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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04.07 15:05 수정 : 2011.04.07 15:05

김선우의 ‘오로빌에서 선우로 놀다’

[김선우의 ‘오로빌에서 선우로 놀다’] ④ 가격표 없는 상점 ‘푸르투스’, 식대 없는 식당 ‘솔라키친’

어디든 사람 사는 곳은 의식주를 해결해야만 공동체로서의 기능이 유지된다. 오로빌의 경제는 자본주의 방식과 사회주의 방식을 결합하여 줄타기하면서 살아남았다. 오로빌은 주거에 있어 원칙적으로 무소유이자 공동소유 원칙이 지켜지며 그 외엔 사적소유를 유동적으로 적용한다. 푸르투스(Pour Tous)라고 부르는 슈퍼마켓이 오로빌의 경제 개념을 읽을 수 있는 좋은 예이다.

현재는 올드 푸르투스와 뉴 푸르투스, 두 개의 푸르투스가 있다. ‘모두를 위하여’란 뜻을 지닌 푸르투스는 일종의 ‘생협’ 같은 이미지다. 쌀, 채소, 과일, 가공식품 등의 식료품과 기타 생필품을 모두 여기서 구한다. 대부분 오로빌에서 생산한 유기농 재료들이다.

뉴 푸르투스 입구
뉴 푸르투스에서 파는 각종 유기농산물
오로빌리언들만 사용하는 곳인 뉴 푸르투스의 모든 물품엔 가격표가 없다. 그러니 오로빌리언들은 푸르투스에서 자신이 가져가는 물건들의 가격을 정확히 모른다. 다만 ‘모두를 위하여’라는 개념에 맞게 자신에게 꼭 필요한 것들을 알아서 가져다 쓴다. 물론 관리자들은 그들이 가져가는 생필품을 기록하고 액수로 환산하고 있어서, 매달 개인별 사용액이 체크된다. 자신의 기여금(급여)보다 많이 쓰는 이도 있고 적게 쓰는 이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들쑥날쑥 차이가 나지만 전체적으로는 대충 수지가 맞춰진다고 한다. 몇 달을 계속해서 사용량이 과도하게 많은 가구는 나중에 따로 상담을 한다. 한 가구가 너무 많은 것을 가져가면 다른 가구가 피해를 볼 것이기 때문이다. 푸르투스는 일종의 슈퍼마켓이지만 푸르투스를 통해 추구하는 것은 이익이 아니라 나눔의 원칙을 실험하는 것이다.

뉴 푸르투스에 가격표가 없는 것은 실용적인 측면보다는 오로빌 정신이 무엇인지를 환기시키고자 하는 상징적인 측면이 강하다. 돈을 주고 상품을 사고파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을 ‘셰어’하는 의미라는 거다. 푸르투스는 오늘도 계속된다.

뉴 푸르투스에서 한 주민이 어깨 근육통이 있다는 이웃에게 스트레칭을 해주고 있다.
뉴 푸르투스 냉장고 속

아침에 동나는 우유, 부지런해야 먹어


올드 푸르투스는 게스트카드를 가진 게스트들도 사용할 수 있다. 올드 푸르투스의 제품들엔 가격표가 붙어 있다. 가격표가 있으므로 거기서는 내가 이것을 ‘산다’는 행위가 분명해진다. 현재로서는 뉴 푸르투스의 이상과 원칙을 존중하는 분위기이지만, 여기에도 물론 다른 입장들이 있다. 러시아 출신 오로빌리언인 올레크는 뉴 푸르투스의 방식이 싫다고 한다. 그는 옛 소비에트 체제가 붕괴할 즈음 소비에트에 살았던 사람이다. 우리 나이로 40대 중반이니 10대와 20대의 기억 속에서 그는 늘 위에서 주는 대로 배급을 받고 살았다. 그 기억을 끔찍하게 생각하는 올레크는 뉴 푸르투스에 가지 않고 한참 먼 올드 푸르투스를 이용한다. 이유는 자신이 사용하는 것들을 자신이 알고 싶다는 것. 그런데 그가 ‘내가 이것을 가져올 때 이것이 얼마인지 알고 싶다’고 말할 때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내가 가진 돈만큼 물건을 가져갈 수 있다는 것과는 조금 다른 원칙이 작동한다. 그는 “내가 하는 모든 행위에 깨어 있고 싶다”는 입장을 취하는 거고, 그런 입장 역시 유의미한 하나의 관점으로 오로빌에서 공존한다.

뉴 푸르투스나 올드 푸르투스엔 각종 생필품이 모두 있지만 제품 수가 그다지 많지는 않다. 우리나라의 생협이나 한살림 매장을 떠올려보면 대충 짐작할 수 있겠다. 식품들은 오로빌에서 직접 만든 건강한 먹을거리들이다. 완전한 유기농인 오로빌 우유는 아침에 동이 나기 때문에 우유를 꼭 먹고 싶은 사람은 부지런해야 한다. 물질은 아주 부족하지는 않아도 풍요롭지는 않다. 그런데 물질이 풍요롭지 않다는 것이 오로빌 사람들 전체적인 삶의 질과 무관하다. 무엇보다 가난한 오로빌리언과 부자 오로빌리언 사이의 차이로 인해 생기는 위화감 같은 게 오로빌엔 없다. 자기 통장에 돈이 얼마가 있느냐로 인해 위화감이 생길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니다.

푸르투스 게시판

짐작되겠지만, 온대지방에 살던 사람들에게 인도의 여름 기후는 거의 최악이다. 더울 때 기온이 50도까지도 올라간다. 인도에 오래 산 사람들은 이렇게도 말한다. 인도가 정신 수행의 나라가 된 것은 사람들이 영적이어서라기보다 기후 때문이라고. 50도까지 온도가 올라가면 정신이 몽롱해지고 몸은 어찌나 거추장스러운지 꼼짝 않고 나무그늘에 앉아서 최대한 안 움직이는 게 상책이다. 붓다도 그런 어느 날 문득 인간의 ‘고’에 대해 정각을 이룬 게 아닐까. 기후가 너무 극한적이니 온대지역에서 태어나 자란 일부 오로빌리언들은 한여름이 되면 고국으로 돌아간다. 남인도의 한여름을 견디기가 너무 어려운 탓이다.

물질도 풍족하지 않고 기후도 열악한 이곳으로 그러나 오로빌리언들은 다시 돌아온다. 쾌적하고 안락한, 원하는 모든 물건들이 가게마다 즐비한, 대부분 선진국이라 할 나라들에서 여름 한철을 보내고 나면 돌아오기 싫어질 것도 같은데 왜 이곳으로 돌아오는 걸까. 체감하는 삶의 질, 삶의 만족도가 높고 크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뿐이다.

뉴 푸르투스에 진열된 식품

유기농산물 햇빛으로 요리…잔반 거의 없어

깊은 밤. 방 밖에서 뭔가 툭, 떨어진다. 파파야가 떨어졌다는 걸 직감적으로 안다. 아, 파파야! 전등을 들고 주우러 가고 싶은 맘이 굴뚝같다. 그런데 살짝, 누군가 머뭇거리는 느낌, 이윽고 사사삭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다람쥐나 고양이 같은 작고 날렵한 것들이 움직이는 것이다. 잘 익어 떨어진 파파야를 탐내는 게 나만이 아닌 모양이다. 파파야를 야식 삼고 싶은 그는 누구일까.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이 많은 마을이니 이곳의 야생동물 중에도 베지테리언이 많을 거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호오, 파파야를 탐내는 베지테리언 고양이!

오로빌의 공동식당인 솔라키친에서는 이름처럼 태양열로 밥을 짓는다. 반경 15m에 달하는 솔라키친의 태양열 집열접시가 모아준 에너지가 밥을 만드는 데 고스란히 쓰인다. 맑은 날에는 600㎏의 증기를 만들어 2000명분의 식사를 마련할 수 있다. 흐린 날에는 전기에너지를 병행해 쓴다. 솔라키친의 음식 재료들은 오로빌의 농장에서 나오는 유기농산물을 주로 사용한다. 하지만 아직 완전자급은 되지 않아서 방갈로르(인도 카르나타카주의 주도)에서 부족한 유기농 식재료를 사온다.

오로빌에 사는 사람의 절반 정도가 솔라키친에서 식사를 하는 것 같은데, 나머지 절반은 자기 나라 음식을 집에서 해먹는 이들이거나 솔라키친으로부터 먼 거리의 커뮤니티에 사는 사람인 경우가 많다.

뉴 푸르투스 입구에 폐종이로 만든 재활용백 수거 바구니가 놓여 있다.

오로빌리언 정신 이미 깃든 우리 전통

이 식당에서도 현금을 주고받지 않는다. 오로빌리언들은 자기 계좌의 번호를 불러주면 되고 게스트들은 오로빌에서 발급받은 게스트카드를 보여주면 된다. 밥을 먹으러 처음 솔라키친에 갔을 때 나는 조용한 ‘명상적’ 분위기를 기대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것에 놀랐다. 커다란 식당의 내부와 외부의 식탁을 가득 메운 오로빌리언들의 활기차고 자유롭게 오가는 담소. 주민들이 서로 안부를 나누고 포옹하고 누구 공연이 볼만하다는 둥, 베갯잇을 바꿔야 하는데 퐁디셰리의 어느 가게에서 세일을 하고 있다는 둥 소소한 일상의 많은 정보들이 이곳에서 교환되고 있었다.

식사 도구로 사용되는 것은 숟가락 하나 포크 하나. 심플 그 자체. 맘에 든다. 나는 식사 한번 하는 데 여러 개의 포크, 나이프, 숟가락을 번잡하게 쓰기를 강요하는 서양식을 싫어한다. 부담스럽기도 하거니와 솔직히 말하자면 좀 우스꽝스러워 보인다. 세계 도처에 아직도 밥을 굶는 사람들이 많고 맨손으로 밥을 집어먹는 사람들도 많은데 꼭 포크, 나이프 갈아가면서 음식을 먹어야 하는 그런 절차가 거북하고 그 에너지가 아깝다.

솔라키친

식사가 끝나면 자신이 쓴 식기를 물로 헹구어서 설거지통에 담는다. 일부 게스트를 제외하면 음식을 잔뜩 남기고 버리는 오로빌리언은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다. 생각해보니, 한국은 영적인 전통이 좋은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땅속 미물들이 다칠까봐 뜨거운 물을 함부로 버리지 않는 전통을 가졌고, 콩을 심을 때도 새나 짐승과 나눠먹는다는 마음으로 세알씩 심곤 했던 조상을 가졌다. 각성한 서양 사람들이 ‘영적’이라며 배우려고 하는 생활의 좋은 습관들이 동양적 삶 속엔 오래전부터 자연스럽게 스며 있는 경우가 많다.

오로빌=글·사진 김선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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