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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젓한 숲길이 된 옛 31번 국도를 따라 외씨버선길이 이어진다. 녹슨 옛 이정표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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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외씨버선길
② 영양군 일월면 용화2리(대티골)~우련전 마을 8.3km
일월산(1219m)은 “음기가 강한 산”이다. 음습한 골짜기마다, 치성 드리고 도 닦는 토속신앙인들 흔적이 널렸다. 경북 내륙에서 해돋이·달돋이를 가장 먼저 볼 수 있다 해서 일월산이다. 경북 영양군 북쪽 일월면·청기면과 봉화군 남쪽 재산면 경계에 솟았다. 수십년간 방치돼 울창한 숲을 이룬, 포장되지 않은 옛 31번 국도가 일월산 자락에 굽이친다. 청송~영양~봉화~영월의 마을길·산길을 잇는 ‘외씨버선길’ 영양 1차 구간(8.3㎞)이다. 숲이 내뿜는 기운 듬뿍 받으며, 일제강점기 수탈 흔적도 둘러보는 코스다.아랫대티골 들머리 31번 국도변 일월자생화공원. 꽃 피고 새 우는 널찍한 공원보다도, 산 경사면에 들어선 석굴사원을 닮은 육중한 콘크리트 구조물이 눈길을 잡아끈다. 1939년 일제가 일월산에서 채굴한 금·은·동·아연 등 광물을 처리하려고 만든 ‘용화광산 선광장’이다. 계단식으로 만들어진 이 거대한 일제강점기 흉물을, 계단을 오르내리며 전후좌우에서 살펴볼 수 있다. 유일하게 남은 일제강점기 선광장 흔적으로, 2006년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1976년 폐광됐지만, 수십년 제련 과정에 사용된 독성물질과 중금속 침출수로 주변은 풀 한포기 자라지 않는 불모지였다고 한다. 2001년 오염된 토양을 밀봉·매립하고 일월산에서 자라는 꽃을 심어 자생화공원을 조성했다. 농작물 생육 상황을 살피던 농산물품질관리원을 만났다. “농작물 수확 때마다 작물별로 중금속 등 오염검사를 합니다. 물론 오염된 작물이 나온 적은 없지만요.”
공원 옆은 통일신라시대 용화사 터다. 꽃봉오리들이 뿌옇게 터지기 시작한 메밀밭 한구석에 ‘용화리 삼층석탑’이 단아하게 서 있다.
용화2리는 아랫대티·윗대티로 나뉜다. ‘대티’란 봉화 쪽으로 넘어가던 일월산 ‘큰 고개’를 뜻한다. 아랫대티부터 윗대티 들머리까지는 물길 따라 오르는 마을길·숲길이다. 아랫대티는 1968년 울진·삼척 무장간첩 침투 때, 산골 주민을 이주시켰던 마을. 당시 이주민이 살던 공동주택 3동이 남아 있다.
메밀꽃 뽀얗게 터지는 한켠 단아하게 자리한 삼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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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군 일월면 용화2리(대티골) 31번 국도변 산자락에 남아 있는 일제강점기 용화광산 선광장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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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교된 용화초등학교 터와 잣나무 오솔길 지나 물길 따라 오르는 숲길엔 찔레꽃 향기가 은은하다. 윗대티 들머리로 가는 동안 물가 산밑에 커다랗게 입을 벌린, 폐광 입구 2곳을 만난다. 농산물 가공공장 옆 폐광은 주민들이 ‘본항’으로 부르는 중심 갱도 들머리다. 입구에 서면 차가운 바람이 쉴새없이 쏟아져 나와 땀을 식혀준다. 갱도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손대지 않는 게 좋다. ‘먹는물 부적합’ ‘폐광산 유출 갱내수 수질검사 지점’임을 알리는 경고판이 세워져 있다.
대티골은 무속인들의 본거지이기도 하다. 대티골 들머리에 세워진 대형 간판을 보면 그 내용을 알 수 있다. ‘일월산 토속신앙 본거지 총본산’ ‘무속인 전문 기도도량’ ‘천지신명당’ ‘무교대학’ ‘황씨부인당 상당’ ‘허공 기도처’ ‘당산’ ‘굿당’…. 물길에도 바위 밑에도, 무속인들이 신성시하는 선녀탕 계곡에도 촛불 밝히고 음식물 놓았던 흔적이 즐비하다.
마을 주변 밭은 온통, 키자랑을 시작한 고추밭이다. 하양·보라 꽃송이들을 매단 감자밭도 끼었다. 윗대티 들머리 갈림길에서부터, 널찍한 흙길이 산허리를 향해 굽이쳐오르는 옛 31번 국도가 시작된다. 용화2리 김종수 이장댁 앞 통나무정자 쉼터에 앉아 이장님 얘기를 들었다. “보자, 왜정 때 저 길이 뚫려가지고, 보자, 91년도 저 울로 새 국도 터널이 뚫릴 때까지, 맹 저리로 차가 다녔으예. 하루 한번씩 버스가 봉화 우련전 마을까지 다녔다카이까네.”
일제강점기엔 일월산 주변에서 캔 광물과 벌채한 나무들을 실어나르는 통로였다. 20년간 흙길이 방치되며 울창한 숲길이 됐고, 그 덕에 옛 국도는 2009년 생명의숲이 선정한 ‘보전해야 할 아름다운 숲’에 이름을 올렸다. 윗대티 들머리부터 칠밭목 삼거리까지 3.5㎞ 구간으로, 이번에 조성된 외씨버선길의 일부다. 옛 국도는, 이 길로 어떻게 산판용 트럭 ‘지에무시’(GMC)와 버스가 오갔을까 싶게 굽이가 심하고 좁다. 그러나 숲을 즐기며 걷기엔 과분할 만큼 넓고 아늑한 길이다.
연꽃 명당엔 순교자 자취 아련해
아름드리 소나무와 참나무류가 빽빽이 우거지고, 다래덩굴·칡덩굴 뻗어오른 어두운 숲길에선 솔향도 나고 더덕향도 난다. 쌓여 흙이 돼 가는 나뭇잎들 위로, 귀룽나무(구룡목) 흰 꽃잎들이 내려앉아 숲길을 밝혀준다. ‘영양 28㎞’. 굽잇길에 남은, 글씨가 지워져 가는 낡고 녹슨 이정표 하나가, 이 길이 차량이 오가던 옛 국도였음을 알려준다.
소나무들 깔린 숲길 주변은 주민들이 애지중지하는 ‘송이 산’이기도 하다. 가을 숲길 탐방객들은 조심하셔야 한다. 길목마다 송이 도둑을 잡으려는 주민들이 ‘중무장’을 하고 밤낮으로 지킨다. 가을엔 입산을 제한하기도 하니 참고하시길.
나무의자 쉼터가 있는 ‘진등’엔 빨강·연녹색의 우체통 2개가 서 있다. 희망우체통이다. 김순주 탐사팀장이 설명했다. “주민들이 낸 아이디어예요. 빨강 우체통에서 엽서를 꺼내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서 연녹색 우체통에 넣으면, 주민들이 1년 뒤 엽서를 부쳐줍니다.” 지금은 비어 있으나, 주민들은 곧 엽서를 갖춰놓고 ‘우편업무’를 시작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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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화2리 통일신라시대 삼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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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가는 길은 시멘트로 포장돼 걷는 맛은 떨어지지만, 빽빽이 우거진 낙엽송 숲과 그 숲을 거쳐 불어오는 초록 바람이 싱그러워 견딜 만하다. 길 왼쪽으론 소리없이 흐르는 작은 물길이 이어지는데, 물길을 메우고 덮은 숲이 눈앞이 캄캄할 정도로 그윽하다. 숲을 들여다보면 그 안에 또 숲이 우거져 있고, 거기서 새들이 물소리로 지저귄다.
영양터널 앞, 31번 국도와 만나는 우련전 마을이 도착점이다. 우련전(雨蓮田·우련밭)은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의 명당이 있다 해서 나온 이름이다. 조선말 신유박해를 피해 들어와 살던 천주교 신자들이 희생된 순교지이기도 하다. 국도 건너 낙엽송 숲길도 아름답다. 내년 초 완성될, 봉화군 소천면과 영양군 수비면 경계지역을 따라 이어지는 2차 외씨버선길 조성 예정 구간이다.
영양=글·사진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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