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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기마타 마코토의 재즈 스토리
② 무작정 쓴 한 통의 편지, 32년 자유분방한 프로듀서의 길을 열다
본격적으로 재즈 앨범 제작을 시작한 것은 1979년. 아르시에이(RCA)레코드 선전부의 최고책임자로서 우치야마다 히로시와 쿨 파이브 등 일본 아티스트들과 존 덴버, 대릴 홀 앤드 존 오츠 등 팝 계열 음악가들의 노래를 히트시키는 데 분투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떤 일이든 오래 하다 보면 매너리즘에 빠지고 만다. 어느날 큰마음을 먹고 상사에게 제안했다. “7년 이상 선전부 일을 해왔습니다만, 최근에는 재미있는 아이디어도 떠오르지 않습니다. 이쯤 새로운 일을 했으면 합니다만…. 재즈 앨범 제작을 하고 싶습니다!” “안 돼. 재즈는 큰 시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매출도 별로 기대할 수 없어.” 상사의 한마디는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 쉽게 물러날 수 없었다. “1년만이라도 좋으니 한번 기회를 주십시오. 그 안에 성과가 없으면 시키는 대로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부탁입니다, 1년만!” 결국 상사는 고집을 못 꺾고 허락했다.
허락은 받았지만 누구와 어떤 앨범을 만들까에 대해선 전혀 계획이 없었다. 잘도 허풍을 쳤다는 생각에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다. 재즈 본고장인 미국 음악가와의 작업을 꿈꾸고 있었지만, 아쉽게도 전혀 접촉이 없었다. 우선 해야 할 일은 누군가와 접촉하는 것. 그 첫번째가 베니 골슨(아래 사진)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의 작품인 ‘I Remember Clifford’, ‘Whisper Not’을 정말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가 로스앤젤레스에 산다는 건 알았지만, 주소도 전화번호도 몰랐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전화번호부였다. 그곳에 살던 지인에게 베니 골슨이라는 사람의 주소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고, 2~3일 뒤 연락을 받았다. “한 명 있어. 우선 연락을 해보지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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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 골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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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제작 재즈앨범 연간 6만장 팔려 대성공 이 한 통의 편지로 재즈 프로듀서 ‘기마타 마코토’의 본격적인 재즈 여행이 시작되었다. 그 후 그는 많은 뮤지션을 내게 소개해 주었다. 아트 블레이키를 필두로 재즈 메신저스의 면면들과 아트 파머, 냇 애덜리, 파로아 샌더스, 케니 배런, 론 카터, 우디 쇼 등. 베니 골슨이야말로 나를 지금의 재즈 프로듀서로 키워준 커다란 은인 중 한 사람이다. 이야기가 좀 빗나갔지만 내 첫 프로젝트인 스즈키 쇼지와 리듬 에이스의 <플라타너스 길>도 대성공이었다. 1980년 봄 발매해 연말까지 6만장이 넘게 팔렸다. 대부분 아날로그 녹음이었지만 당시 최신 기술인 디지털 리코딩을 바로 시험하겠다고 결심했고 대대적인 프로모션을 전개해 당시 방송 뉴스를 주도하던 <엔에이치케이>(NHK) 9시 뉴스에서도 특집으로 다뤄졌다. 베니 골슨과는 <캘리포니아 메시지>라는 앨범을 처음으로 만들었다. 미국 첫 현지 녹음이었다. 이 작품을 리코딩할 때 그가 내게 물었다. “앨범 타이틀은 어떻게 할까요?” “지금 생각중인데, 뭔가 좋은 아이디어 없을까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떠오른 게 ‘캘리포니아 메시지’였다. 베니 골슨의 표정으로 봐서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이었다. “기마타씨, 나쁘지 않네요. 그 아이디어 사용해도 될까요?” 이 작품의 결과는, 1981년 봄 발매 뒤 수개월 만에 1만3000장 판매. 대히트의 연속이었다. 이쯤 되자 처음에는 재즈 앨범 제작을 반대했던 사장 이하 모든 동료가 태도를 바꿨다. “기마타군, 재즈도 이렇게 팔리는구먼. 야, 허락하길 잘했어.” 나의 자유분방함이 시작된 건 그때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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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 골슨은 기마타 마코토와 인연을 맺은 뒤 재즈 앨범 12장을 함께 냈다. 그가 세계적인 재즈 트럼펫 연주자인 에디 헨더슨(사진 왼쪽)과 함께 테너 색소폰을 연주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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