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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03.24 13:28 수정 : 2011.03.24 13:34

제주 협재해수욕장 앞에서 만화가 고필헌(가운데 앉아 있는 이)씨와 ‘쫄깃 패밀리’들이 환호하고 있다.

인기 만화가 고필헌, ‘쫄깃한’ 게스트하우스 실험

매서운 바람은 아직 겨울을 붙잡았다. 드문드문 피어오른 유채꽃은 이제 봄이라 말했다. 쪽빛 바다 위를, 푸른 하늘 아래를 흰 구름이 계절이 무슨 상관이냐는 듯 흘러갔다. 이른 3월의 협재해수욕장, 관광객은 부재했고 자연만 존재했다. 그 풍경의 한편, 공사중인 건물 옆에서 일곱명의 남자가 군불을 쬐고 있었다. 만난 지 채 열흘이 되지 않았건만, 1년은 매일 붙어 지낸 듯 친근해 보였다. 서울 생활에 지쳤고, 제주도에 반해 거기서 살겠다고 마음먹은 그들에겐 ‘쫄깃 패밀리’라는 이름이 붙었다. 5월 개장 예정인 ‘쫄깃쎈타’라는 게스트하우스를 함께 만들고 있는 이들이다. 그들을 불러모은 건 ‘메가쑈킹’이라는 필명으로 더 알려진 만화가 고필헌(38)이다. “우선, 어감이 재밌잖아요. 그리고 쫄깃이라는 상태가 딱딱하지도 퍼지지도 않은 중간상태죠. 여유있고 편안하게 살겠다는 의미예요.” 고필헌은 ‘쫄깃’의 유래를 이렇게 설명했다.

고필헌은 원래 서울 생활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걷는 걸 좋아해 신혼여행도 걷기 여행으로 다니고, 이를 소재로 만화까지 그렸던 그에게 속도와 빠름이 미덕인 서울은 번잡 그 자체였다. “3~4년 전부터 제주도에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올레길을 종단하면서 제주도의 삶을 느끼게 된 거죠.” 그때가 초행은 아니었다. “부모님을 모시고 차를 렌트해서 4박5일간 해안도로를 다닌 게 처음이었어요. 뭐가 있는지도 몰랐죠. 비가 계속 내려서 짜증만 나고, 식당에서 바가지나 쓰고. 제주도 음식은 흑돼지랑 갈치조림만 있는 줄 알았어요.” 관광의 안 좋은 기억은 여행을 통해 바뀌었다. “걸어서 제주도를 다니다 보니 안 보이던 게 보이더라고요. 관광지에는 없는 마을이 있고, 돔베고기나 보말칼국수 같은 맛있는 음식들이 있었어요. 그리고 눈을 가로막는 고층건물이 없었죠. 천천히 다니면서 삶이 보이게 된 거예요.”

올 때마다 그 섬은 고필헌의 머릿속에서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관광지에서 여행지로, 여행지에서 정착지로. 제주도에 대한 마음이 커질수록, 그는 점점 탈도시적인 생활을 하게 됐다. 마음의 결단을 내렸다. 제주도로 내려가기로. 지난해 여름이었다. “가고 싶어서요. 전 하고 싶으면 해요. 인생 한번이니까요.” 당연하게도, 지인들은 “아니, 왜?”라 반응했다. 멀쩡하게 만화 잘 그리다가 내려가려고 하니 누가 반가워할까. 죽을 때까지 만화만 그릴 생각도 없었다. 뭘 하든 재미있는 걸 하고 싶었다. 그를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은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고필헌과 함께 한국 웹툰을 개척한 강풀은 “니가 뭘 하든 난 널 믿는다”고 해준 한 명이었다.

5월1일 문을 여는 ‘쫄깃쎈타’는 한창 공사중이다.

쫄깃 패밀리, 올레길 걸으며 삶을 보았다

처음에는 제주도에서 ‘그냥’ 살 생각이었다. 가서 뭘 하겠다는 마음도 없었다. 다만 자연 가까이 살고 싶었다. 제주시나 서귀포시 같은 번화한 지역은 고려도 하지 않았던 이유다. “자연 가까이 사는 건 좋은데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까 그냥 살면 적적할 것 같더라고요. 매일 새로운 사람들이랑 만날 수 있다면 재밌을 거 아니에요.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지요.” 그래서 게스트하우스를 하기로 했다. 막연한 발상은 전부터 갖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의 힘을 모아 공간을 만들고 내용을 채워 나가고 함께 꾸려 나가는 그런 공간을, 고필헌은 홍대에 만드는 게 꿈이었다. 그 꿈을 이룰 터전이 제주도로 옮겨진 것이다. 둘이 동참했다. 친동생 고원헌(36), 후배 만화가 강민석(36). 서울에서 사업을 하던 동생은 예전부터 여행 관련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 강민석은 고향인 제주도에서 살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역할 분담이 먼저 이뤄졌다. 고필헌이 일종의 ‘얼굴마담’을, 고원헌이 실질적 경영을, 강민석이 게스트하우스 및 카페 관리를 맡기로 했다.

이주 비용 마련이 시작이었다. 여러 사람의 뜻을 모으겠다는 생각이 우선이었다. 티셔츠를 제작했다. 메가쑈킹의 캐리커처가 대문짝만하게 새겨져 있고 사방에 ‘쫄깃’으로 도배된 ‘쫄깃 티’ 500벌을 찍었다. 지인이 운영하는 카페에 낮부터 밤까지 상주하면서 티셔츠를 팔았다. 이주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 쫄깃 티를 판다고 수시로 트위터에 올렸다. 그의 팬들이 티셔츠를 사러 왔다. ‘고객’과 사진을 찍어 다시 트위터에 올렸다. 쫄깃 티는 자연스럽게 홍보가 됐고 500장이 다 팔리는 데 한 달 정도가 걸렸다. 주변의 의류업계 종사자는 단일한 티셔츠를 그렇게 빨리 다 팔았다는 건 기적이라고 했다. 그렇게 비용을 마련해 드디어 서울을 떠났다. 노트북과 옷가지 몇 벌, 그리고 강민석의 차. 세 남자가 가지고 내려간 짐의 전부였다. 지난해 10월 초의 일이다.


건축 쓰레기를 청소하는 쫄깃 패밀리.

티셔츠 팔아 돈 마련, 자원봉사자 수백명 몰려

제주도에는 연세라는 개념이 있다. 보증금 없이 1년치 월세를 한꺼번에 내고 집을 빌리는 식이다. 모슬포의 한적한 주택가에 일단 거주지를 마련했다. 그리고 ‘쫄깃쎈타’ 부지를 찾아다녔다. 좀더 따뜻한 서귀포 인근이 처음 목적지였다. 그러던 중 부동산에서 연락이 왔다. 남서쪽인 협재해수욕장에 단층주택이 하나 나왔다고. “그래서 가봤는데, 바닷가 바로 옆에 있고 건물 안에서 보이는 경치가 죽이는 거예요. 딱, 여기다 싶었죠. 바로 계약했어요.” 리모델링 계획을 세우고 구체적인 아이디어를 모았다. 급할 건 없었다. 겨울을 나고 공사를 시작할 생각이었으니. 기다리는 시간, 서둘러 보내지 않았다. 느릿느릿, 제주도의 이곳저곳을 다니고 느꼈다. 가다가 풍경이 기가 막힌 곳이 나오면 마냥 앉아 몇 시간이고 하릴없이 보낼 수 있는 건 제주의 선물이었다.

그렇게 다니면서 이미 제주도에 내려와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모델이 될 만한 게스트하우스를 찾아다녔다. 낮에는 제주의 풍광을 찍고, 그 경치가 주는 단상들을 수시로 트위터에 올렸다. 쫄깃쎈타를 통해 지향하려는 삶의 방식 역시 그의 주된 트위터거리였다. 해괴망측한 ‘셀카’를 찍어 팔로어들에게 웃음을 주기도 했다. 밤이 되면 유산균 잔뜩 들어 있는 제주막걸리 몇 병 사들고 친해진 게스트하우스를 찾았다. 구운 감귤을 안주 삼아 여행객들과 어울리며 친구를 만들어 나갔다. 관광객들이 호텔에 묵으며 일행과 함께 유명한 곳만 보고 올라간다면, 여행객들은 게스트하우스에서 새로운 일행을 만들고 알려지지 않은 곳을 느끼려 한다. 정해지지 않은 느린 일정을 통해 제주도에서 살고 싶다는 마음이 싹튼다. 겨울을 지내는 동안 서울 친구들과 팬이 대부분이던 그의 팔로어에 제주도를 동경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갔다. 서울에서 친구가 놀러 와도 알려지지 않은 맛집과 명소들을 안내해줄 수 있을 만큼 조금씩 섬사람이 되어갔다.

본격적인 공사를 앞둔 2월 말, 고필헌은 트위터와 블로그에 한달 반 동안 제주도에 머물며 공사를 도와줄 자원봉사자를 모집한다는 글을 올렸다. 단 하루 만에 수백명의 지원자가 몰렸다. 조건은 오직 숙식과 쫄깃쎈타 평생 무료이용권 제공뿐인데도. 그런 과정을 통해 네 명이 뽑혔다. 회사를 다니던 박준석(36), 카피라이터 출신의 이윤석(35), 프리랜서 개발자인 이효준(30), 건축과를 나와 영국에서 게스트하우스 운영 경험이 있는 오민기(29). 그들에겐 제주도에 살고 싶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윤석은 “만약 돈 받고 하는 거였으면 안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내가 하고 싶어서 같이 한다는 것이 중요했어요.” 생면부지의 네 남자는 그날부터 바로 한방에서 생활을 시작했다. 함께 밥을 지어 먹고 함께 잠자리에 들고 함께 일하러 나갔다. 계급 없는 군대처럼, 그들은 금세 친해지고 마음을 텄다. 서울을 떠난 지 며칠 되지도 않았건만 그 며칠 전의 삶이 아득히 느껴졌다. “서울에 있을 때는 내가 뭘 위해 사는지 몰랐어요. 그런데 여기서는 내가 나를 위해 살고 있다는 게 느껴져요.”(박준석) “오히려 내려와서 서울 친구들과 관계가 돈독해졌어요. 회사 다닐 때는 한달에 한번 만나기도 힘들었거든요. 그런데 제주도 간다고 하니까, 일부러 보러 오겠다고들 하더라고요.”(이윤석) 그저 그런 도시의 일상을 드문드문 담아내던 이효준의 블로그에는 쫄깃쎈타 공사 일지가 매일 새로 올라오고 있다.

게스트하우스지만 본질은 커다란 가족 개념

아침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일단 이렇게 일과를 정해뒀지만 빡빡하지 않다. 중장비가 들어오거나 할 일이 없으면 근처 바닷가를 가서 일용할 양식을 조달하기도 한다. 거북손, 보말 같은 고둥류도 캐고 손낚시로 이름 모를 고기를 낚아 요리해 먹는다. 자전거를 타고 제주 이곳저곳을 다니고 저녁에는 술자리도 종종 갖는다. 매일 보는 얼굴끼리만 지내는 것도 아니다. 쫄깃쎈타 공사 현장은 늘 손님들이 찾는다. 양손 무겁게 먹을거리 싸들고 그들을 격려하고 응원하러 찾는 이들이다. 관광객도 있고 여행자도 있고 현지인도 있다. 아리따운 여성들도 적잖아 남자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그만큼 도시 생활에 각박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는 거죠. 제주도에 오지 못하더라도 내가 올리는 글이나 과정을 보면서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 같아요.” 몸은 고되어도 하루하루가 대학 신입생의 엠티 같은 나날이니 그럴 만도 하다. “‘인간극장’에서 섭외가 왔었어요. 하겠다고 했는데 짤렸어요. 역경이 없다는 거예요.”

쫄깃쎈타가 아무 손님들이나 와서 휘젓고 가기보다는, 느리고 친환경적인 문화적 여행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함께하는 공간이 되었으면 하는 게 그들의 바람이다. “게스트하우스의 성격을 띠고 있지만 본질은 거대한 가족 같은 개념이에요. 서울 친구가 오래 내려와 있고 싶으면, 올 수 있는 공간이 있는 거죠. 그냥 노는 게 아니라 자기 특기를 살려서 뭘 할 수도 있고, 읽지 않는 책을 기부하는 식으로 정신적 지분을 나누는 곳이 됐으면 해요.” 5월1일 문을 열지만, 일곱 남자에 의해 완성된 공간이 아니라 더 많은 이들에 의해 완성될 공간으로 남기기 위해서 고필헌은 벽에 그림을 그려넣기로 한 계획을 취소했다. “저기 구름처럼 하얀 도화지만 일단 만들려고요.” 그는 손가락으로 푸른 하늘을 가리켰다. 먼지 한 점 없는 하늘, 구름은 그 자체로 장관이었다.

제주=글 김작가/대중음악평론가 noisepop@hanmail.net·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올레길 지키는 ‘게으른 조랑말’

제주에 대한 인식을 바꿔놓은 건 올레길이다. 한라산, 천지연 폭포, 성산 일출봉이 제주의 전부인 줄 알았던 육지 사람들은 올레길을 걸으며 제주의 아름다운 민낯을 만났다. 올레길의 명물 중 하나는 제주 여성들이 헌 천을 한땀 한땀 기워 만든 조랑말 모양의 간세인형이다. 간세는 제주어로 게으르다는 뜻. 제주도에서만 살 수 있었던 간세인형을 서울에서 만날 수 있게 됐다. 24일부터 27일까지 서울 안국동 갤러리 아트 링크에서는 ‘생명을 깁는 따뜻한 바느질’전을 연다. 양희은·김미화·정혜신·한비야 등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직접 만든 다양한 간세인형을 전시·판매하며, 수익금은 전액 올레길을 유지하는 데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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