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1.11.24 13:51
수정 : 2011.11.24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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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폐결핵부터 알츠하이머병까지…TV 드라마 속 질병 변천사의 속사정
자, 올해도 어김없이 정기 건강검진 시기가 돌아왔네요. 전, 4년째 여러분의 건강한 주말을 챙기고 있는 주치의 ‘닥터 esc’입니다. 이리 와서 가운 갈아입으시고, 여기 문진표도 부지런히 작성해주세요. 아프다고 울지 마세요, 피검사 해야죠. 폭음으로 헐거워진 식도와 위벽, 어서어서 가라앉히세요. 소변검사요? 흠. 그건 나중에….
그런데 요즘 내원 환자들, 부쩍 같은 증상을 호소하시는 분들이 많네요. 혹시 사무실 옆자리 여직원이 멍하니 먼 산만 바라보다가 왼쪽 옆머리를 쓸어 넘기지는 않나요? 밥 먹다 말고 물건 놓고 온 사실을 깨닫고 “기억력이 예전 같지 않아”라며 낙엽 밟는 소리를 해대는 친구는 없어요? 아직 학회에 보고하지 않았지만, 제 소견으로는 이 증상은 ‘수애 병’ 초기 증상이 확실합니다. 요즘 주가 드높은 <에스비에스> 월화드라마 <천일의 약속>에 과하게 빠져든 일부 시청자들이, 알츠하이머병을 앓는 주인공 이서연(수애)과 자신을 구분 못해 우수에 찬 눈빛을 마구잡이로 던져대는 증상입니다. 이런 분들, 내원 전에 ‘성스(성균관스캔들) 신드롬’ 등 과거 병력이 있는지부터 스스로 진단하시길.
드라마 주인공들이 백혈병·암 등 익숙한 병을 넘어 최근 희귀한 병을 앓으면서 의학계의 긴장감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건강검진에 앞서 올바른 드라마 속 질병 대처법, 안내해드리지요.
드라마 질병의 고전, 폐결핵·백혈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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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방송 <가을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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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에서 삶과 죽음은 필수 구성 요소입니다. 태곳적부터 반복해 온 명제죠. 1960~1970년대 드라마에는 폐결핵이 단골 질병으로 등장했습니다. 가난하고 어렵던 시절, 가족을 부양하려고 밤낮 일하던 주인공이 흰 손수건을 입에 댄 채 콜록콜록 격한 기침을 하고 나면 시뻘건 피가 묻어났죠. 그때의 안타까움이란! 결핵 퇴치를 위해 크리스마스실을 팔던 시절이었으니까요. 폐결핵은 1990년대를 넘어서는 <아들과 딸>(MBC·1992년)의 후남이(김희애)까지 앓았습니다. 남녀차별의 서러움을 대변한 아이콘 후남의 폐결핵 진단은 ‘지지리도 불쌍한 후남’에 대한 연민과 수많은 ‘안티 귀남이(최수종)’ 시청자를 양성했습니다.
폐결핵이 사라지면서 1990년대 말부터는 백혈병이 등장합니다. 면역력이 떨어져 골수 이식이 필요한 어려운 병이라는 점에서 비극적인 사랑의 소재로 자주 쓰였죠. 창백한 입술과 털모자는 청순가련형 여주인공의 조건일 정도였으니. 그 마중물은 <세상 끝까지>(MBC·1998년)의 한서희(김희선)가 맡았습니다. 보육원 원장 아들 세준(류시원)을 사랑하는 고아였지만 어긋난 사랑 끝에 백혈병으로 그의 곁에서 죽는다는 이야기는 많은 이들을 ‘눈물의 도가니’로 몰아갔어요. <가을동화>(KBS·2000년)의 윤서(송혜교)는 백혈병 공식에 종지부를 찍습니다. 화진포 해수욕장에서 오빠에게 업힌 채, 백혈병으로 죽는 윤서…. 아직도 코끝에 전기가 와요.
병은 세월 따라 흐름 타고 진화
드라마 주인공의 병은 사회 흐름에 따라 변하기 마련입니다. 일 많이 하고 스트레스 제대로 쌓이는 분위기도 반영하죠. 특히 외환위기 당시 정리해고에 암 선고까지 받은 아버지를 그린 김정현의 소설 <아버지>(1996년)가 나온 뒤, ‘쓸쓸한 중년=암’이라는 공식이 세워지던 때가 옵니다. 지금은 좀 나아졌지만, 당시만 해도 치료법 없이 속수무책이던 한국인의 질병, 암은 드라마에 자주 등장했습니다. <로즈마리>(KBS·2003년)의 이정연(유호정)은 마른하늘 날벼락처럼 위암 선고를 받고 남편과 바람난 애인(배두나)에게 남편을 부탁하는 여주인공이었습니다. <장밋빛 인생>(KBS·2005년)의 맹순이(최진실)도 갑작스레 위암 말기 선고를 받은 억척 주부였죠. 다들 위암이 많았네요. 먹는 것 조심합시다. 최근 종영한 <여인의 향기>(SBS)의 이연재(김선아)는 극중에서 담낭암 말기였네요. 좀더 생소한 암을 찾았었나 봅니다.
새로운 질병 발굴 애쓰는 작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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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방송 <미안하다, 사랑한다> SBS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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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에서 늘 여주인공만 아픈 건 아닙니다. 예전에 남자주인공들은 ‘교통사고→기억상실증’으로 이어지는 레퍼토리가 많았습니다. <첫사랑>(KBS·1996년)의 주인공 찬혁(최수종)이 당한 교통사고는 전형적인 해코지성 사고였죠. 그 뒤로 <네 멋대로 해라>(MBC·2002년)의 고복수(양동근)는 뇌종양을, 심지어 <미안하다, 사랑한다>(KBS·2006년)의 차무혁(소지섭)은 머리에 총알이 박힌 채 시한부 인생을 살다, 자신의 심장을 연적에게 이식해줬죠. 최근 들어서는 팍팍한 사회 분위기 탓인지 재벌집 아들인데 정신 질환을 앓는 남자주인공도 등장합니다. <시크릿가든>(SBS·2011년)의 김주원(현빈)은 남부러울 것 없는 재벌이지만 폐소공포증이 있고, <영광의 재인>(KBS·2011년)의 잘나가는 4번 타자 서인우(이장우)는 틱 장애와 공황장애가 있습니다.
요즘에는 생소한 병을 찾아 헤매는 작가들도 많답니다. 이 가운데 독보적인 인물은 뭐니뭐니해도 <완전한 사랑>, <천일의 약속>을 쓴 김수현 작가죠. 듣지도 보지도 못한 희귀병을 내세워 극중 긴장감을 더하고, 보는 이로 하여금 빠져들게 하는 효과를 불러오죠. 투병이나 아픈 내용을 자세히 표현해 비극을 극대화하기도 합니다. <완전한 사랑>(SBS·2003년)의 하영애(김희애)는 폐 속에 간질성 세포가 증식해 나타나는 ‘특발성 폐 섬유증’(폐경변)으로 투병하며 남편(차인표)과의 사랑을 다시 깨닫는 아릿한 이야기였습니다. 이밖에 ‘기억상실증+안암’을 앓았던 <천국의 계단>(SBS·2003년)의 한정서(최지우), 근무력증이었던 <눈의 여왕>(KBS·2006년)의 김보라(성유리), 뇌혈관이 막혀 뇌출혈이 일어나는 ‘모야모야병’ 환자였던 <웃어요, 엄마>(SBS·2010년)의 복희(이미숙)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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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비에스(SBS) 월화드라마 <천일의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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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드라마 속 다양한 질병 덕에 시청자의 의학 상식은 나날이 살찌는 듯합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의사가 될 날이 눈앞에 있는 듯해요. 그래도 저, 주치의 ‘닥터 esc’는 드라마 주인공처럼 아플까봐 전전긍긍하는 ‘건강 염려증’ 환자가 늘어날까봐 걱정입니다. 자, 저를 따라 손뼉치고 이렇게 외치면서 화장실로 가시면 됩니다. 네 맞아요. 소변검사예요.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오해하지 말자!”
글 김성환 기자
hwa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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