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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12.01 15:23 수정 : 2011.12.01 15:23

[매거진 esc] 누들로드 이욱정 PD의 ‘르 코르동 블뢰’ 생존기

22. 프랑스 요리 종결자 소스 만들기 도전

방송국에서 일할 때는 한 해가 정말 금방 지나갔다. 신년특집 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송년특집이 돌아오는 그런 식이었다. 그런데 르 코르동 블뢰에서는 시간이 참 더디 갔다. 한 주, 한 주, 한 주 수업 진도를 따라가는 것이 힘들어서일까, ‘국방부 시계’만큼은 아니었지만 시간의 체감 속도가 곱절로 느렸다. 다행히 거꾸로 매달아도 바늘이 움직이는 건 르 코르동 블뢰의 시계도 마찬가지였다. 런던에서 두번째 겨울을 맞이할 무렵, 나는 중급반을 가까스로 통과하였고 드디어 르 코르동 블뢰의 최종 관문인 슈피리어 레벨(고급반)에 입성했다.

초급반 통과에서 완주로 목표 수정

입학할 때 내 목표는 초급반 통과였고 중급반 때는 역시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고급반까지 살아남기였다. 당초 목표가 그랬던지라, 슈피리어 클래스에 들어갔다는 것만으로도 사실 속으로 참 뿌듯했다. 양파 하나 제대로 썰지 못했던 다큐멘터리 피디가 명문 요리학교의 최고급 레벨까지 살아남았다니, 더이상 무엇을 바라리오! 마라톤으로 치자면 마지막 10㎞ 구간에 들어선 기분이랄까! 마음이 두가지로 갈렸다. 어차피 메달권(우등졸업)과는 멀어진 것이 분명해졌으니 대충 뛰지 뭐! 하지만 또 마음 한편으로는 어떤 일이 있어도 완주를 해야겠다는 오기가 발동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갈 데까지 가보자구!

고급반 학생이 되자 수업시간 셰프들의 대접이 달라졌다. 주방에서의 작은 실수에도 불호령이 떨어지던 초중급반 때와는 달리 수업 중에 학생들에게 가벼운 농담도 던지고 요리할 때 옆에서 꼬치꼬치 간섭하는 일도 사라졌다. 나 스스로 알아서 잘해야 하니 공부는 점점 더 어려워졌다. 특히 힘든 건 소스 만들기였다. 조리법이 400가지가 넘는다는 프랑스의 소스는 프렌치 퀴진에서 광채이자 영광으로까지 불릴 만큼 핵심적인 요소다. 오븐에서 잘 구워진 농어와 곁들여진 화이트와인 소스, 돼지 안심 로스트에 얹은 맥주로 맛을 낸 캐러멜 맛 소스, 부드러운 수란에 얹은 홀랜다이즈 소스(네덜란드식 황색 소스)까지, 특별한 요리는 특별한 소스가 더해짐으로써 비로소 완성이 된다. 이렇게 중요하니 과거 프랑스 주방에서는 소스를 책임지는 소시에의 끗발이 마스터 셰프 다음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 위세가 대단했다고 한다.

처음 소스를 만들 때 보면, 이건 딱 한방의 보약 달이기였다. 스테이크, 포크촙, 양갈비 등 주로 고기요리에 들어가는 브라운 소스 계열에는 고기는 물론이고, 양파, 당근, 셀러리, 월계수, 타임(허브), 리크, 토마토퓌레 등 좋은 건 다 들어간다. 이것들을 곰탕 끓이듯 오래 달이고 달인 뒤, 건더기들을 다 건져 버리고, 잘 걸러서 그 엑기스만 뽑아낸 것이 브라운 소스다. 초급반 시절 이 과정을 처음 보고 난 뒤, 이구동성 다들 했던 말이 “세상에 이런 낭비가…. 몇 숟가락도 안 되는 진득한 액체를 위해 이렇게 훌륭한 식재료들이 온몸을 바쳐야 하다니!” 하지만 나중에 먹어보면 맛있는 소스는 그런 가차 없는 희생을 감수할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 요리의 마지막 순간, 고기든 생선이든 조리된 주재료 위에 소스를 뿌렸을 때, 주재료는 그냥 소금·후추 간을 했을 때와 확연히 차별화된 풍미를 갖게 된다. 마치 웅크리고 있던 맛의 인자가 활짝 열리는 느낌이랄까.

미각뿐 아니라 시각적으로도 소스는 프랑스 요리의 종결자다. 완성된 요리가 담긴 접시에 화가의 물감처럼 아름답게 그려진 소스를 상상해봐라. 이것은 요리사에게 있어 화룡점정의 극적인 순간이요, 프랑스 요리가 예술로 추앙받고 인류의 위대한 문화적 유산으로 대접을 받을 수 있었던 비결이다.


이렇게 한없이 중요하다 보니 초급반 때부터 실기 수업이 땡 하고 시작하면 가장 먼저 준비하는 것이 소스였다. 맛있는 소스가 만들어지려면 인내심이 필요하다. 수업에서야 시간 관계상 3시간 안에 소스를 뽑아내야 하지만 제대로 된 프렌치 레스토랑의 경우는 육수 내는 것까지 합하면 하루 종일도 걸리는 작업이다.


이렇게 소스 만들기는 프랑스 요리의 기본 중의 기본으로 초급반 시절부터 반복적으로 연습하는 테크닉이다. 그럼에도, 소스를 제대로 만드는 일은 고급 레벨에 와서도 여전히 나에게는 녹록지 않았다. 셰프들까지도 “소스를 제대로 만들 수 있다면, 넌 진짜 셰프가 된 거야”라는 말을 흔히 하곤 했는데,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조리가 덜 돼 맛이 옅거나 반대로 너무 오래 졸여 색이 지나치게 진해버리거나 타버린 맛이 났다. 소스가 맛있으려면 갓난아기 돌보는 정성으로 오래 눈을 떼지 말고 국물 위의 기름 덩어리를 걷어내고 적정한 순간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가 불에서 내려놓아야 하는데 급한 내 성격에는 그런 세심함이 부족했다.

나의 실수담은 이번 회에도 어김없이 계속된다.(칭찬받았던 이야기도 한두번 써야 하는데… 기억이 잘 안 나니 이런 제길! 이번 실수담은 짧게 써야겠다.) 암튼 그날은 무를 곁들인 오리고기 소테(버터를 발라 살짝 튀긴 고기요리)를 만드는 수업이었다. 먼저, 소금·후추 간을 한 오리고기 필레에 버터를 바르고 프라이팬에서 서서히 익혔다. 아~ 버터에 최상급 고기가 지글지글 익어갈 때의 소리와 냄새에 넋이 나가지 않는다면 당신은 심한 위장장애나 우울증이 있는지 의심해봐야 한다. 고기를 구운 팬에 당근, 양파, 베이컨을 함께 볶다가 무를 넣고 화이트와인을 부어 데글라세(포도주나 코냑 등을 넣어 국물을 끓여내는 것)를 시작했다. 여기까지는 순조로웠다. 그런데 즙이 완전히 증발할 때까지 기다려야지 하고, 잠시 가니시(고명)로 낼 감자요리를 하다가 소스 팬을 깜빡해버렸다. 소스는 검은 용암처럼 끓어오르다 연기를 내며 타버렸다.

한수저씩 얻어 모은 소스에 극찬

시계를 보니 완성품 검사 15분 전!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셰프는 먼저 끝낸 학생의 요리를 검사하느라 바빴고 같은 반 친구들의 소스 팬에서는 맛깔나는 소스가 끓고 있었다. 그날 나는 심봉사가 되어야 했다. 젖동냥이 아닌 소스 동냥이었다. 재빨리 한 국자씩 얻어 빈 소스 팬에 옮겨 담았다. 다채로운 풍미의 소스가 섞이니 더 맛있어 보였다. 소스를 맛본 셰프가 눈을 찡긋했다. “오늘은 네 소스가 최고다!”

돌아오는 하굣길, 스산한 런던의 겨울 기운이 차창 밖에 몰려오고 있었다. 주머니는 비어 있었고 몸은 고단했고 서울이 그리웠다. 내가 가진 재료들의 가장 좋은 부분만 달여 뽑아낸 에센스. 마지막 완성의 순간 아름답게 곁들여질 내 인생의 소스는 무엇일까?

글 KBS PD(www.kbs.co.kr/cook)·사진 제공 최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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