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1.01.13 11:51
수정 : 2011.01.13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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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요정 이진원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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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요정 2009년 1~5월 일기…음악과 세상 고민의 편린 고스란히
〈esc〉가 지난해 11월 갑자기 세상을 뜬 이진원씨의 일기를 단독 입수했다. 달빛요정의 일기와 글은 조만간 <행운아>라는 제목의 책으로 묶여 도서출판 북하우스에서 출간될 예정이다. 2009년 1월부터 5월까지 그의 일상, 음악과 세상에 대한 고민의 편린이 담긴 그의 일기를〈esc〉가 요약·발췌해 공개한다.
정리 김진철 기자 nowhere@hani.co.kr
2009년 1월16일 금요일 | 출판사에서 선인세가 입금되었다. 오늘부터 일기를 써야지. 나름 문학소년이었던 고등학교 때 꽤 열심히 쓴 일기들을 이사 다닐 때마다 발견하고 몇 년에 한 번씩 훑어보곤 하는데 그때의 일기가 해마다 다르게 읽히더군. 어차피 나는 중학교 3학년 때 음악을 하기로 마음먹은 이후 사고의 성장이 멈췄으니 세상을 대하는 기본 마인드는 변함없지만.
그러다 대학에 들어가서 방위로 소집되기 전까지 2년 동안 매일 술을 먹는 바람에 글질 같은 것엔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그 2년 동안 기타 열심히 쳤으니 후회는 없지만 내 인생에서 가장 즐거웠어야 할 내 스무살을 별 되도 않는 논쟁들에 휘말려 지냈던 것은 좀 아쉽다. 음악도 많이 못 들었던 것 같다. 듣기도 하고 많이 부르기도 했다만 그건 노래가 아니었지.
한숨 자고 일어나 밤 9시부터 11시까지 연습, 모레가 공연이라 음주는 하지 않았다. 장하다, 달빛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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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요정 이진원씨. 그랜드민트페스티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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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이라곤 있어도 루저들뿐”
1월17일 토요일 | 엊그제 2월 단독공연 포스터 1000장이 나왔는데 붙일 일이 막막하다. DC인사이드 인디밴드 갤러리에다 올리긴 했는데 페이가 짜서 그런지 영 호응이 없다. 그렇다고 내가 붙이기도 뭐한데 포스터에 내 얼굴이 제대로 나와 있단 말이지. 뮤지션으로서 살아남는 방법은 결국 팬심을 이용하는 것뿐이란 말인가. 팬이라고 몇 있지도 않거니와 있어도 루저들뿐인데.
1월19일 월요일 | 돈 되는 노래를 만들어야 한다고 그렇게 주장하던 남용이는 지금 일본에서 장사하면서 잘살고 있고 ‘Rock Spirit’ 운운하면서 겔겔대던 나는 벌써 5년차 가수가 되어 음악으로 돈 벌 궁리만 하고 있다는 것. 나의 음악은 그때쯤 끝나는 게 딱 좋았을지도 모른다. 어디든 취직해서 10년쯤 굴러먹다가 어느 정도 경제적인 여유가 생기면 젊은 날의 보상심리로 비싼 기타나 한두 대 사서 매일매일 닦고 조이며 ‘스테어웨이 투 헤븐’이나 ‘티어스 인 헤븐’ 같은 유명한 곡들을 가끔 연주하는 것. 그리고 가끔 보는 티브이에 나오는 아이돌의 음악성을 욕하며 자신의 ‘Rock Spirit’에 존경을 보내는 것. 그런데 가끔 나도 나 자신에게 묻는다. “아이돌이 음악성이 왜 필요해?”
1월20일 화요일 | 장기하가 뜨긴 뜬 모양이다. 장기하 및 인디음악 관련 에스비에스 뉴스와 인터뷰. 연습하는 거 찍어 갔는데 제발 불쌍하게만 안 나오면 좋겠다. 나의 무한한 추락이 그들에게는 가벼운 소재가 되겠지. 나의 처절한 파멸만이 내가 뮤지션으로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 대중의 귀는 알 수가 없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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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요정 이진원씨. 유가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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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23일 금요일 | 월급날, 나의 유일한 고정수입, 저작권료. 고정수입이긴 하지만 액수를 예상할 수 없으니 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하며 받아야 한다. 언젠가부터 10만원은 넘게 나오고 있으니 핸드폰 요금은 낼 수 있다. 가끔 100만원도 넘게 나올 때는 친구들에게 시원하게 고기를 쏘기도 한다.
1월25일 일요일 | 점촌. 아버지와 어머니가 여관을 하시는 곳이다. 나와 동생을 대학에 보내고 과감히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내려가 음풍농월하고 계신다. 어디든 서울보다 나을 거다. 심심해서 그렇지. 1년에 서너 번 정도 가는데 언젠가부터 조금씩 개발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대운하 관련해서 땅값이 좀 올랐다고 좋아한다. 그래봤자 10년 동안 1000만원 오른 것. 어쨌든 대운하는 안 된다. 그만 좀 파헤쳐라.
2월2일 월요일 | 대림역 작업실을 처분했다. 보증금 50만원에 권리금 30만원 내고 들어가서 월세 8만원에 잘 썼다. 어차피 방이 6개나 되는 시끄러운 공동작업실이라서 새벽에만 가서 썼는데 택시요금도 만만치 않고 새벽에 몰래 도둑처럼 녹음하는 것도 처량하고 그래서. 잘 쓰시오, 저한테 나름 추억이 묻어 있는 곳이니. 그리고 꼭 음악으로 성공하세요. 여름이면 많이 습할 텐데, 환기도 안 되고.
2월5일 목요일 | 그분께서 닌텐도 같은 게임기를 만들라고 하셨는데, 게임기는 삽으로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어요, 만들어도 아무도 안 사요. 왜 내가 당신 때문에 관계에 대한 고찰을 해야 하는데, 우리의 관계는 수직인가요? 수평인가요? 당신은 면제잖아요, 대통령은 국민보다 위에 있나요? 이런 병신 같은 생각으로 하루를 보냈다. 아까운 나의 서른일곱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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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요정 이진원씨. 북하우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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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1일 일요일 | 나도 얼굴에 철판 깔고 야부리 까고 다닐 능력이 있었으면 음악 만드는 것보다 음악에 대해 이거저거 싸질러대면서 딴따라판 언저리를 맴돌고 있지 않았을까. 차라리 영화평론가들은 나은 것 같아. 음악평론이라는 건 아무나 싸지를 수 있지만 누구나 잘 싸지를 수는 없어.
3월14일 토요일 | 홍대 앞 클럽 ZOO에서 메탈공연을 보다. 10장 정도 앨범을 낸 한국의 대표적인 메탈그룹이 자기 노래 할 때보다 카피곡 할 때 더 좋다는 게 가슴 아프기도 했다. 노래가 다 비슷하다는 게 문제. 공연을 보고 껍데기집에서 소주 한잔하고 맥줏집에서 2차로 미치도록 달렸다. 기분이 좋아지기도 하고 서글퍼지기도 하고 가슴 아파지기도 하고 취하기도 했던 그런 날이었다.
“난 장기하보다 더 넓은 음역대의 가창력”
4월5일 일요일 | ‘88만원 세대의 힘겨운 데뷔전’에 달빛요정 전격 출연. 역시 장기하한테 묻어가는 달빛요정. 올해의 인터뷰는 끊임없이 장기하와 비교당하며 하고 있는데 미디어에 종사하고 있는 인간들이 달빛요정에게 원하는 건 ‘서울대를 안 나온 장기하는 어떨까’에 대한 답인 것 같다. 미안하지만 난 그 답을 해줄 수가 없다. 난 달빛요정이니까.
TV라는 게 화려한 사람은 더 화려하게 만들어주고 초라한 사람은 더 초라하게 만들어주는 면이 있는 것 같다. 자극적이고 과장되어 있는 거지. 그리하여 시사/교양 프로그램에 나온 나를 보고 내 주위 친척들은 언제나 잔소리다. 엄마는 음악 때려치우라고 난리다. 왜 인터뷰만 하면 븅신처럼 보일까.
4월6일 월요일 | ××일보 인터뷰, 내가 장기하 때문에 고생이 많다. 장기하는 나를 알까? 장기하한테 가서는 달빛요정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보기는 할까? 나는 장기하보다 더 넓은 음역대를 가진 그저 그런 가창력의 소유자.
4월9일 목요일 | 작가 후배가 주위에 오빠 팬이 있는데 나중에 만나서 술이나 같이 한잔하자고 해서 알았다고 문자를 교환한 적이 있는데 막상 만나고 보니 소개팅. 어이없어서 고기 먹고 동동주 먹고 만취. 나중에 소개팅시켜주기로 했는데 주위에 남은 것들은 돌싱 아니면 어린것들, 혹은 딴따라. 딴따라 소개팅시켜주는 건 좀 위험하지. 엘지 트윈스 1승(-1).
4월23일 목요일 | 저작권료 받는 날. 노래방 저작권료가 들어왔나 보다. 꽤 많다. 한달 생활비 및 밀린 공과금 내고 나면 본전을 유지할 수 있을 듯. 저작권료 받는 날은 매번 설렌다. 대체 얼마나 받을지 알 수가 없으니, 이런 것이 갬블하는 기분일까. 고정수입이 있는 사람이 부럽다. 나도 계획적으로 금전관리를 해보고 싶다구. 엘지 트윈스 1패(-3).
“자고나면 죽음에 더 가까워진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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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요정 이진원씨. 진종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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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24일 금요일 | 간밤 숙취로 아침부터 기상, 술을 먹으면 잠을 잘 못 잔다. 뭐, 평소에도 그다지 잘 자는 편은 아니지만. 수면을 통해 기력을 회복하는 게 아니라 자고 일어나면 죽음에 한 걸음 더 가까워져 있는 느낌. 오늘은 드라마 <친구> OST에 들어갈(들어갔으면 하는) 노래의 가이드를 작업해야 한다. 이 엿같은 시대에 희망 찬 노래를 쓰는 건 위선이라고 생각하지만, 나도 먹고살아야 하므로 어쩔 수 없다. 엘지 트윈스 1승(-2).
4월26일 일요일 | 새벽까지 술을 먹었지만 8시 알람을 맞춰놓고 일어나 박찬호 선발 등판 경기 시청. 밀어서 홈런 치는 찬호를 보며 크게 한 번 웃었다. 언제나 스릴 넘치는 박찬호 선발 등판 경기를 보고 다시 잠을 잘까 했는데 어제 먹은 술이 덜 깨서 그런지 머리가 아프다. 에잇, 잠도 안 오는데 어제 불러논 거 작업이나 하자. 제목은 ‘축배’로 정했다. 멜로디 및 구성은 완성했으나 긍정적인 가사를 일부러 쓰려니 역겨워서 대충 입에 붙는 걸로 불러서, 가이드로 만들어서 그런 건가. 까였다. 내 앨범에나 써야지. ‘361 타고 집에 간다’ 풍의 노래를 원한다는데 이제 그런 노래 만들기는 지겹기도 하고 비슷한 리듬의 노래를 만든 지가 얼마 안 돼서 새로 작업하기가 부담스럽다. 하나 어쩌랴, 빡세게 모아서 4집 앨범 제작비를 마련해야 한다. 엘지 트윈스 1패(-2).
5월8일 금요일 | 어버이날인데 잊고 있다가 엄마한테 전화가 왔다. 선물은 필요 없고 빨리 장가 좀 가라는 닦달. 아이구 지겨워. 밤 11시부터 새벽 1시까지 공연연습 및 신곡연습. 6월13일에 스카이하이에서 공연하기로 했는데 메탈밴드들이랑 할 것 같아서 걱정이 태산. 엘지 트윈스 7연승(+4).
5월23일 토요일 | 공연 다음날은 무조건 절대 휴식. 나의 유일한 낙. 시체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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