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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09.29 10:01 수정 : 2011.09.29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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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질곡 함께한 재즈…대한민국 재즈 역사 90년

우리나라 재즈는 2000년대 들어 놀라운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연주자가 늘어났고 탄탄한 실력까지 더해진 덕분이다. 대중음악에 견줘서는 미약하지만, 매년 100여장에 이르는 재즈 앨범이 발표되고 있다. 연주자들의 활동은 활발하다. 대한민국 재즈 1세대는 영화 <브라보! 재즈 라이프>로 재조명받았고, 재즈 보컬리스트 말로는 전통가요 ‘동백아가씨’를 재즈로 편곡해 발표하면서 한국적 재즈의 토대를 만들어가고 있다. 유럽 전역에서 앨범 판매 수위에 오르고 있는 나윤선의 선전, 일본 시장을 오랫동안 공략해온 웅산의 성공은 우리 재즈가 세계 시장에서 어떻게 자리잡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재즈는 1920년대 말 새로운 서양문물로 소개됐다. 대중들은 트로트나 창가와는 다른 느낌을 받게 되는데, 당시 유행인 스윙 재즈는 감미로운 멜로디와 흥겨운 리듬으로 지금에 견줘 훨씬 대중적이었다. 당시 국내 연주자들은 미국에서 유행하는 곡을 바로 들여와 사랑을 받았다. 할아버지·아버지 세대가 요즘 세대보다 재즈에 대한 소양이 많다는 걸 간혹 확인하게 되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1941년 미국과의 태평양전쟁으로 미국의 모든 문화를 막게 된다. 광복과 한국전쟁 때까지 재즈의 암흑기였다. 김해송, 엄토미, 김광수, 이정식(현재 활동하는 이정식과는 동명이인) 등 재즈의 전설들이 본격적으로 꽃을 피우기 전의 일이다. 휴전으로 재즈를 비롯한 대중음악 신은 미8군 무대가 중요한 활동기반이자 공급원으로 자리잡게 된다. 1955년 미8군 사령부가 용산에 자리를 잡으면서 1960년대 손석우, 박춘석, 길옥윤, 이봉조, 최세진 등 거장들이 재즈의 뿌리를 내렸다.

유신시대를 맞이한 1970년대 대한민국 재즈는 획일화된 대중음악 신에서 자의 반 타의 반 인디 정신으로 독립한 연주자들이 중심이 되어 돌파구를 찾게 된다. 1976년 재즈클럽 ‘올 댓 재즈’와 1978년 ‘야누스’가 문을 열면서다. 국내 최초의 재즈클럽인 올 댓 재즈는 중국계 미국인 마명덕이 문을 열었고 1986년부터 진낙원이 인수해 현재까지 운영하고 있다. 한국인이 문을 연 첫 재즈클럽은 야누스다. 재즈 1세대 주축으로 신촌역 앞 시장골목에서 시작했다. 야누스의 역사는 곧 한국 재즈의 역사와 다름없는데, 보컬리스트 박성연을 중심으로 홍덕표, 이판근, 김수열, 최선배, 이동기, 류복성, 신관웅(사진) 등이 연주회를 하면서 지금까지 맥을 이어오고 있다.

그 뒤로는 야누스에서 1세대들의 연주를 보고 들으면서 익힌 2세대 이정식, 최광철, 양준호, 이영경, 임인건, 방병조 등이 국내 재즈 신을 건강하게 구축해 나간다. 1990년대는 색소폰을 연주하는 차인표가 출연한 드라마 <사랑을 그대 품안에>(1994)의 선풍적인 인기로 재즈 거품이 부풀어오르기도 했다.

당시 드라마 배경이 된 클럽 올 댓 재즈는 관광 명소가 됐고, 재즈 감상을 넘어 색소폰 배우기 열풍까지 불었다. 그리고 앞서 1980년대에 유학길에 올라 1990년대 초반 학업을 마치고 돌아온 김광민, 한충완, 정원영, 한상원 등 미국 버클리 유학파들이 국내 활동을 본격화하면서 시너지 효과는 더욱 커졌다. 이런 열기는 음반 녹음과 발매, 해외 유명 연주자들의 내한공연으로 이어지면서 재즈팬의 양산으로 이어지게 된다. 1990년대 후반부터는 수많은 재즈 학도들이 미국과 유럽으로 유학을 떠나 국내 재즈 신의 성장 단초를 마련했고, 더불어 국내 교육과정으로도 흡수됐다. 1988년 서울예대 실용음악과가 신입생을 받은 뒤 서울재즈아카데미를 비롯해 수많은 학교에 대중음악, 실용음악 관련 학과들이 생겨났다.

김광현/월간 <재즈피플>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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