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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갯마루 넘다보니 동네 생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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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세상]
마을이야기 성미산마을 ② 1993년 가을, 한겨레신문에 도시 속에서지만 자연과 함께 자라는 아이들을 함께 키우는 어린이집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실렸다. 지금 준비중인데, 협동조합 식으로 조합원을 모집한다고 했다. 곧바로 전화를 돌렸다. 맞벌이를 하면서 또는 장애우를 키우면서도 아이를 제대로 키워보고 싶다는 절박감을 가진 이들이 우연처럼 모였다. 첫 번째 공동육아협동조합 우리어린이집은 그렇게 시작했다. 2010년, 그 어린이집이 16년째를 보내고 있다. 그때 함께 아이를 키우던 사람들과 그 후에 들어온 조합원들, 두 번째 공동육아협동조합인 날으는어린이집과 참나무어린이집의 조합원들이 합류하면서 지금 성미산마을 사람들의 토대가 형성되었다. 처음에 어린이집을 만들 때만 해도 이렇게 긴 시간을 이어가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육아부터 교육, 노인 돌봄까지 생애주기를 고려하는 마을의 틀이 갖춰지고, 극장과 방송국이 생기고, 생협에서 식당까지 필요한 경제활동이 이루어지는 마을은 꿈도 꾸지 못했다. 막상 살아온 현실은 교사들 급여 주는 일을 포함해 한해 한해 어린이집을 운영하기에도 급급했다. 적자를 메우기 위해 출자금을 감액했고, 전세로 들어 있는 어린이집 터전이 경매로 넘어가는 위기를 넘기고 나니 또다시 아이엠에프(IMF)라는 어려운 시기가 찾아왔다. 그때의 막막함이란. 그러나 어린이집 아이가 초등학교에 가자 방과후 어린이집이 만들어졌고, 아이들과 어른들의 안전한 먹을거리와 마을을 만드는 목표를 가진 생협이 생겨났고, 필요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일을 하다 보니 어느 순간 마을이 만들어져 있었다. 가끔 그럴 수 있었던 힘이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본다. 가장 큰 힘은 ‘이곳’에 정착하기로 결정했다는 것. 산과 들, 동네 곳곳이 공동육아의 터전이어서 우리는 아이를 키우며 마을에 익숙해졌고, 그 과정에서 마을의 소중함을 일찍이 알아 버렸다. 굳이 다른 곳으로 갈 필요가 없었다. 같이 아이를 키우는 ‘이 사람들’과 같이 이웃으로 사는 것만큼 즐거운 일은 없을 테니까. 또 하나, 이야기의 힘이 아닐지. 공동육아에서는 무엇을 결정하려면 모두가 합의할 때까지 이야기를 나눌 수밖에 없다. 어떤 사안이든 한 사람 한 사람의 조합원이 행동으로 나설 만큼의 동의를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실현될 수 없었다. 그런 경험이 쌓이면서 최소한의 동의의 수준에서라도 전원의 합의를 보는 의사결정구조가 자연스럽게 몸에 배었다. 아이들의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들은 부모들이 ‘회의’를 당연한 듯 생각하고, 자신들도 그리한다. 의사결정이 느리기는 하지만, 자신이 제안하고 동의한 일에 사람들은 몸으로 행동으로 그것을 실행에 옮길 이유를 찾는다. 거기서 마을의 행동이 가능해졌다. 마치 유전자처럼, 성미산마을에서는 누군가가 당장 닥친 일의 해법이나 해볼 만한 일들을 제안하면 그걸 이룰 수 있도록 돕는다. 공동육아를 통해서 어려움을 협동으로 해결해본 경험 덕에 힘을 모으면 가능하다는 낙관과 희망의 힘이 생긴 듯하다. 때로 일어나는 갈등들, 그리하여 떠나는 이들도 있고 숨는 이들도 있었다. 그렇지만, 어느 날 보면 다시 축제의 자리에서나 성미산 지키기의 댓글에서 그 친구들을 만나곤 한다. 함께하는 것이 힘들긴 하지만,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그것을 바라는 마음이 늘 있어서가 아닐까.올리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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