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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의 종합운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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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의 ‘오로빌에서 선우로 놀다’] ③ 오로빌에서 교육, 가장 행복한 방식으로 존재하는 법 배우기
겨울 햇살이 따뜻하고 청명한 날, 솔라키친에서 밥을 먹고 2층 카페로 올라가 커피를 마시는 참이었다. 은수와 야엘과 함께 놀고 있는 한국 아이가 있었다. 부모와 함께 여행을 온 그 아이는 오로빌에 사는 한국 아이인 은수 또래의 명랑하고 활기찬 소년이었다. 세 아이가 뛰어다니다 내 테이블 곁으로 와서 내가 무심결에 펼쳐준 수첩 위에 이름 쓰기 놀이를 시작했다. 내 수첩은 순식간에 아이들의 미니 스케치북으로 바뀌었다. 볼펜을 든 은수가 길쭉한 걸 그리더니 보트란다. 그러더니 물고기를 그리기 시작한다. 야엘도 게스트 한국 아이도 모두 조그만 수첩에 머리를 들이밀며 친구가 하는 양을 집중해서 보고 있다. 은수가 물고기를 여러 마리 그린 후였다. 갑자기 게스트 한국 아이가 “폭탄!”이라고 말하는 거다. 그 소리에 내가 깜짝 놀라 수첩을 보았더니 은수는 볼펜을 꼭꼭 찍어 조그만 동그라미들을 그리고 있다. “웬 폭탄?” 내가 말하자, 아이가 이번에는 “어뢰!”라고 말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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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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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스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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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가 폭탄·어뢰로 보이는 한국 소년
이런! 그러고 보니 천안함 사건, 연평도 포격 등으로 어뢰니 폭발이니 이런 말들을 한창 들어왔을 한국 아이가 그런 단어를 입에 담는 게 무리도 아니다. 아이들은 채색하지 않은 도화지 같다고 누가 말했던가. 은수도 야엘도 ‘어뢰’라는 말을 못 알아들었다. 야엘은 한국어를 못하니 당연히 못 알아듣겠지만 은수는 한국어와 영어를 함께 쓰는데도 못 알아듣는다. 어뢰에 대한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은수는 여전히 열심히 동그라미를 그리는 중. 그게 뭐냐고 내가 슬쩍 물었다. “응, 물고기 밥 주는 거야.” 은수가 대답한다. 한국에서 온 아이가 “폭탄, 어뢰!”라고 다시 외친다. 이럴 때 교육학적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나는 수첩의 다음 장을 슬그머니 넘겨주었다. 다른 거 그려보자. 그랬더니 이번엔 야엘이 커다란 아이스크림을 그린다. 한국 아이가 볼펜을 넘겨받더니 야엘이 그린 아이스크림 주변에 지그재그로 선을 긋는다. 아이가 말하기를, 전기가 통하는 아이스크림이란다. 전기 아이스크림! 아, 이런 상상력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한국 아이가 내게 묻는다. 전기가 영어로 뭐예요. 아이는 야엘에게 전기 아이스크림에 대해 설명해주고 싶은 모양이다. 나는 망설이다 대답해준다. 아이의 얼굴이 환해지더니 우렁찬 목소리로 말한다. 이건 일렉트릭 아이스크림! 훔쳐 먹을 수도 없고 빼앗아 먹을 수도 없어. 전기가 통하거든. 아이가 설명하는데 은수와 야엘은 이번에도 멀뚱멀뚱한 채 전기 아이스크림이라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다. 에이, 재미없다 우리 저기 가서 놀자. 한국 아이가 말한다. 은수와 야엘 모두 끄덕이며 와아 달려간다. 약간의 긴장감 같은 것으로부터 나도 풀려난다. 아이들이 놓여 있는 환경이라는 게 어떤 의미인지, 짧은 순간 복잡한 마음의 황톳물소나기가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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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스캠프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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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충을 형상화한 재활용 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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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빌에 도착해 내가 처음 본 공연은 유스캠프의 크리스마스 시즌 공연이다. 도착 이틀 후였다. 풀문을 향해 가는 달빛이 숲속 공터를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겨울 해는 저녁 7시 무렵 지고, 숲속 파티는 그 시각에 시작된다. 유스캠프엔 요철이 있는 투명 플라스틱 패널을 반원으로 펼친 무대 지붕 아래 서커스장 같은 분위기의 천막이 드리워져 있다. 숲속 흙마당에 의자들이 놓이고 공연장을 중심에 두고 마당가로 피자며 짜이 등 소소한 먹을 것들이 요리되고 있었다.
거기서 브랜뉴밴드의 아이들이 공연을 했다. 중고등학교 학생들로 구성된 브랜뉴밴드에는 한국인 소년 두 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노래, 피아노, 드럼, 플루트, 색소폰 등으로 구성된 아이들의 숲속 공연은 정말이지 요정들의 세계가 따로 없었다. 고소한 냄새가 나고 여기저기서 밤새들이 울고 달빛 아래 밤꽃들이 피었다.
그리고 이어진 순서는 조니 밴드. 못 되어도 70살은 되어 보이는 전형적인 히피 할아버지 조니의 밴드는 모두 노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무릎까지 오는 치마에 터번을 두른 조니가 어찌나 열정적으로 노래 부르고 춤을 추는지 저러다 넘어지실라, 살짝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런데 조니의 밴드가 노래하고 춤추기 시작하자 가장 열광하는 것은 어린아이들! 들썩거리던 어린아이들이 흙마당으로 하나둘 뛰어나가 이내 팔짝거리고 아이들의 춤에 10~20대가 합류하고 서서히 어른들이 가세하더니 숲속 공터는 완전히 춤의 도가니로 빠져들었다. 어린아이들의 열렬한 호응은 조니 밴드의 음악성 같은 걸 따질 필요가 전혀 없게 만들었다. 모든 연령층이 모여 그렇게 행복해하는 무대를 나는 거의 처음 본 셈.
히피 할아버지 조니의 직업은 아이들과 재미나게 놀기
내 옆에 앉은 한 오로빌리언이 조니가 저렇게 어린아이들에게 인기가 있는 이유를 말해주었다. 오로빌에 처음 와 적응을 못하는 어린아이들과 재미나게 놀아주는 일이 바로 조니가 오로빌에서 하는 업무란다. 아하! 어린아이들의 그 열화와 같은 성원의 배후가 그거구먼! 이 할아버지의 ‘일’은 아이들과 노는 거였구먼! 오래전 시인 황학주가 아프리카 오지에 학교를 세우고 스스로 맡은 과목이 ‘놀기’였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아프리카 아이들에게 ‘놀기’를 정식과목으로 가르치는 시인의 사유를 부러워했던 기억이 났다.
가장 기본적인 조명만 자체 발전기를 돌려서 비추던 숲속 마당, 미처 카메라를 챙겨가지 못해 아무것도 찍을 수 없어 너무 아까웠던 그 순간들. 달빛 아래 어른들과 자연스레 섞인 그 아이들이 만들어내던 반짝거림들! 그 몸의 반짝임들은 이 아이들이 어떤 교육 속에 있는지 궁금하게 했다.
오로빌에 와서 내가 정말 부러워한 것 중 하나가 교육이다. 오로빌에는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있다. 모든 학교가 완전 무상교육, 무상급식임은 말할 것도 없다. 고등학교 아이들은 심지어 학교에서 정기적으로 용돈을 받는다. 아이들의 방과 후 모임들과 교제를 배려한 지원금인 셈이다. 솔라키친 2층의 카페에 삼삼오오 모여서 뭔가 토론하고 대화하며 노는 아이들을 자주 보는데 그런 방과 후 모임들에 사용될 용돈까지 학교가 섬세하게 배려하고 있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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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원 건물 벽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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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마당에 아이들이 직접 그린 색그림 콜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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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깨우기 수업으로 아이들은 예술가
내가 감탄을 금하지 못한 ‘몸 깨우기, Awareness through the Body’ 같은 수업을 통해 일찍부터 자연과의 교감을 섬세하게 터득한 아이들이라서일까. 학교가 너무 재미있다고 말하는 아이들의 눈빛은 대개 정말 행복한 존재감으로 일렁거린다. 학교의 목적이 일류대학에 들어가 좋은 직장을 얻고 부자 되기를 원하는 시스템 속에 있지 않고 개개인이 가장 행복한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도록 돕는 교육이어서 아이들이 행복한 것은 당연한 것일까. 그렇다면 사회가 바뀌지 않으면 학교도 변하지 못하는 것일까. 나는 생각이 많아지곤 했다.
눈가리개를 한 채 나무를 포옹한 소년. 다른 소녀와 손바닥을 마주한 채 눈을 감은 소녀. 나뭇잎 아래서 귀 기울이는 소년. 촛불을 응시하는 소녀. 눈을 감고 두 손바닥으로 기공을 만드는 소년소녀들. 자신의 심장을 느끼며 숨을 들여다보기. 소리를 낼 때 제 몸의 공명 느끼기. 돌과 나무를 껴안고 물과 불을 느끼고 자연 속의 모든 질료들과 자신의 몸을 이루는 질료들을 깨닫기. 온몸으로 느끼고 받아들이기. 표현하기. 이런 몸 깨우기 수업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학교이니 아이들이 낱낱이 예술가가 아니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나 싶다.
오로빌에는 고등학교가 두곳 있다. 라스트스쿨과 퓨처스쿨. 라스트스쿨은 오로빌 초기 꿈에 가장 근접한 교육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교과는 역사·문화·언어·문학·철학·수학·과학에 다양한 예술과목이 보태진다. 5년제 중등과정이지만 5년제라는 게 실은 별 의미가 없다. 미리 정해진 교과과정이 없고, 아이들은 자신이 공부하고 싶은 커리큘럼을 스스로 짠다. 심지어 라스트스쿨 아이들은 자신이 언제 졸업할 것인지를 스스로 정한다. 물론 졸업장 같은 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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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의 ‘오로빌에서 선우로 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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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스쿨은 완벽하게 이상적이지만 외부의 대학에 진학하기 힘들다는 문제가 생긴다. 한국의 대안학교들이 안고 있는 문제와 흡사하다. 이런 현실적인 문제를 고려해 나중에 생긴 고등학교가 퓨처스쿨인데 학생들의 대학 진학 공부를 지원하면서 이곳 특유의 교육철학도 병행해가고 있다.
기억나는 스리 아우로빈도의 말이 있다. “자신의 성장은 자신의 마음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곱씹어볼수록 동의가 된다. 자기 내면의 소리를 따라 성장하는 교육이 사라진 학교가 배출해온 우리의 모습 속에는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이 자신의 욕망이라고 착각하는 슬픈 그림자도 한 녘에 있을 것이다.
오로빌=글·사진 김선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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