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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온조리한 삼겹살과 항정살 듀오’ 수비드를 이용해서 만든 고기요리. 겉은 바삭하고 안은 부드럽다(왼쪽).부드러운 아이스크림도 복잡한 기계 작업을 거쳐서 나온다(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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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맛있는 음식에 숨겨진 재미난 과학원리들
11월29일 오후 3시 서울의 한 레스토랑. 점심나절 불나방처럼 달려들던 식객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정적이 감돈다. ‘닫음’ 팻말이 붙은 레스토랑 안의 인간이란, 이발소에 걸린 명화처럼 어색한 존재다. 떫은 공기를 깨뜨린 이는 요리사 토미 리(36·‘비스트로 드 욘트빌’의 요리사)였다. 약속시간보다 10분 늦게 나타났지만 반갑기만 하다. 작고 다부진 몸매에 빠른 부산 억양으로 ‘미안해요’를 외치는 모습이 밉지 않다. 이제부터 들을 그의 주방 이야기에 비하면 10분쯤이야! 그는 특이한 방법으로 삼겹살구이를 한다. 그릴에 굽는 것도, 높은 화력의 팬에 볶는 것도 아니다. 지글지글 소리도 없다. 썰고 볶고 지지고 끓이는 그의 주방에서 삼겹살은 도대체 어떤 일을 겪는 것일까? “얘기하기 전에 이 책부터 보는 게 좋을 깁니더.” 후다닥 두꺼운 책을 가져온다. 토머스 켈러(미국의 세계적인 요리사)의 각종 요리법이 세련된 사진들과 함께 빽빽하게 적힌 책이다. “이 사진부터 보시죠.” 2장의 사진 속에 요리법이 숨어 있었다. 첫 번째 사진은 진공포장된 식재료다. 다른 사진은 진공포장된 식재료가 수비드(sous-vide·저온진공조리법)의 기계 안에서 마치 바닷속을 유영하는 물고기처럼 흐느적거리는 사진이었다. 아! 바로 이거로군. 그의 삼겹살들이 겪는 여정이. 그의 삼겹살은 하루 정도 소금과 설탕이 녹아 있는 물에 잠겨 있다가 진공포장된다. 이때 당근과 육수도 함께 포장된다. 삼겹살은 따끈한 물이 가득한 수비드 기계에 12시간 갇혀 있다. 무려 12시간이다. 이 긴 시간 삼겹살은 본성이 원래 야들야들했다는 듯이 변한다. 속죄한 장발장이 따로 없다. 딱딱했던 삼겹살이 더없이 ‘부드러운 놈’으로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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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비드 기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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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크림 기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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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걀을 삶을 때도 과학의 원리가 숨어 있다. 자, 달걀을 삶아보자. 크기와 종류에 따라 결과는 조금씩 달라지겠지만. 가스레인지 위에서 달걀의 길고 험한 여정이 시작된다. 예상한 결과가 굴욕의 늪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집중해야 한다. 서서히 물의 온도가 올라간다. 40도가 넘는 순간 달걀의 단백질이 변하기 시작한다. 75도가 넘어서면 달걀은 익어간다. 반숙(걸쭉한 액체)과 완숙(고체)을 결정하는 것은 열을 가하는 시간이다. 이런 원리를 잘 이해한다면 냉장고에 오래 보관했던 달걀은 삶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상온에 있던 달걀보다 차다. 삶을 때 달걀이 단단해지는 것은 단백질의 화학작용 때문이다. 팬에 고기를 구울 때 고기가 눌어붙어 고생한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다. 높은 온도에서 단백질과 금속은 화학적으로 반응한다. 고소한 고기 냄새도 화학반응 때문이다. 고기 단백질은 약 140도 이상의 고열에서 가열하면 화학반응이 일어난다. 큰 단백질 분자가 더 작은 휘발성 분자로 분해된다. 고기 냄새다. 과학실험과도 같은 요리의 세계 조리기구 속에도 과학적 원리가 숨어 있다. 뜨거운 국물요리를 만들 때 무심코 쇠로 된 주걱으로 저으면 ‘앗! 뜨거워’ 외치게 된다. 대부분의 금속은 열전도율이 높다. 나무로 만든 주걱을 쓰는 요리사들이 많다. 최근 스테인리스스틸 주방용구가 인기인 이유도 열전도성이 낮기 때문이다. 칼은 도마보다 단단한 재질이 낫다. 그렇지 않으면 칼날이 금세 망가진다. 요리가 현대화되면서 주방 구조도 과학적인 시스템으로 변했다. 당연하다. 온종일 서 있는 ‘무림혈투의 장’에서 요리사는 힘을 아껴야 한다. 조리기구의 변천 과정을 살펴보면 재미있는 기록이 많다. 중세시대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재미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누구보다 주방과 조리기구의 과학화에 열정을 쏟았다. 그의 요리서, <레오나르도 다빈치, 한 천재의 은밀한 취미>를 보면 그가 만든 주방기구들은 희한하다. 사람의 손을 거치지 않고 주방 밖에 쌓아둔 장작을 화덕으로 바로 옮길 수 있는 기계 같은 것들이었다. 프로펠러를 이용한 자동석쇠도 만들었다. 우리는 정성을 쏟은 요리를 맛본다. 이 자연스러운 과정은 실험이 끝난 뒤 결과를 분석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요리 속에 과학이 숨어 있다. 글·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참고 자료 <요리의 과학>(피터 바햄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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