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1.11.03 11:30
수정 : 2011.11.03 11:30
[매거진 esc]웃긴 여행 울린 여행
그해 여름은 너무 길었다.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줄어들지 않는 빚더미와, 잘라도 잘라도 다시 생기는 도마뱀 꼬리 같은 연체이자는 정말 징그러웠다. 하루 일을 쉬면 얼마나 손해가 나는지 계산기를 두드려본 뒤, ‘조금만 쉬어보자’는 마음으로 아들아이 손을 잡고 여행길에 나섰다. 밤길을 달려 새벽에 도착한 안동 하회마을. 허리가 굽은 할머니께서 반갑게 맞아 주셨다. 지은 지 백년이 넘은 소담한 기와집이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누런 종이장판이 깔린 사랑방이 우리가 묵을 곳이었다. 점심을 지어먹고 나자, 지친 몸에 서늘한 방구들은 좋은 수면제였다. 얼마 만의 낮잠인가. 정신없이 자다가 ‘쏴와~’ 하는 소리에 눈을 떴다. 들창을 열자 몸을 부딪치며 우는 대나무들이 가득했다. 한참을 바라보며 그 소리에 나를 맡겼다. 온몸에 가시를 세우고, 위로의 손길조차 거부하며 악착같이 살아온 나를 바람소리가 감싸고 달래주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졌다. 얼마간 그리 울다가 다시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산책을 나섰다. 걷다 보니 낙동강이 흐르고 있었다. 한참을 걸었다. 그때 늦게 잠에서 깬 아들아이가 뛰어오며 나를 불렀다. 아이를 보자,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래, 다시 견뎌보자…. 그렇게 나를 다독이고 위로하고 온 그 여행. 내 삶의 가장 소중한 여행이었다. 살아 있으니, 이렇게 가슴 벅찬 것을.
이미선/서울시 성북구 하월곡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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