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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01.13 13:18 수정 : 2011.01.16 14:35

달빛요정 이진원.

죽은 뒤 더 빛나는 이진원의 메시지…27일 추모공연 100개 팀 홍대 집결

지난해 11월6일 37살 한창나이에 황망히 세상을 떠난 1인 밴드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이하 달빛요정)의 고 이진원. 홍대 인디음악계가 낳은 스타로 꼽히지만, 7년 남짓한 길지 않은 그의 음악 인생은 인디신에서도 비주류 중의 비주류에 속했다.

2003년 발매된 데뷔 앨범 <인필드 플라이>(왼쪽 사진)에서 그에게 지명도를 안겨준 노래는 두 곡이다. ‘절룩거리네’와 ‘스끼다시 내 인생’. ‘절룩거리네’는 엠비시 에프엠(MBC FM) <신해철의 고스트네이션>에 소개되면서 인기를 끌었고 이 프로그램의 인디 차트에서 5주 연속 1위를 기록했다. 그럼에도 정작 인디신에서는 그의 이름이 별로 회자되지 않았다.

달빛요정.
우선 그의 활동방식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 당시 인디신에서 뮤지션이 지명도를 얻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활발한 클럽 공연이 필요했다. 당시 시스템은 이랬다. 먼저 공연을 통해 반응과 입소문이 생겨야 한다. 이를 기반으로 레이블과 계약을 거쳐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고, 라이브 활동으로 생긴 반응을 토대로 앨범을 낸다. 그중 반응이 좋아 공연의 마지막 곡으로 부르는 노래를 앨범 타이틀 곡으로 삼아 홍보하는 식이었다. 이런 시스템이 당연했던 시절이다. 하지만 달빛요정은 앨범을 내기까지 이렇다 할 클럽 공연을 한 적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음악은 펑크와 모던 록으로 양분되던 당시 인디음악계의 어떤 경향과도 무관했기 때문이다. 이는 함께 무대에 설, 비슷한 음악을 하는 이들이 없고 홍대 앞으로 그의 공연을 보러 올 고정 관객층도 그다지 없었다는 얘기다.

또한 기존의 음악인들이 클럽에서 공연을 보러 다니는 관객에서 출발해, 자연스럽게 인디음악 커뮤니티에 몸담게 되고, 멤버를 모아 밴드로 데뷔하는 일반적인 인맥 확보의 경로에서도 그는 벗어나 있었다. 학교 졸업 뒤 회사를 다니다가 때려치우고 홀로 작업실에서 곡을 만들며 어느 날 갑자기 앨범을 냈던 그였기에 비빌 언덕도 마땅치 않았다. 고작해야 홍대 동문 출신으로 이미 터를 잡고 있던 음악인들이 전부였다. 말 그대로 ‘인디의 인디’였달까.


데뷔 전 클럽공연 경험 없는 ‘비주류 중 비주류’

달빛요정.
그러나 그의 음악에 주목했던 이들이 있었다. 오히려 평소 라이브 클럽이나 인디 레이블에 관심이 없던 20~30대의 일반 대중이었다. 전형적인 장르 음악이 아니라 민중가요와 1980~90년대 가요의 분위기를 갖고 있는 음악은 진입 장벽이 낮았다. 또한 당시 주류와 비주류를 막론하고 찾아보기 힘들었던 직설적이면서도 자조적인 가사, 게다가 명확한 가사전달력이 처음 듣는 이들에게도 높은 호소력을 안겼다.

그래서 그의 공연장은 다른 인디 밴드들의 그것과는 자못 다른 풍경을 보였다. 여느 공연장의 객석을 10~20대 인디음악 팬들이 메우는 반면, 달빛요정의 음악을 들으러 오는 나이대는 그보다 높았다. 다른 밴드의 공연에서 보기 힘든 얼굴들이 유독 많았으며 남성의 비율 또한 높았다.

온라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음악이 주로 회자되는 공간은 음악 애호가들이 모이는 음악 웹진의 게시판보다는 생활인들이 취미를 공유하는 커뮤니티의 게시판이었다. 누군가 이 노래 좋지 않으냐며 ‘절룩거리네’를 올려놓으면 댓글이 호응하는 식으로, 그의 음악은 회자됐다. 앨범이 계속 나오고 공연을 지속하면서 객석을 메우는 이들도 점점 많아졌다. 초기 공연 당시의 관객이 손에 꼽을 만큼의 인원이었다면, 지난해엔 매진에 가까운 인원을 동원하기도 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재래시장을 방문해서 상인에게 목도리를 벗어준 그 유명한 사진을 패러디한 포스터를 내세웠던 공연이 가장 많은 관객을 모았다고 전해진다.

그는 생전의 인터뷰와 보도자료를 통해 “연봉 1000만원만 벌 수 있으면 계속 음악을 하겠다”고 했다. 세번째 앨범 <굿바이 알루미늄>(오른쪽 위 사진) 발매 당시 했던 말이다. 그리고 이 앨범에서 그의 뜻은 이뤄졌다. ‘치킨 런’ 같은 기존의 자조적 음악이 역시 기존 팬들에게 호응을 얻었고 ‘나를 연애하게 하라’가 대표적인 여성 취향 페스티벌인 그랜드민트페스티벌의 2009년 테마송으로 선정되면서 문화 소비 시장을 주도하는 여성들도 팬층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페스티벌 당시 이 테마송이 곳곳에서 흘러나왔다. ‘샤방하게’ 차려입은 여성 관객들이 흥얼거리며 이 노래를 따라 불렀다. 기존 달빛요정의 음악이 소비되던 방식을 떠올리면 상상할 수 없는 풍경이었다. 그는 풍족하지는 않더라도 “근근이 먹고살면서 동생들 술 사줄 정도는 되는” 정도의 소득을 올릴 수 있었다.

달빛요정 이진원.
달빛요정.
대통령 재래시장 방문 패러디해 인기 폭발

그런 상황에서,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 힘으로 거기까지 갔던 그였기에 비보가 주는 안타까움이 더 컸나 보다. 그가 데뷔하고 7년이 지나 음악계의 판도도 많이 바뀌어 장르보다는 분명한 음악적 정체성이 평가의 기준이 되고, 밴드뿐만 아니라 ‘달빛요정’ 같은 싱어송라이터들도 많은 활동을 하는 상황이 됐다. 그 시점에서 그는 여러 음악인의 하나일 뿐이었다. 다른 곳에서 찾아보기 힘든 음악이었기에 팬뿐만 아니라 다른 음악인들도 그의 가사와 메시지에 대해서 높이 평가할 정도였다. 더는 아웃사이더가 아니었다. 버티고 버텨서 살아남았다. 그렇게 살아남아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전, 그는 세상을 떴다.

이제 한국 음악계가 그를 기린다. 오는 27일은 홍대 앞, 아니 한국 음악계에 한 획을 긋는 날이 될 것이다. 100여팀의 음악인들이 함께 달빛요정을 추모하는 공연을 벌인다. 여느 ‘떼공연’과는 다르다. 무대에 서게 될 팀 모두가 자발적으로 참여한다. 물론 노개런티다. 동시에 공연이 진행될 20여 라이브클럽·카페·바 역시 마찬가지다. 서교음악자치회, 라이브음악발전협의회, 클럽문화협의회 등 홍대 앞에 존재하는 여러 음악 관련 단체들이 처음으로 모두 함께 주관한다. 공연을 꾸미고 진행할 자원봉사 모집 공고가 나간 지 하루 만에 100명이 넘는 인원이 지원했다.

이 공연에 참가하는 음악인들의 면면을 보자면 화려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다. 블랙홀, 블랙신드롬 같은 헤비메탈부터 디어 클라우드, 요조 등 모던 록까지 한국에 현존하는 모든 장르의 음악인들이 다 모인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장르뿐 아니라 세대도 다양하다. 함춘호, 이상은 같은 중견부터 크라잉넛, 노브레인으로 대표되는 인디 1세대, 장기하와 얼굴들, 국카스텐 등 신진 스타들까지 총망라된 출연진이다. 규모와 방식만 보자면 홍대 앞, 아니 아니 한국 음악계를 대표했던 이에게 바치는 공연 같다.

칼럼니스트 김작가 noisepop@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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