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esc] 웃긴 여행 울린 여행
사람만 여행을 하는 것이 아니다. 분홍색 펄이 들어간 작고 낡은 헤어드라이기 얘기다. 나의 짧았던 고시생 시절, 함께 노동운동 하던 언니한테 캔커피 하나 주고 받았던 것이다. 지난해 가을부터 80일간 유럽과 아프리카를 홀로 여행했다.모로코에서 머물던 집에서 밥해주던 대가족 며느리가 손짓 발짓에 영어·프랑스어를 섞어 어물어물 말을 걸었다. “혹시 여행이 끝나간다면 그 드라이기 줄 수 있나요?” 모로코 공용어인 프랑스어도 잘 못 할 정도로 못 배우고, 어린 나이에 시집와 시댁 눈칫밥 먹으며 사는, 항상 같은 옷을 입고 자신의 것을 요구할 줄 몰랐던 그란 것을 알기에, ‘이 말도 얼마나 용기를 내어 했을까’ 싶어 고개를 끄덕이고 안아주었다. 그러나 그 집을 떠날 때는 정작 드라이기가 고장이 나 주지 못하고 가져왔다. 그걸 고쳐서, 수리비보다 웃돈을 주고 보내줬다. 석달 뒤 연락이 왔다. 고맙다며 울먹였다. 나는 드라이기를 내게 준 언니에게 전화를 했다. 지구를 한바퀴 돌아서야, 낡은 드라이기가 제 주인을 찾았다고. 고맙다고.
도휘지/서울시 성북구 돈암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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