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영국 런던 웨스트엔드의 쇼핑가 리젠트 거리의 밤 풍경. (김형렬 제공)
|
[매거진 esc] 김형렬의 ‘좌충우돌’ 트래블 기어
“이얍~” 런던 유흥가 뒷골목에서 태권도 한 사연 삼십 중반을 지날 즈음, 집 떠나서 딱 삼일만 지나면 허기가 졌다. 일주일 걸려도 다 못 본다는 박물관, 500년 된 작품을 소장했다는 미술관, 무슨 로열패밀리가 살고 있다는 으리으리 궁전, 지상 최대의 폭포, 이런 것들이 다 시들해졌다. “내가 드디어 여행과 이별해야 하는 때구나!” 아, 세상을 혼자 느껴서 채우는 것은 불가능하도다. 마음이 서늘해지는 순간 남자의 가슴에 다가오는 것. 바로 로맨스 아니었던가! 런던의 11월 날씨는 차갑고 싸늘하다. 4시만 넘어서면 어두워진다. 밤이 시작되면 네온사인과 가로등과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뒤섞인다. 이때쯤이면 ‘피커딜리 서커스’에서 ‘리젠트 스트리트’를 따라 ‘옥스퍼드 스트리트’에 이르는 길은 벌써부터 성탄절과 연말연시를 부르는 장식과 캐럴이 쇼윈도를 장악해간다. 줄리아 로버츠가 들락거린 그 모퉁이 책방 ‘노팅힐’,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 얘기만 모아놓은 ‘러브 액츄얼리’, 그렇고 그런 애정행각의 반복 속에 옛사랑을 되찾는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 이 영화들의 공통점은, 런던에만 가면 어디선가 근사한 로맨스가 기다리고 있을 듯한 여운을 남긴다는 것. 영화 장면을 떠올리며 혼자 걷는 웨스트엔드에는 비가 오락가락했다. 펍들이 펼쳐놓은 거리 테이블에선 손님들이 떠들고 웃고 난리들이다. 슬쩍 들여다본 홀 안 ‘엘시디 티브이’에는 프리미어리그가 한창이다. 혹시 ‘팍 지쑹 얘기라도?’ 괜한 상상을 하다가 돌아서는데, 길 건너편 쪽의 분홍빛 형광등이 눈에 들어왔다. ‘Pink Earth.’
|
웨스트엔드 한 극장의 뮤지컬 ‘캣츠’ 공연 장면. (김형렬 제공)
|
|
웨스트엔드의 명소 ‘피커딜리 서커스’.(김형렬 제공)
|
스칼릿 조핸슨은 사기꾼으로 변해 있었다. 나는 현찰 50파운드 이상은 절대 낼 수 없다고 했고, 사기꾼이 된 그녀는 신용카드로라도 계산하라고 윽박질렀다. 입구에서 눈인사를 했던 그 흑인 하녀가 왔다. 나를 좀 보잔다. 따로 보자는 사람치고 겁나는 사람 없다. 처음 들어왔던 문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사기꾼 스칼릿도 따라왔다. 이 두 여자, 갑자기 내 몸을 더듬기 시작한다. 주머니의 지갑을 타깃으로 흑녀와 백녀의 보디 공격! “돈 터치! 돈 터치, 마이 보디!” 여느 때라면 기뻐했어야(?) 할 두 여우의 손끝을 사지를 총동원해 필사적으로 막으려는 찰나, 또다른 덩치가 등장했다. 2m는 족히 돼 보이는 프랑켄슈타인이다. 서부극에서 나오는, 박차가 달린 부츠를 신고 별이 그려진 검은 가죽 점퍼를 입었다. 얼굴 한쪽에 칼로 그은 듯한 흉터까지. 하녀와 가짜 스칼릿이 뒷짐을 지고 프랑켄슈타인과 함께 내 앞에 섰다. 머리카락이 쭈뼛쭈뼛해진다. 무엇을 할 것인가? 돈을 줘야 하나? 총이라도 나오면 어쩌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전의를 상실해가는 걸 느끼면서도 프랑켄슈타인이 지키고 선 계단 위쪽을 쳐다보았다. 고지가 바로 저긴데. 마지막 남은 방법이다. 태권도 팔계 일장을 시작했다. “이얍!” 소리와 함께 주먹을 허공에 내지르고, 발길질도 해댔다. 반은 울부짖는 소리로 기합을 넣었다. “이놈들아! 나 좀 풀어줘!” 소리를 꽥 질렀다. 흑인 하녀, 사기꾼 스칼릿 조핸슨, 프랑켄슈타인이 멈칫하며 한발짝 물러난다. 가만히 보니 이 프랑켄슈타인은 영어를 잘 알아듣지 못했다. 말도 못 알아듣고 태권도도 모르는, 덩치만 큰 풀빵이었다. 마침내 하녀가 “그를 놔줘!”라고 소리치자, 프랑켄슈타인은 눈을 껌벅거리며 비켜섰다.
|
김형렬의 ‘좌충우돌’ 트래블 기어
|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