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 발표 준비가 한창인 4조 박세준, 정수헌씨(왼쪽부터)와 발표 준비를 돕는 제품 디자인학과 재학생.
|
[매거진 esc] 일반인들 대상으로 열린 삼성디자인학교 체험기
“누구나 직관적으로 쓸 수 있다는 게 장점인 것 같아요.” “헬로 키티 캐릭터는 여자들이 좋아하는 캐릭터라서 친근하기도 하죠.” “그런데 아래 물이 고일 수밖에 없는 구조이고, 세척하기도 쉽지 않아요.” “4인 가족 기준으로 구멍이 네 개지만 자취생에게는 나머지 구멍이 낭비처럼 느껴질 거예요.”
이틀간 토론에 토론 거쳐 리디자인 제품 내놔
1500원짜리 칫솔꽂이를 놓고 이토록 진지한 대화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칫솔꽂이의 장점과 단점은 물론 실제 칫솔꽂이를 사용하는 행동 방식에 대해서도 자세히 기록했다. 한 시간이 넘도록 칫솔꽂이에 대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꺼내놓고 나니, 칫솔꽂이가 3차원(3D) 투시도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 칫솔꽂이는 더는 예전에 알던 칫솔꽂이가 아니었다. 디자인은 거기서 시작됐다.
사디(SADI·삼성디자인학교)가 매년 진행하는 ‘사디 체험’ 프로그램이 지난 9~19일 서울 논현동 사디 캠퍼스에서 열렸다. 사디 체험 프로그램은 디자인을 배워본 적이 없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디자인학교를 단기간에 맛볼 수 있게 한 프로그램이다. 사디 초기부터 시작해 10년 넘게 꾸려졌는데, 지금까지 기초학과와 제품 디자인학과 등 2개의 과정으로 운영됐지만 올해부터 패션 디자인학과와 커뮤니케이션 디자인학과가 추가됐다. 모두 4개 과목이 이틀씩 진행된다.
참가자들은 크게 둘로 나뉜다. 디자인 비전공자로 자신에게 디자인이 맞는지 적성을 알아보고 싶은 이들과 디자인 또는 미술 전공자나 관련자 중 사디 입학을 고려하는 이들이다. 그래서 고등학생부터 컴퓨터프로그래밍이나 경영학을 전공하는 대학생, 인문학을 전공하고 회사를 다니다가 전직을 고려하는 일반인 등 제각각이다. 디자인에 대해 사전지식이 없어도 된다는 게 이 프로그램의 가장 큰 장점이다. 그래서 기자도 용기를 내 체험 프로그램 청강을 신청했다. 청강할 학과는 18~19일 열리는 제품 디자인학과로 결정했다.
|
최종 발표에서 5조 강민우, 김현주, 황인규씨(왼쪽부터)가 이윤동 교수(맨 오른쪽)의 지도 아래 청소용 솔 리디자인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
리디자인의 첫 관문은 제품 선택. 이 교수가 천원숍에서 사온 1000원 안팎의 저가 생활용품을 꺼냈다. 플라스틱 휴지걸이와 청소용 솔, 수저통, 칫솔꽂이 등이 과제로 주어졌다. 그다음 관문은 제품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다. 참가자들이 조별로 주어진 생활용품을 하나씩 들고 모여 앉았다.
기자가 청강생 자격으로 들어간 4조의 생활용품은 칫솔꽂이였다. 조장인 고등학교 3학년 조예린양이 펜을 잡았다. 조양을 비롯해 대학에서 각각 공예와 컴퓨터 관련 학과를 전공한 정수헌씨, 박세준씨는 모두 사디의 학과 운영 방식을 보고 싶어 참가했다. 이들은 제품의 판매 대상부터 가격까지 고려해 칫솔꽂이에 관한 다양한 의견을 내놓았다. 이해와 관찰을 바탕으로 새로 디자인할 제품의 차별화 요소를 적어나갔다. 물이 고이는 것은 배수구를 만들어 보완하기, 여성 소비자에게만 다가가는 헬로 키티 디자인 대신 좀더 보편적인 디자인 요소를 고려하기 등 개선의 지점이 쌓였다.
|
(위) 아이디어 스케치를 바탕으로 조예린양(오른쪽)이 재학생의 도움으로 모크업 작업을 하고 있다.
(아래) 박세준씨와 정수헌씨의 칫솔꽂이 리디자인 아이디어 스케치와 모크업 작업 결과물.
|
스케치가 끝나자 스케치한 종이를 한쪽 벽에 쭉 붙여 놓고 교수와 함께 토론을 벌이는 ‘크리틱’(critic·비평)이 이어졌다. 기발하면서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담은 스케치가 눈을 사로잡았다. 4조 조원들 역시 칫솔꽂이를 놓고 각자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펼쳐놓았다. 조예린양은 칫솔꽂이와 치약꽂이, 물컵 받침대를 하나에 담은 유기적인 칫솔꽂이 디자인을, 박세준씨는 칫솔 끝에 세 발 고무받침을 달아놓은 칫솔꽂이와 벽이나 유리에 붙여 사용할 수 있는 조립하는 구조의 칫솔꽂이 디자인을 선보였다. 가장 좋은 반응을 얻은 디자인은 물결치듯 곡선으로 이뤄진 정수헌씨의 아이디어였다. 이 교수는 여러 아이디어에 대한 짧은 비평을 통해 생각할 거리를 던져줬다. “기능성 면에서 문제가 있지 않을까? 재미요소가 있으면 조금 불편해도 괜찮을 수도 있어요. 가격도 고려해봐야 합니다. 조금 더 발전시켜보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참가자들은 크리틱을 거쳐 최종 낙점된 아이디어 스케치를 가지고 지하 1층 작업실로 내려갔다. 작업실에서는 아이디어를 우드폼 등의 재료로 형태를 잡아보는 ‘모크업’(Mockup)이 진행됐다. 사디 제품 디자인학과 재학생들의 도움을 받아 재료를 자르고 붙이는 작업이 이뤄졌고, 2차원 종이 위에 있던 스케치는 3차원 현실로 튀어나와 점차 제 모습을 갖춰나갔다. 모크업을 마치고 최종 발표를 위한 자료 정리가 시작됐다. 조별로, 또 개인별로 진행한 모든 과정을 파워포인트 파일에 넣었다. 제품 디자인에 대해 알게 된 것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넣으려는 참가자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역력했다.
구멍 뚫린 수저통 등 상용화해도 좋은 아이디어 쏟아져
저녁 7시, 최종 발표가 시작됐다. 참가자들은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의 결과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칫솔꽂이 리디자인을 발표한 4조에 이어 5조가 청소용 솔 리디자인 결과물을 보여줬다. 손바닥 모양으로 디자인해 편리성을 강조한 디자인과 머리카락을 쉽게 제거할 수 있는 디자인 등이 박수를 받았다. 수저통을 리디자인한 6조는 수저통에 손잡이를 달아보고, 수저통의 통기성을 개선하기 위해 구멍도 뚫었다. 제법 어려웠던 휴지걸이 리디자인에 도전한 7조는 사람이 거꾸로 매달려 있는 듯한 재치있는 디자인과 휴지걸이 위에 휴대전화 등을 놓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든 디자인을 선보였다. 발표가 다 끝나자 서로를 격려하는 박수가 터져나왔다. 이 교수는 “시간이 부족해 다 해보지 못한 부분이 있어 아쉽기도 하지만, 제품 디자인을 처음 접한 여러분이 과정을 따라오면서 내놓은 결과물 중에는 실제 상용화해도 괜찮은 좋은 아이디어가 많았다”며 참가자들에게 긍정의 신호를 보냈다.
제품이 새 옷을 입는 디자인 과정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고 나니 크게 두 가지가 달라졌다. 먼저 불만이 생겼다. 매일 무심하게 사용했던 칫솔꽂이나 주방 칼 정리대를 볼 때마다 그전까지는 보이지 않던 단점이 눈에 들어온다. 동시에 조금은 행복해졌다. 단점이 많은 제품을 보면서 ‘이렇게 다시 디자인하면 좋을 텐데’ 하고 고민하게 되고, 그 생각의 과정을 따라가며 새로운 디자인을 상상해본다. 이런 게 디자인의 재미일까?
글 안인용 기자 nico@hani.co.kr
댓글 많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