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1.04.21 11:47
수정 : 2011.04.21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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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의 ‘오로빌에서 선우로 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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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의 오로빌에서 선우로 놀다]
⑤ 마지막회 - 오로빌은 노력중인 도시, 진화중인 공동체
사다나 포리스트는 솔라키친에서 출발하는 버스로 20분 정도 걸리는 오로빌 외곽의 커뮤니티 숲이다. 이스라엘 출신의 임상심리학자 부부인 오로빌리언 아비람과 요릿이 2003년 이곳 황무지 70에이커를 사서 나무를 심기 시작한 것이 시초이다. 당시 원주민들조차 이 땅에 숲을 만드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말리던 황무지는 7년이 지난 지금 싱그러운 숲으로 변신했다. 오늘도 사다나 포리스트의 숲 가꾸기 열정에 매료된 청년들이 전세계에서 자원봉사를 위해 찾아오고 있다.
사다나 포리스트에 처음 갔을 때 맛본 오렌지머핀의 맛! 달걀과 우유를 쓰지 않고 유기농설탕만 첨가해 만든 오렌지머핀의 그토록 담백한 향기, 그토록 자연스러운 거친 맛은 메인오두막에서의 저녁식사 풍경과 함께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자그마한 탈리 하나에 숟가락 하나만이 식사 도구의 전부인 그 식사시간, 입속에 들어오는 음식의 그 강렬하고 풍요한 미감은 ‘거친 음식’의 완전한 전형이었다. 쇠 그릇에 조그만 구멍을 뚫어 필요한 만큼의 물을 붓고 그 구멍으로 흘러나오는 물을 사용하는 워시스탠드(washstand)를 보고 나는 아주 한참 웃었는데, 너무나 귀여웠기 때문이다. 바나나나무와 잘 어울린 모양새도 마음에 들고 실제로 물을 퍽 절약할 수 있는 아이디어인지라 나중 언젠가 마당 있는 집에 살 수 있게 되면 나도 한번 설치해보리라 마음먹었다. 사다나의 모든 전기는 태양열로 자급한다. 흐린 날엔 자전거 동력을 이용하여 전기를 보충하는데, 전기를 만들기 위해 세계 각국에서 온 자원봉사자 젊은이들이 일렬로 자전거를 타고 열심히 페달을 밟으며 구슬땀을 흘리는 장면은 또 어떤가. 아, 너무너무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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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형광장. 새해맞이 꽃 만다라 장식 중. 중간에 보이는 흰 돌항아리에는 세계 각국의 흙이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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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을 아끼고 나무를 사랑하는 사람들
사다나 포리스트에선 당번을 맡은 자원봉사자가 ‘모닝 송’으로 사다나의 아침을 깨운다. 비록 자원봉사자로 입소했다 해도 사다나의 모든 일들엔 일체의 강제성이 없다. 심지어 일하고 싶지 않으면 그냥 쉬어도 된다. 이른 아침의 햇살 속에서 나무를 심는 것이 ‘첫번째 공동체 일’이다. 땅을 파고, 거름과 물을 붓고, 묘목을 심고, 나무 주변의 수분 증발을 막기 위해 나뭇잎을 긁어모아 묘목 밑동을 덮어주고, 흙으로 둑을 만들어 물길을 막아주는 것까지가 나무 한 그루를 심는 일이다. 아침의 나무심기는 보통 2시간30분 정도. 그리고 돌아오면 서너 가지의 과일 샐러드와 죽으로 아침을 먹고 좀 쉰다. ‘두 번째 공동체 일’이 시작되는 시간은 오전 10시. 이때는 70~80여명의 구성원들이 함께 살아가는 데 실제적으로 필요한 일들을 한다. 식사 준비와 부엌일, 아궁이에 불 때기, 화장실 청소, 세면대에 물 채우기, 나무 땔감 자르기, 침대 시트나 베개 시트 세탁하기, 오두막 청소하기, 숲에서 나무 줍는 일, 주워온 나무 톱질하는 일, 채소밭에 물 주기, 정원 돌보기 등을 하다 보면 점심시간이 된다. 다 같이 메인오두막에 모여 점심을 먹고, 점심시간 이후엔 자유다. 책을 읽거나 각종 워크숍에 자율적으로 참여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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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트리만디르 앞에서 새해 첫날을 맞는 오로빌리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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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2년, 3년 된 어린 나무들 곁을 지날 때 둑을 밟지 않게 조심해달라고 부탁하는 청년의 눈빛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한참 바라본다. 물동이를 나르는 씩씩한 아가씨가 너무 매력적이어서 또 한참을 바라본다. 땀방울이 송골송골 흐르는 그녀의 편안한 민소매 티 밖으로 유두가 살짝 비친다. 노브라다. 서양인치고는 자그마한 그녀의 가슴이 너무나 싱그러워 보인다. 누군가 분명 흘긋거릴 만도 한데 이곳의 청년들 사이에서는 그런 관음증의 시선이 거의-전혀라고 해도 좋을 만큼 느껴지지 않는다. 저녁식사 후에는 춤과 노래 파티가 기다리고 있다. 매주 금요일은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면 오두막 한쪽에 흰 천이 내려진다. 랩톱과 가장 간단한 상영 장비만 가지고 즐기는 영화들이지만 콘텐츠는 정말 풍부하다. 팔베개를 하고 누워서 보는 오두막에서의 영화감상 또한 사다나 포리스트의 낙(樂)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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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다나 포리스트의 야외 부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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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밤엔 비가 왔다. 모처럼 일찍 일어나 아침 산책을 나섰다. 저만치 여장부 같은 몸집의 인디언 여인이 숲 속에서 움직이는 게 보인다. 나는 그녀가 버섯을 따는가 했다. 어렸을 적 비 갠 뒷산으로 달려가 칼국수에 넣어 먹을 꾀꼬리버섯 같은 걸 찾아내곤 하던 기억 때문이었을까. 그런데 그녀는… 풀잎을 닦고 있다…. 아침 숲의 고요 속에서 그녀 있는 쪽으로 햇빛이 그물처럼 떨어진다. 풀잎을 닦아주는 여자라니! 아파트 베란다에서 키우는 난도 아니고, 나무며 풀 천지인 숲에서 특별해 보일 것 없는 덩굴 풀의 넓적한 잎사귀를 닦아주는 여자가 있다. 인기척에 고개를 돌린 여자가 한순간 내게 아주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이내 풀잎 닦는 자세로 돌아간다. 매우 고요하고 매우 평화로운, 그녀 주변에 흐르는 어떤 맑은 에너지가 있다. 그녀가 닦아주고 있는 풀잎 몇 장이 내 눈에 클로즈업되어 들어왔다. 지난밤 내린 비로 질척해진 황토 흙에 누군가 부주의하게 발을 디디거나 급하게 오토바이를 몰아갔는지 잎사귀가 넓적한 덩굴 풀이 황토 흙을 온통 뒤집어쓴 채였다. 나는 그제야 그녀가 하고 있는 일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마도 아침 산책을 나온 그녀에게 황토 흙을 뒤집어쓴 그 동그란 잎사귀의 덩굴 풀이 말을 걸었겠지. 이봐, 흙탕을 뒤집어써서 내가 기분이 나빠. 이제 곧 해가 뜨면 광합성도 해야 하는데 숨 쉬기도 힘들고. 나 좀 닦아줄 테야? 라고. 그런 마음의 요청을 받았다면 어떻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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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다나 포리스트의 숲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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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는 없다…또다른 꿈 꿀 뿐
오로빌에서 맞은 새해 첫날을 오래 기억하게 될 것이다. 이른 새벽 마트리만디르 옆 원형광장으로 갔다. 많은 사람들이 원형광장 계단에 앉아서 저마다 고요하다. 좌선을 하기도 하고 다리를 뻗고 앉기도 하고 연인과 어깨를 붙이고 앉아 묵상에 잠기기도 한다. 누군가 꽃 만다라를 준비하고, 누군가 앰프와 스피커를 점검한 후 내려가고, 누군가 꽃 만다라 속의 초들에 불을 붙이고, 그것이 새해 첫 의식의 시작이다. 그리고 그것이 다다. 사람들이 모여 앉아 있다 천천히 아침을 맞고 작은 스피커에서 음악과 오로빌 헌장이 흘러나오고 잠에서 깬 새들이 첫 목소리를 선물하고 시간이 흐르고… 이윽고 명상과 고요에서 깨어난 사람들이 포옹하고… 그리고 저마다의 집이나 일터로 돌아간다. 하나둘 사람들이 자리를 뜨고 모든 사람이 다 돌아가면 누군가 앰프를 거둔다. 나는 원형광장에 홀로 남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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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다나 포리스트의 태양열 전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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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빌은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고 동경하는 곳이면서 동시에 오해가 많은 곳이기도 하다. 나의 글 또한 하나의 오해를 더 보태 놓는 것은 아닌지 염려도 된다. 많은 사람들이 오로빌을 유토피아라는 단어와 연결시키지만, 오로빌리언 중 오로빌이 유토피아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웬 유토피아?” 이렇게 되묻는다. 오로빌은 다만 꿈꿀 뿐이다. 이해도 오해도 외부에서 만든 것들이고, 다만 오로빌리언들은 당면한 여러 문제들을 자신들의 방법대로 개선해 나가는 중일 뿐이다. 노력중인 도시. 진화중인 도시.
자급자족의 도시가 되려면 오로빌은 아직 갈 길이 멀다. 개발 붐이 가져온 각종 폐해도 오로빌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주변 원주민 마을들의 농약 살포, 쓰레기 문제 등은 엄격한 생태적 유기농업을 시행하는 오로빌에 큰 고민거리다. 지금까지 겪어온 것 못지않게 헤쳐가야 할 일들이 첩첩산중이다. 그러나 세상 어디에도 완성품 자체로서의 완벽한 행복과 평화를 제공할 장소는 없다. 어디서든 스스로 만들고 실험해나가야 할 자기 삶의 역사가 있을 뿐이다. 오로빌이 세계의 한쪽에 있어주어 고마운 이유, 내가 오로빌을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대세가 정해진 듯 보이는 세계에서 다른 질서를 창조하며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의 치열한 노력 때문이다. 오로빌의 실험이 10년 혹은 20년 후 어찌 되어 있을지 나는 궁금하다. 오로빌에 대한 나의 관심은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좋은 시스템이 어느 수준까지 갈 수 있을지에 대한 궁금증이기도 하다.
오로빌의 싱싱한 나무들 속에 아름다운 사람들이 만들어내던 하모니를 떠올리며, 이제 마지막 문장의 마침표를 찍는다. 여행은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끝>
오로빌=글·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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