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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철도가족사진공모전'에 당선된 방현석씨의 경춘선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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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김작가가 미리 타본 춘천가는 마지막 기차
가수 김현철의 데뷔곡 ‘춘천 가는 기차’를 리메이크했던 이한철은 말한다. “나는 대구에서 대학을 다녀서 잘 모르겠어. 경춘선도 타본 적 없고. 그런데 서울에서 대학 다녔던 애들은 다들 경춘선, 하면 특별한 뭔가가 있다고 하더라고.” 그랬다. 경춘선은 고등학교 때까지는 ‘로망의 철도’였고, 대학에서는 엠티라는 일탈로 향하는 기차였다. 그 뒤로는 추억의 노선이었다. 그 시절을 생각하며 기차를 타볼 생각도 몇 번 정도 했다. 하지만 추억의 되새김이란 대부분 마찬가지. 시간이 없거나 ‘부지런’이 없었다. 어쩌다가 강원도에 갈 일이 생기면 차 있는 친구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마음먹고 여행 계획을 세울 때의 행선지는 늘 외국이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추억을 곱씹는 일도 점점 줄어들었다. 그렇게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아니, 어른이 되었다~ 글 칼럼니스트 김작가 noisepop@hanmail.net, 사진 제공 코레일갑자기 경춘선 기차 여행을 하기로 한 건, 경춘선 운행이 없어진다는 소식을 들은 뒤였다. 2010년 12월20일 밤 10시3분 청량리발 춘천행 무궁화호 열차가 마지막이라는 것. 술자리 작당이었다. “경춘선 사라지기 전에 한번 타봐야지?” “추억 돋네! 그러자!” 술김에 몇 명이 의기투합을 했다. 취중 약속은, 그러나 다음날 아침이면 숙취와 함께 사라지기 마련. 경춘선 여행은 언제나 그랬다. 몇 명은 펑크내고, 한두 명을 제외한 모두가 지각을 하는 게 당연한 절차였다. ‘코리안 타임’의 마지막 방어선이었다고나 할까. 지난 7일 늦잠에서 깬 후 일부 작당한 이들에게 전화를 돌렸으나 아무도 받지 않았다. 오히려 그 자리에 없었던, 그러나 역시 술김에 전화를 걸어 같이 가자고 꼬셨던 칼럼니스트 허지웅에게 문자가 잔뜩 와 있었다. 왜 나타나지 않는 거냐는. 부리나케 약속 장소로 달려갔다. 옛날에도 종종 그랬던 것 같긴 하다. 남자 둘이 기차 여행이라니, 왠지 홍상수 영화스러워질 것 같다는 얘기를 하며 청량리역으로 향했다. 확 바뀐 청량리역 광장엔 엠티꾼들 없었네 청량리역은 언제나 엠티로 가는 첫 관문에 다름 아니었다. 역 광장에 있는 시계탑 주변은 엠티 철이 되면 바리바리 짐을 싸든 또래 대학생들로 가득 차곤 했다. 공대생들은 여대생들을 힐끗거리곤 했다. 여대생들 역시 그 시선을 의식했는지, 남녀가 적절히 섞인 무리들에 비하면 왠지 조신해 보였다. 눈 돌릴 일 없는 남녀혼성팀은 그러거나 말거나, 그냥 아직 도착하지 않은 일행과 출발시간을 기다릴 뿐이었다. 그런 풍경은, 사라지고 없었다. 평일인데다가 엠티 철도 아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스팔트 광장과 시계탑 그리고 단층의 옛 건물로 이뤄진, 그러니까 기억 속의 청량리역이 온데간데없어지고 서울역·용산역이랑 똑같이 생긴 유리 궁전이 위엄을 과시하고 있었던 거다. 청량리역에서 멀지 않은 동네에 잠시 살았던 2000년대 중반에도 분명히 있었는데. 듣자 하니 2007년 철거가 시작되어 올여름에야 지금의 꼴을 완전히 갖춘 모양이다. 역도 커지고 대합실도 그만큼 넓어졌으니 그 뒤로 엠티 가는 대학생들은 굳이 시계탑 앞에서 모일 필요가 없어졌을 것이다. 바글대던 광장과 단층 역사가 주는 운치 또한 마찬가지일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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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왼쪽부터 1981년 춘천역, 1984년 경춘선에 무궁화호 첫 운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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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명동 서울 같고 강촌역엔 모텔 불빛만 갓 스무살을 넘긴 여학생들은 그렇게 첫 엠티를 술김에 울음바다로 만들었다. 그 순간은 또 누군가에게는 기회였다. 달래준다는 명목하에 사모하던 친구를 밖으로 끌고 나갔다. 북한강변에 앉아 얘기를 들어주는 척하다가 슬쩍 속마음을 꺼냈다. 열에 아홉은 거절당했다. 평소에 운이라도 띄워놨어야 할 텐데 대부분은 난데없이 들이대는 거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쿨하고 시크하게 거절을 받아넘기면 좋을 텐데 그러기엔 그들도 취해있었다. 내가 얼마나 걔를 좋아했는데, 하며 친구를 붙잡고 다 큰 사내놈이 엉엉 울었다. 노래판이 벌어지거나 말거나, 울음바다가 펼쳐지거나 말거나, 커플들은 진작 빠져나가 심야의 밀회를 즐겼다. 강촌역 건물에 이름과 더불어 ‘♡’를 새길 자격을 부여받은 축복의 종족들이었다. 그런 강촌역의 풍경 역시 애저녁에 사라졌다. 2000년대 들어 민박은 펜션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대학 공동체가 붕괴되면서 엠티 참가 인원도 급격히 줄어든 탓에 백여명씩 들어가던 방은 없어지고 최대 30명 정도가 한방에 숙박 가능하다. 김밥집부터 닭갈비집까지, 강촌 유원지 일대에는 식당과 술집이 빼곡하고 러브호텔의 간판이 강촌의 밤을 밝힌다. 새로 정비된 자전거도로와 북한강 지류 사이에는 바리케이드가 쳐져 단체로 발 담그고 노는 여유를 불허한다. 그나마도 4대강 공사의 일환으로 석축 쌓는 공사가 한창이다. 현 강촌역에서 막개발된 거리를 15분 정도 따라 내려가면 새로운 강촌역이 보인다. 그 앞뒤로 산에 터널을 뚫고 연결된 복선 철도가 깔려 있다. 공사현장 일대 이곳저곳에 흙더미가 고분처럼 쌓였다. 눈 덮인 그 흙더미들이 꼭 추억의 무덤처럼 보였다. 하늘이 북한강에 비를 더하는 밤이었다. 춘천 가는 마지막 기차는 20일 밤 10시3분에 떠난다. 전철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개발논리에 밀려 변해버린 추억의 공간들을 이었던 기차도 영원히 사라진다. ※ ‘춘천 가는 기차’의 진실 경춘선을 상징하는 노래는 김현철의 ‘춘천 가는 기차’다. 이 노래의 배경은 사실 춘천이 아니라 강촌이다. 재수생 신분이었던 김현철은 1988년 5월 학원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친구들과 비둘기호 타고 춘천 여행을 떠났다. 비둘기호로 춘천까지는 재수생에게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렸고 너무 예쁜 풍경에 끌려 강촌에서 내렸다. 그때 그 기분을 잊지 못해 같은 해 11월, 눈 내리던 강촌에 다시 가게 됐고 그때 그 기분을 노래로 쓴 게 ‘춘천 가는 기차’다. 그러니까 스무살 때 만들었던 노래라는 얘기. 경춘선이 물러나면 다른 스무살의 음악인이 ‘춘천 가는 전철’이란 노래를 만들어 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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