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1.07.14 11:27
수정 : 2011.07.14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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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새벽 멀리 주봉인 위산에 먼동이 터온다. 해맞이 채비할 때 긴 옷을 준비하는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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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대만 아리산의 감춰진 비경…일본총독 명패는 거기 그대로
“높은 산 푸르고 계곡물 맑구나/ 아리산 소녀는 물처럼 아름답고/ 아리산 소년은 산처럼 씩씩하네/ 높은 산 늘 푸르고 계곡물 늘 맑구나/ 소년 소녀 사랑은 영원하고/ 푸른 물은 푸른 산을 싸고도네.”
대만의 국민가요 ‘가오산칭’(高山靑)에 등장하는 아리산(阿里山)은 우리나라의 백두산쯤에 해당한다. 2000~3000m 고지대에 펼쳐진 비경과 일출, 일몰, 운해 등의 아름다움은 오래전에 알려졌지만 개발이 늦어져 흙 속에 묻힌 진주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리산에는 아리산이 없다. 위산(옥산·3952m)을 주봉으로 하는 아리산맥에도 없고 175헥타르에 이르는 ‘아리산 삼림유락구’에도 없다. 통상 아리산에 간다면 삼림유락구를 말한다. 2200~2400m급 고지대인 그곳에는 상점가, 유원지, 관리자 거주지 등 3개의 취락이 있으며 거주자는 1000여명으로 모두 한족이다. 주차장, 편의점, 전화국, 호텔 등이 있는 상점가는 일종의 배후기지에 해당하며 차량을 통제하는 동쪽 비탈길을 올라가면 유원지가 나온다. 그 마을에는 산책로, 절, 학교, 관리소, 열차역 등이 있다. 본래 가장 붐볐던 마을인데 1976년 대화재 이후 상업·관광시설은 상점가로 옮기고 공원으로 재조성되었다. 이곳에는 하루 평균 1900명(한해 70만명)이 찾아오고 벚꽃철(3월15일~4월20일), 정월초, 여름방학 등에는 하루 1만명이 붐빈다.
아리산행은 인구 26만명의 자이(嘉義)시에서 시작된다. 자이~아리산 꼬마열차를 타면 두 시간 동안 편안하게 70여㎞ 구간의 절경을 즐길 수 있다. 일본 점령기에 가설한 삼림철도인데 1970년대부터 관광용으로 개조되어 하루 다섯 차례 지그재그로 왕복운행해 왔다. 하지만 2009년 모라꼿 태풍으로 유실되어 3년째 복구중이다. 내년 중반쯤이면 재개통할 예정이라고 한다. 꿩 대신 닭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자이~아리산 꼬마열차 내년 재개통
차로 18번 국도를 따라 달리면 옥수수, 담배, 쌀, 바나나 등 아열대 식물을 재배하는 자난평원을 지난다. 아리산에서 발원한 바장강이 평원을 만나 숨을 고르는 곳에 마지막 평원마을인 추커우(觸口)가 있다. 1971년 자이~아리산 도로가 개설되기 전까지 아리산 관문 구실을 했다. 제공선사가 세운 옛절 용은사(886-5-259-1322)는 물물교환 시절의 영화를 반영하고 있다. 강을 가로질러 콘크리트 다리와 함께 천장(天長)교와 지구(地久)교라는 이름의 두 개의 현수교가 있다. 이 다리는 1937년 일본인들이 ‘천황’과 ‘황태후’의 생일을 기념해 건설했다. 천장교는 현재 안전을 이유로 폐쇄돼 있다. 그곳에서 잠시 쉰 뒤 오르막에 접어들면 길은 족히 2000m를 꼬불꼬불 오르면서 활엽수 위주의 아열대 식물에서 침엽수림이 뒤섞인 온대림으로 식생이 바뀌는 장관을 연출한다. 산굽이를 돌 때마다 해가 비치다 안개, 비를 만나고 도로 좌우로 높은 일교차로 품질이 우수한 ‘고산차’를 생산하는 차밭과 차가공공장이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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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산 유원지 안 자매담. 한 남자를 사랑한 두 자매의 비극적인 전설이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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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산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최고 수령 3000년에 이르는 대만 편백나무 원시림. 300만년 전에는 모든 대륙에 분포했지만 1만년 전 기후변화 때 일본, 미국 서부와 동부지방과 함께 대만 고산지대에 살아남은 일종의 화석나무다.
하지만 정작 아리산 유원지 일대에는 편백나무 숲이 없다. 피톤치드를 뿜어내는 현재의 숲은 60~80년 수령의 유삼(柳杉, peacock pine). 일본 점령기인 1910년대 초부터 시작해 독립한 뒤인 1980년대 말까지 집중적으로 편백나무가 벌채된 빈자리에 심은 속성수다. 산책로 곳곳에 산재한 거대한 편백나무 그루터기들이 옛 숲의 위용을 짐작하게 할 뿐이다. 그 가운데 편백나무 3대 2500~3000여년 역사를 보여주는 ‘3대목’이 눈길을 끈다. 거대한 뿌리 두 개(2, 3세대)가 뒤엉켜 있고 성인이 드나들 만큼 벌어진 틈 사이에 썩은 기둥줄기(1세대)가 가로누워 있다. 벼락, 산사태는 2세대가 탄생할, 1000년에 한번 올까 말까 한 기회가 된다. 쓰러진 나무둥치 위에 떨어진 씨앗이 적절한 햇빛을 받아 발아하여 1세대가 썩어서 제공하는 영양분을 먹고 자라나는 것이다.
예외로 살아남은 편백나무가 기념비처럼 서 있다. 성인 15명이 팔을 벌려 안아야 할 만큼 굵은 밑동에다 높이는 30여m쯤 될 듯한 거목이 그것. 탐욕스런 일본인들이 웬일로 남겨두었을까? 의문은 나무 뒤쪽으로 돌아가면 풀린다. 나무 밑동 한가운데 사람 하나가 들어갈 만큼 커다란 구멍이 수직으로 뚫려 상품 가치가 없었던 것이다. ‘못생긴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 속담을 떠올리게 한다.
해맞이 명소 오가사와라봉, 영상 10도 옷채비 필수
그루터기가 일제의 간접 자취라면 ‘琴山河合 博士 旌功碑’(긴잔 가와이 박사 정공비)라고 새겨진 거대한 석비는 직접 자취. 비석의 주인공은 도쿄제대 임학박사 긴잔 가와이. 편백나무 숲의 가치를 처음으로 알아보았으며 아리산~자이시를 잇는 삼림철도 노선 공사에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우리나라의 수인선처럼 궤도가 좁은 삼림철도는 1911년 완성돼 편백나무를 실어내려 16000헥타르를 갉아먹었다. 일본으로 실려간 목재는 1915년 메이지 신궁의 건축재로 쓰였으며 1966년에는 벼락 맞아 쓰러진 정문 기둥이 되었다. 부근에 또다른 잔재인 일본식 부도 ‘수령탑’(樹靈塔)이 있다. 당시 벌목 노동자들이 고산병과 짐승들의 울음소리를 거목의 정령이 노한 증거라며 두려워하자 이를 안심시키기 위해 세웠다고 전한다.
1913년 ‘아리산 구락부’를 개조한 호텔 ‘아리산하우스’(886-2-2563-5259)에는 객실마다 그곳에 묵었던 일본 총독의 이름패를 자랑스럽게 걸어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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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0년 역사를 자랑하는 편백나무 3대가 뒤엉킨 ‘3대목’을 살펴보는 여행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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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은 청량한 공기, 새와 개구리 울음소리, 노을을 즐기는데 계속 과거에 붙들려 있을 수 있나?
다음날 새벽 4시20분. 일출을 보려면 호텔 쪽의 모닝콜에 맞춰 얌전히 일어나야 한다. 단단히 채비를 하고 승합차에 올라 20분 정도 올라가면 해맞이 명소인 오가사와라봉에 이른다. 차 대신 걸어서 올라가도 좋다. 기온은 영상 10도. 40도에 육박하는 평지의 기온에 익숙한 몸에는 춥다. 미리 긴 옷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한테는 호텔에서 100대만달러(약 3700원)에 파카를 빌려준다. 드디어 일출시간인 5시20분. 멀리 주봉인 위산이 붉어온다. 운해도 붉어지고 마음도 붉어지고 사람들 사이도 붉어진다. 영원한 시간 속으로 들어간 나그네에게 우울한 어제의 기억은 간데없다. 잠깐 동안의 일탈이 아쉬운 사람들은 국적을 떠나 어깨동무로 기념사진을 박는다. 어쩌겠는가.
자이(대만)=글·사진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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쩌우족문화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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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련한 쩌우족 역사 곳곳에
아리산은 본디 대만 원주민 가운데 하나인 쩌우족(鄒族)의 근거지였다. 유원지 안 자매담이 그 방증. 한 남자를 동시에 사모했지만 동기간의 정을 끊을 수 없어 각각 투신자살했다는 쩌우족의 전설이 남아 있다.
아리산 일대에서 사냥으로 업을 삼았던 용맹한 쩌우족은 명말인 1662년 정청공 일행이 대만에 몰려왔을 때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편을 들었다가 명운이 기울기 시작해 1895년 일본 점령과 함께 근거지인 아리산 편백나무 숲마저 잘려나가면서 근거지를 잃었다. 현재 남은 부족은 대만 원숭이보다 적은 4000여명.
최근 생계를 위해 도시로 나갔던 쩌우족들이 하나둘 아리산으로 돌아와 산간 마을이 조금씩 생기를 되찾고 있다. 자이와 아리산유락구 중간쯤인 러예의 ‘쩌우족문화공원’(사진)이 좋은 예. 2010년 문을 연 공원은 넓은 차밭 한가운데 박물관, 찻집, 공연장 등을 갖추고 쩌우족 문화의 진수를 보여준다.(886-5-256-2788)
홈스테이를 겸한 식당 ‘아장의 집’도 마찬가지. 20년 전 도시로 떠났던 아장이 1996년 고향에 돌아와 다시 지은 집이다. 나무, 대나무, 돌, 풀을 이용해 맨손으로 지은 집은 쩌우족의 옛 모습을 보여준다. 숙식비가 적정하고 부부와 아들이 부르는 쩌우족 노래를 덤으로 들을 수 있다.(886-5-256-1930)
임종업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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