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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산마을 사람들은 수평적 소통을 위해 이름 대신 별명으로 서로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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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세상]
마을이야기 성미산마을 ①
인구 천만의 대도시 한복판에 위치한 성미산마을. 사람들은 도시 속 공동체라는 꿈을 현실화시킨 기적 같은 곳이라 일컫는다. 그런 시선은 부담스럽다. 어떤 비전 속에 기획해 만들어진 게 아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요즘은 전국에서 마을을 ‘투어’하러 온다. 2008년 700여명, 2009년 1200여명이던 방문객 수는 올해 상반기에만 800명을 넘었다. 대부분 자신의 상이 있다. ‘마을’이 성미산 골짜기에 있다고 여기거나 친절한 표지판을 기대하기도 한다. 골목을 오가는 사람을 모두 성미산마을 사람으로 넘겨짚기도 한다. 기대와 달라 실망도 했으리라!
사실 길거리와 골목길을 오가는 사람들 대부분은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다. 성산1동 거주 인구 2만여명 가운데 성미산마을 구성원은 1000여명에 불과하며 5~6개 동에 흩어져 산다. 이런 점에서 보면 성미산마을은 ‘공동체’라기보다 ‘커뮤니티’로 불리는 게 적당할 듯싶다. 뭔가 긴밀하게 관계를 맺고 사는 사이 정도의 뉘앙스이다. ‘공동체’란 낱말은 자칫 환상과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쉽다. 우린 강고한 규율도 없고, 강력한 중앙조직도 없다. 그런 걸 싫어한다. 대신 들고 나감이 자연스럽고, 간섭은 않되 서로 예의는 갖추는 그런 편안한 관계로 살고 싶다.
우리는 성미산마을의 출발점을 1994년 공동육아협동조합 ‘신촌우리어린이집’의 설립으로 본다. 당시 30대 초중반의 젊은 부모들이 공립과 사립 어린이집과 달리 아이들을 커다란 가족처럼 함께 키우자는 뜻에서 협동조합 방식의 어린이집을 상상했다. 실험이었다. 다행히 실험은 성공해 이듬해 두번째 어린이집(‘날으는어린이집’)을 세웠고, 몇 년 뒤 초등학교 저학년을 대상으로 한 방과후 어린이집(‘도토리/풀잎새 방과후’)까지 연이어 설립하게 된다. 지금 생각해 보면 방과후 어린이집의 설립이 초기 구성원들이 흩어지지 않고 가까운 지역에 서로 모여 살게 된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2000년에 접어들어서는 생활협동조합을 만들고, 마을의 작은 축제를 열고, 성미산을 지키기 위해 분투하면서 더 긴밀한 관계망을 형성했다. 육아 문제가 일상생활상의 문제로 확장되고, 특히 지역 현안으로 등장한 성미산 지키기 운동에 적극 대응하면서 비로소 마을의 초기 형태가 만들어진 것이다.
도시인들은 자녀 교육과 직장, 경제적 여건에 따라 이리저리 흘러 다니는 일종의 유목민들이다. 자기가 사는 지역의 현안에 그리 큰 관심이 없다. 유목민 같은 도시인들이, 그중의 특정 부류가, 우연히 어느 지역에 정착하면서 교육과 생활상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로 협력하여 생활문화 시스템을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 이것이 성미산 커뮤니티의 성격이다.
때문에 성미산마을은 완성태일 수가 없다. 마을은 영구적으로 변화할 것이며,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아니 예측하고 싶지 않다. 그게 무슨 소용인가! 단지 상상하고 꿈을 꿀 뿐인데. 우리 세대는 본능적으로 요람에서 무덤까지 스스로의 삶의 방식을 개척할 것이지만, 다음 세대에게 우리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라고 강요하지 않을 것이다. 다음 세대는 그들 스스로 새로운 삶의 방식을 만들어 갈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갈숲 cafe.daum.net/commune
(성미산마을 사람들은 수평적 소통을 위해 이름 대신 별명으로 서로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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