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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01.27 10:19 수정 : 2011.01.27 10:25

불야성을 이루는 경기도 파주시의 한 모텔촌.(2004년) 김진수 기자

서현 교수가 분석한 ‘러브호텔’의 변천사

‘꿈의 궁전’ ‘굿타임’ ‘조이’ ‘프로포즈’ ‘로마의 휴일’ ‘로맨스’.

오늘도 우리의 밤풍경을 화려하게 물들이는 러브호텔은 법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건물을 척 보면 아는데 굳이 규정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일본의 지방자치단체 조례가 바라보는 러브호텔은 이렇다. ‘오로지 이성을 동반하는 고객의 숙박 또는 휴식에 이용하는 목적의 건물.’ 처음은 분명 미약했다. 그냥 여관일 뿐이었다. 뜨내기 손님들을 상대하는 업종의 생존방식은 군집이다. 여관도 기차역, 버스터미널 후면도로에 모여 여관촌을 이루었다. 절대 대로변으로 나서지는 않았다.

‘잔다’는 표현은 때로 코를 골며 잘 잤다는 것 이상의 함의를 갖는다. 그래서 여관은 ‘오로지 이성을 동반한 고객’이 쑥스러워하며 자러 가는 곳이기도 했다. 이들을 덜 쑥스럽게 하기 위해 아래층에 다방, 술집을 끼워 넣기도 했다. 현관에는 키 큰 화분을 줄 세워 놓고 손님들을 가려주었다. 이면도로의 화분줄은 여관의 아이콘이 되었다.

여관은 국가대사와 함께 성장했다.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앞두고 숙박시설이 필요했고 장려되었으므로 파크텔이라는 우아한 여관들이 등장했다. 장급여관이라는 장미여관 시절의 촌스러운 이름을 버리고 미국식 이름인 모텔이라 부르기도 했다. ‘재테크’만큼이나 이상하게 조합된 단어, 일본의 ‘라부호테루’도 이때 수입되었다. 쑥스러운 손님들의 존재가 드디어 인정되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 러브호텔의 1세대는 이렇게 등장했다.


1994년 정부는 농지규제를 완화하면서 준농림지라는 것을 만들었다. 그리고 여기에 식당과 숙박시설을 허용했다. 위기와 기회는 과연 함께 다녔다. 외환위기 이후 지역경제를 활성화한다고 숙박업을 여신금지업종에서 제외시켰으니 투자해야 할 종잣돈이 줄었다. 퇴직금을 손에 쥔 명퇴자들이 사장님으로 명함을 바꿨다. 전국 방방곡곡에 토종닭, 오리탕 식당과 함께 러브호텔이 들어서게 되는 순간이었다. 먼 훗날의 고고학자가 대한민국을 발굴했을 때 그 종족은 소화기와 생식기만 달린 생물이었다고 결론 내릴 근거가 마련된 시점이기도 하다.

모순적인 건축미…드러내면서 감춘다

도심 주택가에 버젓이 들어선 러브호텔.(2000년) 곽윤섭 기자
러브호텔이 퐁당퐁당 널리널리 퍼져나가게 돌을 던져준 장치가 때맞춰 대중화되었다. 기동성과 보안성을 함께 갖춘 공간인 자가용은 하드웨어였다. 여기에 기밀성을 보장하는 개인 통신수단인 휴대전화가 소프트웨어로 얹혔다. 러브호텔을 구성하는 가장 근원적인 공간으로 객실에 주차장이 추가되었다. 주차장 입구의 천막 가리개는 여관 시절의 화분을 밀어내고 2세대 러브호텔의 아이콘이 되었다. 익명성이라는 원칙으로 볼 때 러브호텔의 이상형은 자동차 출입문과 객실 출입문이 맞붙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현관과 복도의 이동거리를 최소화하는 것이 러브호텔 설계의 기본이다.

국도변과 새도시 주변의 러브호텔은 생존방식이 서로 달랐다. 같은 숙박시설이지만 호텔은 예약을 하고 모텔은 하지 않는다. 바람처럼 달려가는 운전자의 시선을 잡으려는 국도변 러브호텔들은 현란한 분칠을 시작했다. 멀리서도 눈에만 띈다면 사라센 양식이든 신데렐라 양식이든 족보를 괘념할 일이 아니었다. 겨울이면 소주병도 얼어붙는 양평 국도변에 불 켜진 열대야자수도 등장했다. 너의 낮보다 화려한 나의 밤을 위해 내건 만국기 조명 덕에 전국이 1년 내내 운동회고 성탄절이었다.

이들에게는 모순적인 요구조건이 있었다. 멀리서는 잘 보여도 가까이서는 가려주어라. 건물 주위에 담장을 둘렀다. 당고개 무당 같은 윗도리에 장례식장 사회자 같은 아랫도리의 조합이 국도변 러브호텔의 전형이었다. 네모난 구멍창문은 여관 시절부터 이어진 건물 외관이다. 손님 수를 예측할 수 없으니 건물 전체를 상시 냉방하는 것은 낭비였다. 방마다 에어컨을 따로 단 개별냉방이 합리적이었고 그 에어컨이 매달릴 창문을 구멍처럼 내는 것이 외관설계의 기본이었다. 개별에어컨 실외기가 사라진 후에도 창문은 남았다.

새도시 주변의 러브호텔들은 군집이라는 점에서 여관촌의 생존방식을 따랐다. 그러나 외관에서는 좀더 우아하게 호텔에 다가갔다. 구멍창을 버리고 건물 전체를 유리로 덮은 건물형식도 등장했다. 그러나 은밀함을 선호하는 방문객의 기호에 따라 아직도 창문 크기가 작을수록 장사가 잘된다는 것이 업계의 중론이다.

새도시 러브호텔, 재테크 사업 되다

광주광역시 동구 대인동 동부소방서 근처 여관촌. 서현 제공
러브호텔이 애들 교육에 좋지 않다고 새도시 주민들의 불만이 부풀어 터질 때쯤 준농림지제가 폐지되었다. 같은 사건을 두고 불륜이 아니라 로맨스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이미 사업에 뛰어든 사장님들도 많아졌다. 러브호텔은 새도시의 상업용지로 파고들었다. 3세대의 등장이다.

새도시 상업시설에서 사업이 본격화되는 시점은 주거 정착이 완료되는 때다. 상업용지 투자자들에게는 긴 시간이다. 투자 회수 기간을 최소화하기 위한 사업으로 러브호텔만한 것이 없었다. 뭘 해도 임대가 잘 안되는 외딴 주변블록일수록 러브호텔에는 더 좋았다. 잘라놓은 필지 크기도 딱 적당했다. 게다가 손님들이 알아서 현금으로만 결제를 하겠다니 확실한 재테크 사업이었다.

러브호텔은 건물주의 재산권, 이용자의 행복추구권이 인근주민들의 주거생활권, 그 아이들의 교육환경권과 진을 대치한 협곡이다. 지금 러브호텔은 서울 고급 부티크호텔과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 아직 일본에서 배워야 할 것이 많다고 느끼는 절박감에서는 러브호텔 사장님들이 대기업 회장님에 뒤지지 않을 것이다. 여기까지가 한국 러브호텔의 건축현대사다.

서울~부산도 반나절 거리가 안 되는데 가서 자고 올 이유는 줄었다. 성인가요, 성인오락실도 있고 애들 놀이공원도 있는데 성인놀이공원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는 ‘로맨스 현실론자’는 늘었다. 그래서 이발소에 머리 깎으러 간다 해도, 모텔에 코골며 자러 간다고 해도 주변 눈총이 지레 편치 않은 세상이 되었다.

외국인이나 학생들과 지방에 답사를 가면 모텔 벽에 붙은 몽롱한 어우동 사진 때문에 난감해진다. 굳이 설명을 하려면 성리학적 가치관 시대까지 올라가야 하는 이 건물은 알아도 모른다고 해야 하는 존재다. 그래서 우리는 대상을 규정하는 데 아직 주저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뻔히 알고 있는 너, 누구냐.

한양대 건축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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