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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11.04 11:33 수정 : 2010.11.04 11:33

[매거진 esc] esc를 누르며

여고시절, 같은 반 여학생으로부터 집중적인 애정공세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연애편지 같은 쪽지며 선물을 넙죽넙죽 받아먹었지만, 결코 그 아이의 사랑을 받아들여서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우리 반에서 가장 덩치가 큰 ‘짱’이었고 저는 반에서 가장 작은 아이였기에 ‘울며 겨자 먹기’였죠. 떡 벌어진 어깨로 학교의 문제아 군단을 이끌고 다니며 소란을 피우는 그 아이의 사랑을 누군들 거부할 수 있었을까요? 고교 졸업 뒤 그 아이를 시내에서 마주친 적이 있습니다. 아슬아슬한 상의에 초미니스커트, 긴 생머리를 휘날리며 한 남자의 품에 안겨 있더군요. 어제는 나에게 사랑을 속살거리더니 오늘은 다른 남자의 품에서 놀고 있는 폼이라니! ‘어찌 너의 사랑은 이리도 가볍단 말인가’ 하고 통탄했더랍니다.

대학시절 하숙집에서 유난히 저에게 잘해주던 선배 언니가 있었습니다. 작고 귀여운 용모의 그 언니는 제가 밤늦게 귀가할 때면 방 문고리에 단팥빵과 우유를 넣은 검은 봉지를 걸어놓곤 했습니다. 그 언니는 가끔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남자친구에 대한 뒷담화를 참새처럼 종알거렸고, 저는 사귀고 있던 남자친구에 대한 뒷담화로 맞장구를 치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하숙집을 옮기게 됐고, 언니는 제가 떠나기 전날 함께 밤새 수다를 떨고 같이 잠을 자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날 밤 거창한 수다도 잊지 못할 대화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새벽에 이상한 느낌이 들어 잠을 깼는데 그 언니가 자고 있는 제 입술을 훔치고 있더군요. 저는 계속 자는 척을 하며 몸을 반대편으로 돌렸습니다. 그 언니는 한참을 저를 응시하더니 한숨을 쉬고 잠을 청하더군요.

이런 경험 탓인지, 동성애와 이성애가 손바닥 뒤집기 정도의 차이이거나 혹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돼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내추럴 본 동성애도, 내추럴 본 이성애도 없고, 다만 사랑과 배신 그리고 눈물과 한숨이 있을 뿐이라고. 그래서 6면에 실린 커밍아웃 영화감독 김조광수씨의 사연도, 제 사연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고 생각됩니다.

김아리 팀장 a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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