잔하며 책을 읽는 소소한 일상. 허나 <노르웨이의 숲>이 430만권이나 팔리는 초밀리언셀러를 기록하며 갑작스런 유명세와 질시 어린 비판에 시달리게 된다. 하루키는 ‘다른 것’을 인정 못하고 ‘서로 봐줘가며 일하는’ 일본 특유의 집단주의에 신물을 느끼며 세계를 무대로 자유롭게 소설작업을 하는 길을 개척해 나갔다.

그리고 지금 그는 ‘일본의 하루키’가 아닌 ‘세계의 하루키’다. 그러나 그 자신은 예나 지금이나 일관된 소신으로 살아왔다. ‘쉬운 글 잘 쓰기’가 삶의 방식에도 그대로 반영되듯, 그는 여전히 언론이나 평론가들보다 독자 개개인의 의견이 소중하다고, 부조리한 제도와 시스템에서 개인이 자유로워야 한다고, 작지만 확실한 일상의 행복이 더 중요하다고, 마음 깊숙이 믿고 있다. 더 좋은 글에 대한 목마름은 환갑이 지난 지금도 여전하다. “소설 한 권을 쓰기 위해 보통 3년이 걸리는데, 내가 죽을 때까지 과연 앞으로 몇 권이나 더 쓸 수 있을지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난 소설을 쓸 때마다 기도해요. 이 책을 다 쓸 때까지 살게 해달라고.” 앞으로도 더 잘 쓸 수 있고, 아직 못다 한 이야기가 많이 남아 있다고. 하루키의 ‘작지만 확실한 행복’ 중 하나가 ‘인쇄가 막 끝난 자신의 책을 집어 물끄러미 쳐다보는 것’이라고 하던데… 그는 알까? 그건 그만의 행복이 아니라고.

글·사진 임경선/칼럼니스트·<하루키와 노르웨이숲을 걷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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