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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02.17 11:38 수정 : 2011.02.17 13:59

[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아이돌과 운명공동체 꿈꿔…정치판 뺨치는 권력구조

숙소 앞에서 밤을 새우는 ‘사생팬’이 다가 아니다. 공개방송에서 ‘응원’을 하는 게 전부가 아니다. 한때의 철없는 일탈로 끝나는 것도 아니다. 한국의 10대 문화 중 엄연히 한 부분을 차지하는 아이돌 팬클럽 문화, 그 뒤에는 나름의 질서와 룰과 관행이 있다. 팬클럽과 기획사 사이에 보이지 않는 긴장과 협력이 있고, 팬클럽간의 경쟁과 합의는 물론, 팬클럽 내부의 서열과 권력다툼도 있다. 10대의 전유물이라 여겨졌던 팬클럽은 빅뱅, 원더걸스 이후 아이돌 르네상스가 열리면서 다양한 연령대의 문화가 됐다. 그 시절 팬클럽을 겪었던 이들은 “빅뱅과 원더걸스 이후에 20대가 팬클럽을 주도하는 경향이 강해졌다”고 말한다. 김작가/대중음악평론가 noisepop@hanmail.net

최근에는 제이와이제이(JYJ) 등 일부 팬클럽에 30~50대 여성이 주축이 돼 구매력과 정서적 유대감이 강한 ‘이모팬’들이 대거 유입돼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팬클럽 문화가 형성되고 있다.

하지만 팬클럽은 아직 음지의 문화다. 또래 집단과 가족 정도를 제외하면 대놓고 어느 팬클럽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말하기 망설여진다. 이미 팬클럽을 떠났는데도, 취재원들은 모두 자신의 이름과 소속됐던 팬클럽을 밝히지 말아달라고 했다. 엔터테인먼트 시장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도 자신을 당당히 드러낼 수 없는 존재, 한국에서 팬클럽의 위치다.

박다혜(27·가명)씨는 2000년대 초반부터 팬클럽 활동을 시작했다. 5년간 팬클럽 활동을 하면서 팬클럽 세계에서는 최고 지위인 전국 회장에 올랐다. 하지만 그가 좋아했던 그룹은 큰 인기를 얻지 못하고 실패했다. 그룹이 속해 있던 기획사에서는 그의 팬클럽 관리 노하우를 인정해서 소속된 다른 그룹들의 팬클럽을 관리하는 일을 의뢰했다. 팬클럽 회원으로서 겪을 수 있는 산전수전은 다 겪은 셈이다. “팬클럽은 정치판하고 공통되는 부분이 많아요. 냉혹한 세계죠.”

2009년 재범의 투피엠(2PM) 탈퇴를 철회해달라며 팬클럽 회원들이 침묵시위를 벌이고 있다.(이종근 기자)

동방신기의 팬클럽은 한때 80만명에 이르는 회원 수를 자랑했다. 신생 아이돌 그룹도 몇 만명 이상의 팬클럽을 가진다. 막대한 인원을 통솔하기 위해서는 조직이 필요하다. 지역별로 팬클럽이 존재하고 지역 회장과 부회장이 있다. 서울, 경기 등 큰 지역의 경우는 보통 두명의 부회장을, 그 밖의 지역은 한명을 뽑는 게 일반적이다. 일종의 지자체다. 중앙정부도 있다. 팬클럽의 중요한 안건을 논의하기 위해 각 지역 회장들이 모여 회의를 벌이고, 또한 이들을 총괄하는 역할을 전국 회장 대표가 맡는다. 전국 회장 대표가 서열 1위, 서울지부 회장이 2위다. 이들 임원진은 투표에 의해 선출된다. 임원 선거에는 불문율이 있다. ‘호봉’과 ‘정치력’이 일정 정도에 오른, 팬클럽 회원들에게 이미 얼굴과 이름이 알려져 있는 이들이 아니면 출마하지 않는다. 호봉은 팬클럽 활동 경력을 의미한다. 아이돌이 데뷔하기 전, 즉 연습생 시절부터 꾸준히 팬 활동을 해온 이들은 일종의 진골이다. 그룹이 데뷔하고 본격적으로 팬클럽이 창설될 때 초기 임원진을 맡는 건 그들이다.

음반 사재기에서 직접 인터넷 방송 개설까지 스타 띄우기 헌신

임원진 선거는 보통 1년 단위로 찾아온다. 아이돌이 정규 앨범을 낼 때 새로운 임원진을 선출하기도 한다. 경력이 많은 기존 임원들이 재출마해서 당선되는 일이 많다. 세대교체가 일어날 때도 있다. 꾸준히 자기 사람을 만들고 관리해온 이들에 의해서다. 공개방송, 공연 등 공식 행사에 개근하며 얼굴을 알리는 게 중요하다. 공식 팬카페에 주목받는 글을 자주 올린다거나, 자기만의 콘텐츠로 채운 개인 카페나 누리집(홈페이지)을 운영하면서 이름을 알려 영향력을 높이기도 한다. 그렇게 얼굴과 이름을 알리고, 팬클럽 내에 추종세력을 키우며 임원 자리를 노린다.

기획사에 따라 회장 대표나 서울 회장에게 차비와 식비 등 진행비를 사후 지급한다. 지역 회장에겐 전체 회의 때 서울에 올라오는 교통비를 지급하기도 한다. 음반 구입, 선물 마련 등 오히려 나가는 비용이 더 많은 자리다. 그럼에도 팬클럽 임원은 모든 이들의 꿈이다. “이왕 팬클럽을 할 거면 어중간하게 공연 몇 번 따라다니는 것보다는 임원을 하고 싶어하죠.” 임원진의 특권 때문이다. 우선 매니저의 전화번호를 알 수 있다. 아이돌의 스케줄이라는 핵심 정보가 파악된다는 얘기다. 콘서트가 열리면 대기실에 들어갈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 팬들이 마련한 선물을 전달하고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사진도 찍는다. 아이돌 멤버들도 임원진의 이름과 얼굴을 알기에 먼저 반갑게 인사를 건네기도 한다. 특권이라고 하기엔 별거 아니라고? 명심하라. 아이돌(idol)의 원뜻이 우상이라는 사실을. 아이돌과 직접적인 접촉을 한다는 건 “개발도상국 장관이 미국 대통령을 만나는 일”만큼의 의미를 가진다. 내부 견제 또한 만만치 않다. 평회원으로 시작해 주로 팬페이지를 만들어 활동했던 최지영(24·가명)씨는 말한다. “지역 회장끼리 싸우기도 하고, 회장과 일반팬들 간의 싸움도 많아요. 회장의 특권 때문에 웬만하면 회장을 싫어하는 경향이 있어요.” 공식 팬카페가 아닌 개인 팬카페의 경우, 회장의 이름을 검색창에 쳐보면 욕이 몇 페이지씩 나오기도 한다. “얼굴이 알려지면 권력이자, 질투, 시기의 대상이 되는 거죠.”

2006년 스크린쿼터 축소 항의 1인시위를 하는 영화배우 이준기의 팬들이 사진을 찍고 있다.(이종근 기자)

아이돌의 활동이 시작되면 팬클럽은 일사불란해진다. 팬클럽 최대 활동 목표 중 하나는 아이돌의 음반이나 음원이 발매됐을 때 차트 1위에 올려놓는 거다. 이를 위해서 다양한 방법이 동원된다. 회원들이 앨범을 한 사람당 5~6장씩 사서 선물로 돌리는 건 고전적인 전략이다. 회원들간에 일정 금액을 걷은 다음 모인 액수만큼의 시디(CD)를 사들이기도 한다. 그리고 그 시디를 아이돌의 소속사에 기증한다. 홍보 음반 한 장이라도 더 돌리라는 의미에서다. 한 아이돌 팬클럽의 이런 작전으로 그 아이돌의 앨범은 지난해 음반 판매량 최상위권에 올랐다. 팬클럽 사이에서 유명한 일이다.

한류붐을 타고 세계 각국에 생긴 한국 아이돌 팬클럽과의 연계 플레이도 하나의 방법이다. 해외 팬들에게 미리 돈을 걷어놨다가 그 돈으로 음반을 한꺼번에 사들여서 국제배송한다. 이 과정을 통해 해외 판매량까지 국내 판매량에 반영되게끔 하니 차트 1위 정복은 우습다. 시디를 ‘사재기’할 경제적 여력이 안 되는 팬이라고 손 놓고 있는 건 아니다. 음원 발매 당일에도 전쟁이 펼쳐진다. “가족들 아이디를 총동원하고, 시간 안 되는 다른 팬들의 아이디까지 사용해서 음원 사이트 창을 여러 개 띄워놓고 스트리밍을 돌리죠. 주로 10대의 몫이에요.” 요즘 아이돌이 활동만 시작하면 나오는 ‘음원차트 올킬’ 기사는 이렇게 탄생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인터넷 방송사를 팬들이 직접 차린 일까지 벌어졌다. 기획사 에스엠(SM)의 동방신기에서 독립해 나온 제이와이제이가 독립의 여파로 방송사 음악 프로그램 출연이 사실상 봉쇄되자 팬들이 직접 나선 것이다. 자금력과 실행력을 갖춘 30~50대 ‘이모팬’들이 중심이 돼 3월3일 개국을 목표로 ‘ilovejyjcom’이라는 인터넷 방송사를 준비하고 있다. 아울러 제이와이제이 팬클럽 연합은 지난달 버스 광고를 위한 모금을 벌여 열흘 동안 9817명으로부터 1억5000여만원을 모아 ‘JYJ 당신의 청춘을 응원합니다’라는 달리는 광고를 시작했다. 또한 지난 14일 멤버십 회원 모집에 나선 제이와이제이 공식 누리집(c-jes.com)에는 하루 동안 11만명의 팬들이 몰려들기도 했다.

매니지먼트 공부한 팬클럽 임원, 기획사 들어가기도

소속사에는 ‘팬팀’이라는 전담 부서가 있다. 이 부서의 팬 매니저들은 팬클럽 임원진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다. 임원진들과 함께 팬미팅 일정을 짠다거나 응원방법, 응원도구를 협의한다. 팬들의 의견을 수렴해서 활동 방향과 콘셉트를 정하는 데 참고하기도 한다. 물론 결정권은 회사 쪽에 있다. 팬클럽 내부에서 회비 횡령 등의 문제가 발생할 때 나서기도 한다. 이런 사고로 팬클럽의 이미지가 떨어지면 아이돌의 이미지도 함께 떨어지기 때문이다. 회원들도 들고일어나지만 회사 쪽에서도 해당 임원에게 중징계를 내린다. 팬클럽 자격을 박탈하는 것이다. 최지영씨는 말한다. “임원은 다 신상이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일단 자격 박탈이 되면 아예 공개방송 같은 곳에 발을 들일 수가 없어요. 행여 다른 팬클럽으로 가도 이미 소문이 다 나 있기 때문에 받아주지도 않죠. 사실상 생매장이에요.”

대부분은 어느 정도 시기가 되면 팬클럽을 떠난다. 내부의 치열한 문화에 질려 자발적으로 팬클럽을 떠나 홀로 ‘팬질’을 하기도 한다. 요즘은 팬에서 ‘관계자’로 승격하는 경우도 적잖다. 연예매니지먼트과나 예술경영학과에 입학해서 본격적인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공부한 뒤, 기획사에 취직하는 것이다. 이때 팬클럽 임원 경력은 메리트가 된다. 팬클럽 활동을 거쳐 현재 기획사에 몸담고 있는 박소희(27·가명)씨는 말한다. “임원직 애들을 눈여겨봐요. 가르쳐서 중간 다리 역할을 할 수 있겠다 싶으면 입사 제안을 하는 거죠. 지금 있는 아이돌 팬 매니저의 90% 이상은 팬클럽 출신일 거예요.”

배타적인 한국 팬덤 문화는 아쉬워

텔레비전 연예 오락 프로그램을 점령한 한국 아이돌 그룹 전성시대는 한국의 팬클럽 문화를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자기가 좋아하는 스타 띄우기를 위해 다른 나라에는 없을 정도로 헌신적인 한국 팬덤 문화가 없었다면 아이돌 중흥기도 도래하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일부 팬클럽은 “우리 스타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조금이라도 비판적인 의견에 대해서는 안티팬으로 규정해서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는 배타성을 보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한 음악평론가는 한국 팬덤 현상의 배타적·공격적 성향에 대해 외국의 사례를 들어 아쉬움을 표시했다. “반전·평화의 메시지로 유명한 영국의 세계적 그룹 유투의 공연장 입구에서 일부 안티팬들이 ‘그들은 가식적’이라며 공연 반대 피켓 시위를 벌이는 일이 있었는데 대부분의 유투 팬들은 ‘그런 의견이 있을 수 있다’며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죠. 한국이라면 상상할 수 없는 태도입니다.”

팬클럽, 이럴 때 충돌위기

아이돌 팬클럽이 긴장하는 순간은 경쟁자가 나타날 때다. 다른 아이돌과 활동 시기가 겹칠 때, 각 아이돌 팬클럽 사이에서는 냉기가 흐른다. 말로 신경전을 벌일 때도 있고, 공교롭게 같은 방송에 출연하기라도 하면 자리 배정을 놓고 언성이 높아지기도 한다. 비슷한 멤버 수를 가진 그룹이 데뷔해도 날이 곤두선다. 콘셉트가 겹치기 때문이다. 빅뱅이 상승기에 접어들 무렵인 2007년, 초신성이 데뷔했다. 빅뱅이 5인조, 초신성이 6인조였다. 팬클럽의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이윽고 FT아일랜드가 데뷔했다. 당시를 “일촉즉발의 위기 같았다”고 회상하는 팬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팬클럽들은 응원도구인 풍선 색깔을 놓고 경쟁한다. 자신들이 선점한 색깔을 다른 팬클럽이 비슷한 색으로라도 들고 나오면 사실상 전쟁이 시작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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