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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카스텐. 왼쪽부터 드럼 이정길, 베이스 김기범, 기타·코러스 전규호, 기타·보컬 하현우. 사진 박미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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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카스텐·디어클라우드·허클베리핀·바셀린…홍대앞 인디밴드들이 사는 법
누구나 라면을 먹는다. 그런데 라면 먹는 모습만 나온다. 젊은 독신 상당수가 반지하에 산다. 유독 그들만 반지하에 사는 것처럼 그려진다. 인디음악인들 얘기다. 90년대 중반 이 땅에 ‘인디’라는 말이 등장한 이래 그들의 삶을 이야기할 때는 언제나 가난이 꼬리표처럼 따라붙곤 했다. ‘어두운 반지하에서 라면을 먹지만 음악이 있어 행복하다.’ 그런 기사가 나올 때마다 그들은 고개를 가로젓곤 한다. 그렇다면 인디뮤지션들은 무엇으로 사는가? 한마디로 말할 수 없다. 말해서도 안 된다. 회사의 말단 직원과 회장의 삶이 다르듯 여러 층위가 존재한다. 음악만으로 어느 정도 생활이 가능한 층이 있고, 부업을 하는 경우가 있다. ‘안 벌고 안 쓰자’는 일념으로 검박한 삶을 영위하는 이들도 있다. 다만 9시 출근 6시 퇴근이라는 수레바퀴 바깥에 있기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음악적 열정과 꿈이 있기에 오늘의 생활이 고달파서 잠깐 주춤해도 내일을 향해 질주를 멈추지 않는 인디음악인들이 홍대 클럽신에서는 다수 서식중이다. 달빛요정의 이진원이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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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허클베리핀 공연 장면. 사진 박미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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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과 작업 | 가장 골치 아픈 건 홍보
인디밴드 국카스텐의 하현우(29)는 아침에 할 일이 없다. 출근을 하는 것도, 학교를 가는 것도 아니다. 스케줄은 대부분 오후부터 시작된다. 대개 늦잠을 잔다. 8일 밤엔 늦도록 많은 문자가 왔다. 전날 방송된 <유희열의 스케치북>에서 ‘붉은밭’과 ‘거울’을 불렀다. 시청자들은 뒤집어졌다. 포털 실시간 검색어 1위를 국카스텐이 차지했다. 다른 멤버들은 보나마나 한잔하고 있을 게 뻔했다. 하지만 하현우는 집이 안산이고 술도 못 마신다. 서울예대 부근 작업실에서 하던 신곡 작업을 계속했다. 잠든 시간은 새벽 5시. 빠르면 오전 11시, 늦으면 오후 2시께 일어날 때까지 전화벨은 울리지 않을 것이다. ‘일어나면 전화해줘’라는 메시지 정도가 있을 뿐. 다른 뮤지션들도 거기서 거기니까.
일정은 단순하다. 방송·인터뷰·공연·행사, 넷 중 하나다. 나머지 시간은 밤과 마찬가지로 작업의 연속이다. 스케치 단계의 곡이 어느 정도 형태가 잡히면 멤버들과 편곡 작업을 한다. 편곡은 주로 합주실에 모여 ‘잼’으로 만들어진다. 먼저 곡을 써온 멤버가 아이디어를 제시하면 각자 악기별로 살을 덧대어 최종적인 곡의 형태로 완성하는 식이다. 그렇게 곡이 쌓이면 앨범 작업에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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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클베리핀이 운영하는 또다른 술집 ‘샤인’. 보컬 이소영씨는 청소중. 사진 박미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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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홈 리코딩 기술이 발달해서 웬만한 녹음은 다 집에서 컴퓨터로 할 수 있다. 때문에 앨범 제작비도 아끼려면 얼마든지 아낄 수 있다. 시디를 공장에서 찍는 데 몇십만원 정도만 있으면 된다. 그나마도 예전 붕가붕가레코드처럼 일일이 시디를 구워서 가내수공업 형태로 낼 수도 있다. 물론 레이블의 지원이 확실하다면 비용을 들여 스튜디오 녹음을 하고 양질의 커버를 갖춘 멋진 음반을 낼 수도 있다.
앨범을 낸 뒤, 그다음이 문제다. 유통도 생각해야 하고 홍보도 안 할 수 없다. 몇해 전만 해도 신촌의 향뮤직이나 홍대의 퍼플레코드 등 마니아들이 주로 찾는 레코드 가게에 앨범을 가져다 놓는 게 최선이었다. 최근에는 미러볼 뮤직 같은 인디음반 전문 유통사들이 생기면서 음반뿐 아니라 디지털 음원 유통도 쉽게 해결됐다. 그래도 홍보는 골치 아프다. 물론 90년대나 21세기나 인디음악인들에게 최선이자 최후의 보루는 라이브 클럽이다. 일단 클럽 평일 무대에 서는 걸로 경력을 시작한다. 아직 음악으로 먹고살아 보겠다는 야심 같은 거, 없을 때다. 그냥 음악을 하고 싶을 뿐인 그런 단계다. 거기서 어느 정도 주목을 받으면 주말 공연에 설 수 있다.
아예 입소문을 확 받으면 레이블로부터 연락이 온다. 2008년 국카스텐, 한음파, 장기하와 얼굴들을 배출했던 <교육방송>(EBS) ‘스페이스 공감’의 신인발굴 프로그램 ‘헬로 루키’ 이후 인디음악인들을 상대로 한 오디션도 꽤 늘어났다. 이런 과정을 거쳐 인디음악인들은 이름을 알린다. 그때 대상을 탔던 국카스텐의 하현우는 말한다. “음악을 하면서 가장 보람을 느꼈던 순간이었어요. 내가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그동안의 삶에 대한 용서가 되는 기분이었어요.” 물론 음반을 낸 뒤 인터넷으로 입소문을 타고 유명해지는 일도 있다. ‘앙코르 요청 금지’로 2007년 연말에 화제가 됐던 브로콜리 너마저, ‘인터넷 대통령’이라는 별명을 들으며 ‘홍대 앞의 빅뱅’으로 군림했던 장기하가 그 좋은 사례다.
생활과 경제 | 레슨·행사 없인 못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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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작업을 하는 허클베리핀의 보컬 이소영씨. 사진 박미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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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 시장은 갈수록 힘들어진다. 음원 시장은 커지지만 아직까지 한국에서는 제값 주고 음원 사는 사람이 그다지 없다. 그나마도 아이돌 음악에만 압도적으로 쏠린다. 게다가 음원 사이트 및 이동통신사의 불합리한 수익분배율 탓에 정작 음악인들이 가져가는 건 한숨만 나오는 수준이다. 그러나 요즘 기준으로 음악은 콘텐츠다. 콘텐츠란 부가가치를 창출하기 마련.
음악인들의 첫번째 부가가치로는 레슨이 있다. 우후죽순 실용음악과가 생기면서 사교육 시장이 열렸다. 실용음악과를 졸업한 연주자의 경우 입시학원의 우선 섭외 대상이다. 대부분의 학원에서 음악 생활을 인정해주기에 활동에도 지장이 없다. 모던록 밴드 디어클라우드는 멤버 전원이 이런 레슨을 통해 생활을 해결하는 대표적인 예다.
실용음악과 지망생이 아니더라도 레슨을 받으려는 이들은 많다. 최근 취미로 악기를 배우려는 학생이나 직장인이 많아졌다. 베이스 김기범을 제외한 나머지 멤버 전원이 독학으로 음악을 한, 즉 입시학원을 노리기 힘든 국카스텐은 “아마 레슨이 없었다면 거지가 됐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모든 음악인들이 레슨을 하는 건 아니다. 기타 좀 가르쳐 달라는 사람들이 줄을 섰음에도 “내가 기타를 배워서 치는 게 아니기 때문에 누굴 가르치지 못한다”며 거절하기 바쁜 문샤이너스의 차승우 같은 이들도 있다. 스무살이었던 98년 당시 이미 한상원에게 한국의 차세대 기타리스트로 꼽혔던 준재임에도.
레슨 못지않은 건 행사다. 수많은 지자체들의 수없이 많은 축제 무대나 각종 영화제, 봄가을 황금 시즌인 대학 축제가 행사 시장의 주된 밥그릇이다. 지명도는 없지만 연줄이 있어서 운좋게 행사를 따는 경우 적으면 10만원 정도의 출연료를 받는다. 지명도가 쌓이면 100만원대로 올라간다. 히트곡이 생기면 500만원까지도 받을 수 있다. 500만원급의 밴드는 한 손으로 꼽을 정도다. 행사가 많아도 생활이 넉넉지 못한 경우가 많다. 레이블과 팀이 3:7로 수익을 나누고 또 멤버들끼리 나누면 손에 쥐는 돈은 그리 많지 않다. 행사라는 게 그렇게 자주 있는 것도 아니다.
또한 음악 성향이 차분해서 행사장의 분위기를 방방 띄우지 못한다면, 섭외에서 제외되기 마련이다. 이들은 그래서 주로 출연료 낮기로 소문난 시민단체가 주관하는 행사나 문학의 밤에 주로 불려간다. 이렇게 행사로 벌어들인 수익을 멤버들끼리 나눠갖는 일도 있지만 밴드 통장에 쌓아두는 경우가 더 많다. 앨범 제작비나 장비 구입에 쓰기 위해서다. 레슨 수익이 월급이라면 행사 수익은 투자금인 셈이다.
레슨과 행사로 생활을 해결하기 힘든 이들이 택하는 길은 다른 일을 갖는 거다. 하드코어 밴드 바셀린의 멤버들은 모두 다른 일을 갖고 있다. 뮤직비디오 감독, 패션디자이너, 대형마트 직원 등의 버젓한 직함이 그들의 명함에 새겨져 있다. 인디음악 중에서도 비주류이기에 처음부터 전업 뮤지션 대신 건실한 생활인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펑크 뮤지션들 역시 ‘노동자의 삶’에 대한 존중으로 두 개의 삶을 사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노동량의 절정이라는 대리급 사원이 되면 라이브 클럽에서 그들의 모습을 보기는 점점 힘들어진다.
이런 환경을 잘 알고 있기에 아예 사장이 되는 음악인들이 늘고 있다. 2000년대 중반부터 홍대 앞에 카페 문화가 조성되고 상권이 커지면서 음악인 출신의 사장이 하나둘 생겨났다. 극동방송국 앞에서 ‘바 샤’를 운영하고 있는 허클베리핀이 대표적인 경우다. ‘비닐’ ‘레게치킨’ ‘이리카페’ 같은 홍대 앞의 명소들 역시 전·현직 음악인들이 시작해서 성공한 가게들이다. 허클베리핀은 다른 음악인들과 달리 밴드가 함께 가게를 시작했기에 음악에 쓸 힘을 많이 뺏기지 않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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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카스텐에서 드럼을 치는 이정길씨. 사진 박미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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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과 행복 | 음악은 내 운명…후회는 없다
전업이든 부업이든 음악만으로 풍족한 생활을 하기란 힘들다. 그래도 그들은 음악을 한다. 국카스텐의 하현우는 말한다. “후회해본 적 없어요. 음악 말고 잘할 수 있는 게 없거든요. 내가 포기가 빨라요. 중학교 때 영어수업 첫 시간에 그걸 느꼈어. 음악을 시작했는데, 이건 누구보다 잘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들이 후회하는 건 대략 이럴 때다. “들국화 트리뷰트 앨범에 들어갈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를 녹음하는데 전인권의 보컬에서 넘을 수 없는 벽을, 부르면서 느꼈어요. 불러도 불러도 나는 안되는 건가 싶더라고요.” 허클베리핀 이소영의 말이다. 스타가 되는 건 다음 문제다. 그저 음악이 있을 뿐이다. 운명이다.
글 칼럼니스트 김작가
noisepop@hanmail.net·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인디음악계 삼권분립 형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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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문화협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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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음악의 인프라는 세 축으로 구성된다. 우선
라이브 클럽. 1994년 개업한 전설의 클럽 드럭을 시작으로 스팽글, 마스터플랜 등 초기의 클럽들은 인디 신 탄생의 견인차였다. 초기에는 클럽마다 소속 밴드들이 고정적으로 서는 시스템으로 운영됐다. 누가 공연을 하든 클럽의 분위기를 좇아 매일 출근하다시피 하는 ‘죽돌이’들이 있었다. 그러다가 밴드의 개별적인 팬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새로 생긴 클럽은 ‘
스타 밴드’의 공연이 필요했다. 인기 있는 밴드들은 클럽을 가리지 않고 공연을 했다. 클럽이 레이블을 겸하고 있었던, 즉 그 클럽에서 공연을 하는 밴드의 앨범이 클럽의 이름을 달고 발매되던 시스템 역시 사라졌다. 1998년 ‘인디’를 시작으로
레이블들이 하나둘씩 생겨났다. 클럽 대신 레이블이 소속된 밴드들의 음악적 색깔을 대표하기 시작했다.
팬들과의 소통(클럽), 앨범제작·홍보(레이블), 음악 생산(음악인)이라는 인디 음악계의 삼권분립이 이미 인디 신 초기부터 형성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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