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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10.07 16:15 수정 : 2010.10.10 15:09

‘전국노래자랑’ 2005년. 경남 의령.

[매거진 esc] 한국의 사진가들

뉴욕 거리부터 ‘전국노래자랑’까지 인물사진 천착하는 변순철씨

사진가 변순철(41)씨가 찍은 사람들은 웃지 않는다. 무표정한 얼굴로 프레임에 고정되어 있다. 황량하다. 동양 여자와 백인 남자, 히스패닉 여자와 동양 남자, 흑인 남자와 백인 여자 등 도무지 어울리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커플’로 묶여 있다. 변씨는 그들에게 ‘짝-패’라는 이름을 달아주었다. 낭만적인 향기는 없다. 무표정의 미학이다. “무표정한 얼굴은 독립적인 감정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변씨는 말한다. 단일민족에서 성장한 한국의 사진가 변씨는 미국으로 건너가 다양한 인종의 삶에 놀랐다. 그들은 고독하고 쓸쓸해 보였다. “그들에게서 내 모습을 발견했어요. ‘액자 효과’처럼 그들의 얼굴에서 고독한 나를 만났어요. 또다른 나의 초상이 아닌가 생각했지요.” 이 사진들은 사진가의 내면 풍경에서 출발했다.

‘짝-패’ 2000년.

‘아이 투 아이-혜림’

뉴욕서 3년간 100명 이상 촬영…미국서 잔잔한 호평

‘짝-패’ 시리즈는 거대한 뉴욕에서 시작했다. 그는 그곳에서 외롭고 고독했다. 디자인을 공부하던 아내가 곁에 있었지만 자신에게 스며드는 원초적인 소외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사진작업에 대한 고민도 컸다.

30살에 거리를 걷다가 ‘짝-패’들을 만났다. 무심하게 옆을 지나가는 그들의 생경한 눈동자에서 자신을 발견했다. 그들에게 달려갔다. 어설픈 영어로 사진촬영을 부탁했다. 그들은 자그마한 동양 남자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거리에서, 그들의 침대에서 셔터를 눌렀다. 벗은 그들의 몸을 찍었다. 3년간 100명이 넘는다. 그 사진들은 2m가 넘은 커다란 한 장의 사진으로 세상에 나왔다. 현대사진에서 형식은 이미 내용의 일부분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미국 미술시장에서 잔잔한 호평을 받았다. 2000년에는 ‘ICP GROUP SHOW’전에 초청을 받아 전시도 했다. “미국에서 유명한 한 큐레이터가 내 작품을 보자고 해서 가져간 적 있었죠. 짝패를 3장 인화해서 가져가는 데 돈이 없어서 걷다가 버스를 타다가 고생을 좀 했죠. 사진이 커서.” 그는 가난했다. 뉴욕에서 처음 살았던 이스트 18번가는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의 갱들이 총질을 하는 곳이었다. 아래층 사람은 마약을 팔았고 옆집 사람은 싸움을 했다. 1년 동안 두 번 불이 났다. “옆집 불이 옮아온 건데 보상도 제대로 받지 못했죠.” 그는 고생을 고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진 찍는 행위와 사진가의 삶은 일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풍요로운 생활에서 고독하고 철학적인 사진은 나올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철저하게 빈센트 반 고흐가 되고 싶었다. 스스로를 가난으로 몰았다. “사진가는 결핍된 감정과 순간을 작업을 통해 폭발적으로 보여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Kid Nostilgia’ 1997년.

‘짝-패’ 1999년. 생경한 가족사진은 색다른 느낌을 전해준다.

2002년 유학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다. 2005년에 쌈지갤러리에서 ‘짝-패’ 시리즈를 전시했다. 반응은 뜨거웠다. 2주 연장 전시를 할 정도였다. 사람들은 전시장의 한쪽 벽을 모두 차지하는 사진의 크기에 놀랐다. 전혀 꾸미지 않은 솔직한 그의 사진에서 묘한 울림을 느꼈다. 알록달록하게 지나치게 꾸미고 매만진 사진과는 달랐다. 작업의 과정은 철저하게 사진 본연의 성질(있는 그대로를 재현)을 따르고 그 내용은 ‘개념미술’(conceptual art)을 담아냈다. 커플들을 ‘짝-패’로 개념화해서 현대인들의 고독과 상처를 드러냈다.

그의 고독은 이미 20대 초 죽음을 일찍 경험한 것에서 시작했는지 모른다. 대학 1학년 한 학기를 마치고 그는 군대를 갔다. 보초를 서다가 막사에서 불이 났다. 그는 화재 현장에서 주저앉은 막사에 깔렸다. 몸에는 불이 붙었다. 목숨은 건졌지만 척추를 다쳐서 위험한 고비를 여러 번 넘겼다. 사람 구실을 제대로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소리마저 들었다. “몸이 병들면 마음마저 병든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죠.” 그때 구원처럼 나타난 것이 ‘사진’이었다. 변씨의 형이 가져다준 몇 권의 사진집이 그의 인생에 희망을 담아주었다. 사진가가 되겠다는 꿈이 생겼다. 퇴원하고 무작정 생면부지 뉴욕으로 날아간 계기가 되었다.

영화 <기담> 포스터.

그는 고생스러웠던 뉴욕이 자신의 인생을 바꿨다고 말한다. ‘뉴욕 스쿨 오브 비주얼 아트’에서 예술의 무한한 가능성을 배웠다. 사진가 낸 골딘의 친구이기도 한 데이비드 암스트롱의 작업실에서는 새로운 것에 눈을 떴다. “삶을 대하는 태도를 배웠죠. 솔직함이 얼마나 사진작업에 중요한지 알았어요. 인물사진의 매력에 대해서도 눈을 뜨기 시작했어요.” 이전의 변씨의 사진은 “거리의 사진사”처럼 그저 보이는 이미지를 채집한 것들이었다. 울림도 느낌도 없었다.

그의 ‘아이 투 아이’(eye to I) 작업도 그 연장선상이었다. 표정이 없는 20대 청춘들이 바위 위에 올라가서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다. 흔들거리는 바위는 불안정한 대상이다. 그 위에 올라간 이들의 내면세계는 바위를 닮아 불안정했다. 변씨는 “인물을 찍는 일은 심리게임입니다. 긴장된 게임에서 (사진가가) 이겨야 원하는 사진작업이 이루어집니다. 드라마가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인물에 드러나는 빛은 작가의 심리를 말해줍니다.”

‘House-1508’ 2010년. 사진가 변씨의 책장. 각각의 책은 개별적이지만 책장 안에서는 하나의 형태가 된다.

<신기전> <쌍화점> <기담> 등 영화포스터 작업하기도

그는 요즘 새로운 인물들에게 몰입하고 있다. 매주 일요일 아침 방송되는 <한국방송>의 ‘전국노래자랑’에 출연한 사람들이다. “티브이를 보다가 깜짝 놀랐어요. 그들을 보면서 분출하고 싶은 욕망이 있다고 느꼈어요. 생경하면서 살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의상도 눈에 띄었어요.” 그는 2007년부터 ‘전국노래자랑’ 방송 현장을 찾아다녔다. 촬영장 옆에 조명을 설치해놓고 노래가 끝나 뛰어내려오는 이들을 붙잡고 사진을 찍었다. 시골 아낙네나 철물점 아저씨들을 설득했다. “사회성을 갖고 시작한 첫 작업”이었다고 변씨는 말한다. 이 작업들은 곧 발표될 예정이라고 한다. 변씨의 밥벌이는 주로 영화포스터 촬영이다. <신기전>, <쌍화점>, <기담> 등 우리에게 익숙한 이미지가 그가 찍은 것들이다.

사진가 변순철씨
그는 “주관은 아름답습니다. 우리는 어색해하지요. 사진가는 그 주관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사람들이죠”라고 말한다. 사실성을 바탕으로 한 그만의 주관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궁금하다. <끝>

글 박미향 기자 mh@hani.co.kr

사진 제공 변순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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