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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12.16 13:53 수정 : 2010.12.18 10:18

2006년 '철도가족사진공모전'에 당선된 방현석씨의 경춘선 사진.

[매거진 esc] 김작가가 미리 타본 춘천가는 마지막 기차

가수 김현철의 데뷔곡 ‘춘천 가는 기차’를 리메이크했던 이한철은 말한다. “나는 대구에서 대학을 다녀서 잘 모르겠어. 경춘선도 타본 적 없고. 그런데 서울에서 대학 다녔던 애들은 다들 경춘선, 하면 특별한 뭔가가 있다고 하더라고.” 그랬다. 경춘선은 고등학교 때까지는 ‘로망의 철도’였고, 대학에서는 엠티라는 일탈로 향하는 기차였다. 그 뒤로는 추억의 노선이었다. 그 시절을 생각하며 기차를 타볼 생각도 몇 번 정도 했다. 하지만 추억의 되새김이란 대부분 마찬가지. 시간이 없거나 ‘부지런’이 없었다. 어쩌다가 강원도에 갈 일이 생기면 차 있는 친구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마음먹고 여행 계획을 세울 때의 행선지는 늘 외국이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추억을 곱씹는 일도 점점 줄어들었다. 그렇게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아니, 어른이 되었다~

글 칼럼니스트 김작가 noisepop@hanmail.net, 사진 제공 코레일


갑자기 경춘선 기차 여행을 하기로 한 건, 경춘선 운행이 없어진다는 소식을 들은 뒤였다. 2010년 12월20일 밤 10시3분 청량리발 춘천행 무궁화호 열차가 마지막이라는 것. 술자리 작당이었다. “경춘선 사라지기 전에 한번 타봐야지?” “추억 돋네! 그러자!” 술김에 몇 명이 의기투합을 했다. 취중 약속은, 그러나 다음날 아침이면 숙취와 함께 사라지기 마련. 경춘선 여행은 언제나 그랬다. 몇 명은 펑크내고, 한두 명을 제외한 모두가 지각을 하는 게 당연한 절차였다. ‘코리안 타임’의 마지막 방어선이었다고나 할까. 지난 7일 늦잠에서 깬 후 일부 작당한 이들에게 전화를 돌렸으나 아무도 받지 않았다. 오히려 그 자리에 없었던, 그러나 역시 술김에 전화를 걸어 같이 가자고 꼬셨던 칼럼니스트 허지웅에게 문자가 잔뜩 와 있었다. 왜 나타나지 않는 거냐는. 부리나케 약속 장소로 달려갔다. 옛날에도 종종 그랬던 것 같긴 하다. 남자 둘이 기차 여행이라니, 왠지 홍상수 영화스러워질 것 같다는 얘기를 하며 청량리역으로 향했다.

확 바뀐 청량리역 광장엔 엠티꾼들 없었네

청량리역은 언제나 엠티로 가는 첫 관문에 다름 아니었다. 역 광장에 있는 시계탑 주변은 엠티 철이 되면 바리바리 짐을 싸든 또래 대학생들로 가득 차곤 했다. 공대생들은 여대생들을 힐끗거리곤 했다. 여대생들 역시 그 시선을 의식했는지, 남녀가 적절히 섞인 무리들에 비하면 왠지 조신해 보였다. 눈 돌릴 일 없는 남녀혼성팀은 그러거나 말거나, 그냥 아직 도착하지 않은 일행과 출발시간을 기다릴 뿐이었다.

그런 풍경은, 사라지고 없었다. 평일인데다가 엠티 철도 아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스팔트 광장과 시계탑 그리고 단층의 옛 건물로 이뤄진, 그러니까 기억 속의 청량리역이 온데간데없어지고 서울역·용산역이랑 똑같이 생긴 유리 궁전이 위엄을 과시하고 있었던 거다. 청량리역에서 멀지 않은 동네에 잠시 살았던 2000년대 중반에도 분명히 있었는데. 듣자 하니 2007년 철거가 시작되어 올여름에야 지금의 꼴을 완전히 갖춘 모양이다. 역도 커지고 대합실도 그만큼 넓어졌으니 그 뒤로 엠티 가는 대학생들은 굳이 시계탑 앞에서 모일 필요가 없어졌을 것이다. 바글대던 광장과 단층 역사가 주는 운치 또한 마찬가지일 테고….



사진 왼쪽부터 1981년 춘천역, 1984년 경춘선에 무궁화호 첫 운행.
비둘기호는 너무 오래 걸렸다. 무궁화호는 너무 비쌌다. 편의와 경제성, 그 중간에 통일호가 있었다. 학생들은 그래서 통일호를 타고 대성리, 강촌, 청평, 춘천으로 향했다. 예나 지금이나 엠티의 명소들이다. 학교는 달랐어도 기차 안에서의 모습들은 비슷했다. 무심히 창밖을 바라보고 가는 학생은 대략 복학한 고학번 선배들이었다. 신입생들은 죽어라고 게임을 하면서 객실을 소란스럽게 했다. 그 와중에 누군가 통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시작하면 게임은 곧 멈췄다. 1990년대 초중반에는 김광석, 윤종신, 김현철 같은 가수들의 노래가 주로 독창으로 시작되어 합창으로 향하는 애창 레퍼토리였다. 기타도 좀 치고 노래까지 잘하는 친구들은 그 순간을 기다렸다. 담배 한 대 피우러 객실과 객실 사이로 나가면 다른 학교 여학생이 슬며시 따라 나와 연락처(대부분 집전화, 잘하면 삐삐번호)를 주고받는 행운을 노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평소라면 꿈도 못 꿀 일이었지만, 엠티라고 하는 ‘허용된 외박’의 시간과 기차 옆을 수려히 흐르는 북한강의 풍경이 그런 용기를 북돋았을 터다. 객실 안에서 고성방가를 하고, 통로에서 흡연이 가능했던 시절도 비둘기호와 통일호가 차례로 사라지면서 함께 사라졌다. 그런 추억담을 나누며 허지웅과 나는 대성리, 강촌역을 아이폰으로 찍어 트위터에 전송하면서 남춘천역으로 향했다.

담배 피우던 객실통로 설레던 즉석 만남

출발 후 약 2시간, 기차에서 내렸다. 짠한 모습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 춘천102보충대에서 훈련을 마치고 자대로 향하기 위해 줄지어 더플백을 메고 있는 신병들이 눈에 띄었던 거다. 서울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휴가병사들에게서는 결코 느껴지지 않았던 연민이, 춘천에서 마주친 신병들을 보며 절로 샘솟았다. 지구 종말을 코앞에 둔 것처럼 2년 뒤는커녕, 당장 내일도 결코 오지 않을 것만 같은 불안감. ‘부모님한테 좀더 잘할걸’이라는 후회를 살짝 덮는, 여자친구에 대한 그리움. 뭐 그런 오만 가지 감정을 건국 직후의 신병들과 마찬가지로 저들도 고스란히 가진 채 오와 열을 맞춰 서 있었을 것이다. 춘천 중앙시장에서 닭갈비를 뜯으며 낮술을 마시면서도 그 느낌이 영 지워지지 않았나 보다. 허지웅과 나는 알고 지낸 지 처음으로 내내 군대 얘기를 하면서 태양을 서산으로 보냈다.

춘천까지 왔으면 그래도 낭만을 곱씹어야 했을 텐데 그러지 못한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10여년 만에 방문한 춘천에서 옛 정취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군대 가기 전, 객기를 벗삼아 홀로 떠났던 무전여행의 첫 행선지가 바로 춘천이었다. 막차를 타고 무작정 춘천으로 가 강원대학교 휴게실 자판기의 열에 기대 잠을 청했다. 다음날 아침, 뻐근한 몸을 추스르며 길을 나섰다. 안개가 살짝 낀 95년 가을의 춘천 시내는 그림 같았다. 한산한 차도 옆에 아담한 단독주택들이 늘어서 있었다. 차분한 격조가 도시 가득했다. 그 모습의 일부라도 느낄 수 있기를 바랐다. 낭패였다. 춘천의 명동은 서울의 명동을 그대로 빼다 박은 듯했다. 밤의 소양강 근교는 모텔과 식당, 술집의 간판 불빛이 점령하고 있었다. 닭갈비를 먹으려고 온 것만은 아니었는데. 비슷비슷한 여자 연예인들의 얼굴을 보는 기분이었다. 열애설에 휩싸인 걸그룹 멤버 팬의 심정으로, 울며 외치고 싶었다. 나의 춘천은 이렇지 않아!

사흘 뒤인 지난 10일 다시 경춘선에 올랐다. 이번에는 혼자. 목적지는 강촌이었다. 춘천에 가며 언뜻 본 강촌의 풍경은 그래도 옛 모습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경춘선의 아름다운 경치 중 으뜸 하면 강촌이 아니었던가. 강마을이라니, 일단 이름은 또 얼마나 예쁜가. 엠티의 로망이 강촌이었던 건 그래서였다. 대성리는 가까운 맛에 가고, 춘천이 끝까지 가는 맛에 가는 거였다면 강촌은 청춘의 ‘화양연화’ 같은 엠티 장소였다. 아니, 엠티뿐만 아니라 연인의 첫 여행지도 강촌은 단골 마을이었다. 그래서 강촌역에는 사방팔방, 낙서투성이였다. 무슨 대학 무슨 과가, 무슨 무슨 친구들이, 남자와 여자가 경쟁이라도 하듯 이름을 남겼다. 오죽 낙서가 많았으면 아예 2008년에는 그라피티 아티스트들을 불러 역사를 그라피티로 도배할 정도에 이르렀다. 그 모든 낙서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사다리를 갖고 올라가지 않는 한 도달하지 못할 높은 곳에도 누군가의 이름들이 빼곡했다. 아이폰 땅따먹기 앱인 포스퀘어의 오프라인 버전이랄까. 그리 많은 이름이 남아 있는 이유는, 역시 많은 추억들이 강촌의 역사를 만들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도착하면 늘 배가 고팠다. 예정대로 출발했다면 딱 점심을 맞출 수 있었겠으나 역시 늦게 오는 녀석들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수십명이 한꺼번에 들어갈 수 있는 민박집 방에 짐을 부리고, 일단 주인에게 ‘고무 다라이’를 빌렸다. 25도 진로 소주를 박스째 ‘히야시’ 시켜놓기 위해서다. 대충 조를 짜서 밥을 지어 먹었다. 요리를 제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 밥은 되거나 질고, 반찬이라고는 있는 재료 모두 때려 넣어 끓인 찌개가 전부였다. 식사 후에 커플들은 짝지어 자전거를 타거나 산책을 하고, 나머지는 어여 해가 지기만을 기다리며 온갖 잉여로운 짓으로 시간을 보냈다. 어둠이 깔리면 본격 술판이 시작됐다. 다른 목적은 필요 없었다. 오직 마시기 위해 마셨다. 그냥 마시면 진도가 느리니까, 선조들이 만들어 놓은 온갖 게임을 하며 마시고 또 마셨다. 다들 취할 무렵, 누군가는 기타를 치며 노래판을 주도했다. 김현식의 ‘넋두리’ 같은 애간장 끓는 노래라도 할라치면 또 누군가는 울먹였다. 노래가 슬퍼서가 아니라, 짝사랑하는 오빠 얘기를 친구에게 털어놓다가 울었다. 듣던 친구도 울었다. 친구들이 우니까 따라 울었다.


<한국철도요람집>(1993년)에 실린 90년대 초 대성리역과 백양리역, 2010년 경강역.
춘천명동 서울 같고 강촌역엔 모텔 불빛만

갓 스무살을 넘긴 여학생들은 그렇게 첫 엠티를 술김에 울음바다로 만들었다. 그 순간은 또 누군가에게는 기회였다. 달래준다는 명목하에 사모하던 친구를 밖으로 끌고 나갔다. 북한강변에 앉아 얘기를 들어주는 척하다가 슬쩍 속마음을 꺼냈다. 열에 아홉은 거절당했다. 평소에 운이라도 띄워놨어야 할 텐데 대부분은 난데없이 들이대는 거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쿨하고 시크하게 거절을 받아넘기면 좋을 텐데 그러기엔 그들도 취해있었다. 내가 얼마나 걔를 좋아했는데, 하며 친구를 붙잡고 다 큰 사내놈이 엉엉 울었다. 노래판이 벌어지거나 말거나, 울음바다가 펼쳐지거나 말거나, 커플들은 진작 빠져나가 심야의 밀회를 즐겼다. 강촌역 건물에 이름과 더불어 ‘♡’를 새길 자격을 부여받은 축복의 종족들이었다.

그런 강촌역의 풍경 역시 애저녁에 사라졌다. 2000년대 들어 민박은 펜션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대학 공동체가 붕괴되면서 엠티 참가 인원도 급격히 줄어든 탓에 백여명씩 들어가던 방은 없어지고 최대 30명 정도가 한방에 숙박 가능하다. 김밥집부터 닭갈비집까지, 강촌 유원지 일대에는 식당과 술집이 빼곡하고 러브호텔의 간판이 강촌의 밤을 밝힌다. 새로 정비된 자전거도로와 북한강 지류 사이에는 바리케이드가 쳐져 단체로 발 담그고 노는 여유를 불허한다. 그나마도 4대강 공사의 일환으로 석축 쌓는 공사가 한창이다. 현 강촌역에서 막개발된 거리를 15분 정도 따라 내려가면 새로운 강촌역이 보인다. 그 앞뒤로 산에 터널을 뚫고 연결된 복선 철도가 깔려 있다. 공사현장 일대 이곳저곳에 흙더미가 고분처럼 쌓였다. 눈 덮인 그 흙더미들이 꼭 추억의 무덤처럼 보였다. 하늘이 북한강에 비를 더하는 밤이었다.

춘천 가는 마지막 기차는 20일 밤 10시3분에 떠난다. 전철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개발논리에 밀려 변해버린 추억의 공간들을 이었던 기차도 영원히 사라진다.

※ ‘춘천 가는 기차’의 진실

경춘선을 상징하는 노래는 김현철의 ‘춘천 가는 기차’다. 이 노래의 배경은 사실 춘천이 아니라 강촌이다. 재수생 신분이었던 김현철은 1988년 5월 학원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친구들과 비둘기호 타고 춘천 여행을 떠났다. 비둘기호로 춘천까지는 재수생에게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렸고 너무 예쁜 풍경에 끌려 강촌에서 내렸다. 그때 그 기분을 잊지 못해 같은 해 11월, 눈 내리던 강촌에 다시 가게 됐고 그때 그 기분을 노래로 쓴 게 ‘춘천 가는 기차’다. 그러니까 스무살 때 만들었던 노래라는 얘기. 경춘선이 물러나면 다른 스무살의 음악인이 ‘춘천 가는 전철’이란 노래를 만들어 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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