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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지터 센터’ 가는 길. 소들이 길에서 가장 자유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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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의 ‘오로빌에서 선우로 놀다’
① 내 마음의 길 잃기
인도 남부의 오로빌. 계급차별이 없는 곳. 인종이나 종교, 세대의 구분도 이곳엔 없다. 텔레비전이나 냉장고가 없는 것은 물론 화폐도 없는 곳이다. ‘새벽의 도시’라는 뜻을 가진 오로빌은 1968년 첫 삽을 뜬 이래 40여년 동안 현재 세계 40여개국의 2500여명이 모여들어 더불어 행복한 삶을 실험하고 있다. 이곳에서 김선우 시인이 지난해 12월 중순부터 올 1월 중순까지 한달 남짓 머물렀다. 김 시인이 모든 게 느리게 흘러가는 그곳에서 누린 즐겁고 재미있고 행복한 일상의 기록을 〈esc〉에 보내왔다. 욕망으로 가득 찬 현대문명의 번잡한 삶을 잠시 벗어나 인도 공동체마을에서 잃어버린 길 찾기에 나선 김 시인의 ‘오로빌에서 선우로 놀다’를 격주로 다섯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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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빌 주민들의 일상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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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새 ‘미스터 블링블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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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어제 또 길 잃었지?
미스터 블링블링이 내 손바닥을 콕 쪼아 빵조각을 가져가면서 한마디 툭 던진다.
어, 어떻게 알았어?
꾸우꾸꾸 이 마을은 내 발바닥 안에 있어. 나 여기 본토박인걸. 너 어제 ‘퍼타일’ 풍차 찾아가다가 ‘다나’에서 한참 헤맸다며? 거기 사는 내 친구가 너 봤다더라. 푸른 목도리 비둘기들도 너 보면서 한참 웃었다던데, 못 들었니? 걔들 떠드는 소리 무지 시끄러운데. 암튼 넌 정말 길치라던데. 너무 웃어대니까 걔들 중 철학자가 한마디 했대. 그렇게 너무 대놓고 웃으면 저 인간 생물이 자존심 상하지 않겠느냐고. 그러면서 너 길 찾는 거 도와줬다던데?
아, 그래! 풍차를 찾아가다가 샛길로 접어들어 엉뚱하게 다나 커뮤니티 근처에서 헤맬 때, 두 갈래 길 왼편에서 유독 맑은 목청으로 지저귀던 새가 있었다. 왠지 그 새가 있는 쪽으로 가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 새가 철학자 새였구나! 어쩐지!
아무튼 너 싫어하는 뱀 안 만난 걸 다행으로 여기라구! 거긴 뱀이 많은 동네야.
잘난 척하면서 미스터 블링블링이 마지막 빵조각을 콕콕 집어간다.
손바닥이 시원해진다. 미스터 블링블링과 아침을 나눠 먹으면서 아침마다 수지침 맞는 효과가 생겼다. 그가 내 손바닥의 빵조각을 찍어 먹을 때 그의 부리가 콕 쫀 손바닥을 통해 온몸 여기저기가 환해지는 느낌이 든다. 그레이스 커뮤니티 전체를 안방 삼은 저 도도한 공작의 걸음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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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잔화와 재스민으로 만다라 만드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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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새해 첫날 원형광장에 사람들이 모여 명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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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링블링의 말마따나 이 동그란 오로빌 마을에서 내 특기는 길 잃기이다. 메인로드라고 할 만한 넓은 길이 있긴 하지만 워낙 뻥뻥 뚫린 한국의 길들을 보고 산 내 시각에서는 ‘아주 조금 넓은 길’일 뿐이다. 몇 군데 벽돌이 깔린 구간이 있기도 하지만 그런 구간은 극히 일부다. 거의 모든 길들이 흙길 그대로다.
조금만 흙이 보여도 큰일 날 것처럼 아스팔트나 시멘트를 싸바르는 한국에선 땅의 맨살을 구경하기가 쉽지 않다. 심지어 자연과 가까이하겠다는 등산로의 산자락 바로 턱밑까지 아스팔트를 포장하는 세상이니까. 여기서 길이란 기본적으로 황톳길이다. 건기에는 흙먼지가 가득 일어나고 몬순기에는 엄청나게 질척거리며 웅덩이가 파이는 오로빌의 흙길들은 편리의 기준으로 보자면 몹시 불편한 길이다. 몇몇 주도로를 포장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실핏줄처럼 커뮤니티들로 이어지는 숲 속의 길들은 모두 황톳길 그대로다. 대다수의 오로빌 주민들은 길을 포장하는 것에 반대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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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스캠프에서 풀과 꽃 등으로 치장하는 아가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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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 놀이터인 유스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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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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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를 편다. 다른 사람에겐 전혀 소용이 없는 나만의 지도를 펴고 나의 모페드(사진)를 향해 걸어간다. 모페드는 오토바이와 자전거의 잡종이다. 기름이 없으면 페달로 갈 수 있게 고안된 오토바이인 셈인데, 오토바이보다 훨씬 가볍고 핸들링이 비교적 간단해서 의외로 하루 만에 모페드를 끌고 여기저기 다닐 수 있게 되었다. 한국에서도 한번 타본 적 없는 오토바이를 인도 남쪽에 와서 배우게 되다니!
내가 모페드라는 물건을 처음 접해본 날, 모페드를 빌리는 쿠마르네 가게에서 내가 탈 모페드를 점찍으면 나는 그 모페드가 그대로 내가 탈 모페드가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오케이! 모페드 가게 일꾼의 시원스러운 대답이 떨어지자 그 모페드가 곧장 수리에 들어가는 거다. 수선하는 작업장에 들어가 보니 덜렁 몸체만 있는 모페드들이 여기저기 서 있다. 작업장 안은 어수선해 보이지만 작업은 나름 질서 있게 진행되는데, 구석진 곳에 기대 있는 모페드에서 부품을 빼와 조립하고, 여기서 미러 가져오고 저기서 안장 가져오고, 이 나사 풀고 저 나사 조이고… 하는 식이다. 작업장 안은 그야말로 완전 분해되어 다시 조립되는 중인 모페드들로 가득했다. 내가 점찍은 모페드에 필요한 부품들이 여기저기 다른 모페드에서 조달되어 다시 조합되는 과정을 지켜보노라니 왠지 유정함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모페드 고물단지 앞에서 ‘묵상’에 빠져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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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놓여 있는 모든 모페드는 다른 모페드의 어떤 부품들을 공유한 상태로 달리게 되어 있다. 달리기 위해서는 남의 부품들을 공유해야만 한다. 신체를 공유한 몸들. 마루야마 겐지의 <봐라 달이 뒤를 쫓는다>가 문득 떠오른다. 기계에도 혼이 있다면, 여러 몸을 거치는 동안 여러 혼의 영향을 받게 되는 건 아닐까. 작업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나는, ‘배기가스를 너무 심하게 뿜는 고물들이라서 싫다!’고 오로빌의 모페드들을 총평해버린 순간에 대해 사과하고 싶어졌다. 이 기계의 운명들. 고물이 다 된 몸으로 이곳까지 흘러와 일할 수 있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힘을 쥐어짜며 일하는 존재들에 대한 기이한 연민이 생겨나버린 거다.
모페드를 처음 타고 오로빌을 돌아다닌 날 밤. 모페드가 등장하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나는 모페드였다. 모페드인 내가 바니안나무(벵골보리수) 밑에 우두커니 서 있다. 모페드인 내가 입선을 한다. 서 있는 자세로 명상을 한다는 말이다. 꿈속에서 모페드가 된 나는 몸이 튼튼해졌다는 생각을 잠시 하지만, 무엇보다 나는 생각하기를 좋아하는 모페드여서 나의 생각을 중얼중얼거리며 말하기 시작하는 거다. 가령 이런 생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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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의 ‘오로빌에서 선우로 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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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를 편다. 오늘은 어디에서 길을 잃을까.
오로빌=글·사진 김선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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