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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12.08 16:10 수정 : 2011.12.08 16:21

지난 4일, 모처럼 틈을 내 청량리전통시장 나들이에 나선 취업준비생 이창수(왼쪽)씨와 김재우씨. 한 가게에 들러 할머니 말씀을 듣는 표정이 진지하다.

[esc] 취업재수생들의 전통시장 탐방기…
닭똥집 튀김·막걸리 한통에 취업 스트레스 뻥

규모와 경제력을 앞세운 대형 할인매장 등에 밀려 설자리를 잃어가는 서민들의 삶터 전통시장(재래시장). 학벌과 대물림된 부가 인생을 결정하는 사회에서 좌절해가는 취업준비생의 처지와 닮았다. 수십차례씩 구직 실패의 쓴맛을 본 취업준비생들 눈에 전통시장은 어떤 모습으로 비칠까.

지난 4일, 모처럼 짬을 내 전통시장 나들이에 나선 두 취업준비생을 따라가 봤다. “가슴이 답답해질 때 가끔씩 재래시장을 찾는다”는 취업 4수생 이창수(29·서울 창동)씨가 “어릴 때 엄마 손 잡고 가보곤 처음”이라는 취업 재수생 김재우(29·서울 공릉동)씨를 불러냈다. 고교 동창 사이로, 각기 다른 서울 소재 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창동역에서 만난 둘은, 전철 1호선이 닿는 청량리의 전통시장을 둘러보기로 결정했다. 전철에서 두 사람은 스마트폰으로 청량리전통시장과 경동시장을 검색해 위치와 특징, 맛집 따위를 찾으며 대화를 나눴다.

부모세대는 저렇게 힘들게 벌어 자식 가르쳤는데

이창수 요즘도 학교 도서관으로 가냐? 자리 잡기 어렵겠네.

김재우 학교도 가고 구립 도서관도 가고 사설 도서관도 가고, 닥치는 대로 가지. (이력서를) 몇군데나 쑤셨냐?

몇개 안 했어. 회계사 공부나 해야 할 것 같다. 넌 어땠냐?


하반기에만 일자리박람회까지 한 오십군데는 지른 것 같다. 몇군데는 면접 진짜 끝내주게 봤는데, 아우! 안 붙여 주더라. 이젠 무슨 일이든 시켜만 주면 정말 다 하고 싶다.

벌써 지치면 어떡하냐. 몇년 묵어봐라. 오기가 생기지.

이씨는 3년 전에 졸업해, 대기업 위주로 40~50차례 구직 경험이 있다. 김씨는 2년 휴학으로 졸업을 늦추다 올해 졸업했다. 대기업·중소기업 가리지 않고 취업지원서를 냈다고 했다.

청량리전통시장의 돼지 껍데기 노점.
청량리역 1번 출구로 나가, 호떡 포장마차와 1만원짜리 운동화 노점 지나 청과물시장으로 들어섰다. “한 무더기 이천원, 두 무더기 삼천원.” 귤도 사과도 배도 바나나도 산더미처럼 쌓였다. “와, 재밌다.” 시끌벅적한 시장 분위기에 둘의 표정이 우울 모드에서 벗어나 다소 밝아졌다. 과일 좌판 앞에 쌓인 유자를 들어 향기를 맡아보고, 현철·태진아 노래 흘러나오는 카세트 손수레 지나 경동시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거리는 인파로 북적이고, 호객 소리는 한층 소란스러워졌다.

야, 우리가 이 시장에서 젤 나이 어린 것 같지 않냐?

하하, 정말이네. 다 50대 이상인 것 같다. 젊은 사람들은 마트나 백화점에 있지 않을까?

두 사람의 시선은 생선 좌판에 오래 머물렀다. 식칼을 내리쳐 동태를 토막내는 할머니 손. 추워진 날씨에도 꽝꽝 언 동태를 맨손으로 다루신다. 손등이 벌겋다. “사갖고 가서 한번 끓여먹어봐. 속이 그냥 확 풀려버릴 테니까.”

확실히 사람 사는 곳 같네. 마트만 가다보니 이런 풍경 본 지 오래다. 오길 잘했어.

부모 세대는 저렇게 힘들게 벌어 자식 가르치는데…, 군대에서 부모 생각 많이 했었지.

“더 얹어드릴께” 후한 시장인심에 마음도 훈훈

“우리나라 잡곡이란 잡곡은 다 갖다놨다”는 노점 잡곡가게 아주머니가 “젊은이들이니까 특별히 준다”며 맛보라고 건네준 찐쌀 한움큼을 씹으며 약령시장으로 들어섰다. 한약 내음 물씬한 거리를 걸으며 둘은 한목소리로 “엄마 생각이 난다”고 했다.

어렸을 때 엄마가 한약을 많이 먹였는데, 그게 뭔지 아냐? 키 크는 약이야. 하하.

그래? 나도 먹었는데. 아무튼 엄마들은 똑같다니까. 그래서 이만큼이라도 큰 거겠지.

이씨와 김씨가 닭똥집 튀김을 안주로 막걸리를 마시며 서로를 격려하고 있다.
틈틈이 과외 하고 알바 뛰고, 용돈 타서 간신히 생활하는 두 사람은 “취직하면” 부모님께 “한약 한 제 해드리고 싶다”고 입을 모았다. 닭고기·개고기 파는 가게를 지나면서 둘은 식당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점심시간이다.

경동시장엔 냉면집이 많다. 주로 매운맛으로 이름난 집들이다. 매운 냉면이 입맛은 당기지만, 날씨가 너무 추웠다. 허연 입김 내뿜으며 호객하는 냉면집 할아버지를 뒤로하고, 청량리전통시장 먹자골목으로 향했다. 즉석에서 지어내는 뜨거운 냄비밥이다. 밥을 지어 냄비째 상에 올리는 청량리전통시장의 명물. 대여섯 집이 주로 청국장을 곁들여 냄비밥을 낸다.

와, 이 밥냄새 좀 맡아봐라. 반찬 없이 밥만 먹어도 좋겠다.

청국장 오랜만이네. 발 냄새 비슷한 것도 안 나고 구수한데.

시장마다 이렇게 대표 먹을거리들을 개발하면 관광객도 많이 몰리고 장도 살아나지 않을까?

밥만 먹으러 오겠냐. 살 것도 많고 볼 것도 많아야지.

냄비째 끓여다 주는 누룽지와 숭늉을 맛보고 일어나 전통시장 구경에 나섰다. 돼지족발, 닭집, 순대집들이 즐비하지만, 이웃한 경동시장에 비해 규모도 작고 인파도 적었다. “저것 때문에 더 그런가?” 김씨가 골목 끝쪽을 가리켰다. 대형 백화점의 벽면이 보인다. 삼천원짜리 보리밥집들과 이천원짜리 국숫집을 지나 다시 허연 김 무럭무럭 오르는 족발집을 구경했다. 주인들은 고기 썰고, 다듬고, 손님 부르며 바삐 움직였다. 시장 앞뒤 골목을 한 바퀴 돌고 나자 다시 추위가 느껴졌다. 두 사람 발길은 부글부글 기름 끓고 있는 닭튀김집 앞에서 멈췄다. 닭똥집 튀김 또한 청량리전통시장 골목에서 맛봐야 할 별미다. 한입에 먹을 크기로 자른 닭똥집을 납작하게 썬 고구마와 함께 튀겨 술안주로 내는 집들이 서너집 모여 있다. 둘은 닭똥집튀김 1인분과 막걸리 한통을 시켰다.

이걸 튀겨 먹는 건 처음 보네. 난 닭똥집 구이는 별론데, 이건 좀 당긴다. 내 여친도 좋아하겠다.

맛있네. 고소하고 졸깃하고 질기진 않아. 소금보다 청양고추 양념장에 찍어 먹으니 더 개운하다.

한잔 받아라. 여친과는 잘 지내고?

잘 있지. 너는? 결혼할 생각은 없냐?

둘은 모두 재학중에 군복무를 마쳤고, 각각 3년 넘게 사귄 여친이 있다. 둘 다 “결혼 생각은 있지만 엄두가 안 난다”고 했다.

아무것도 없이 어떻게 결혼하냐. 여친한테도 미안하고 힘들 때가 많아.

나도 취직부터 해야지. 언론에서 낮추라고 떠드는 그 ‘눈높이’ 낮춰 아무 데나 들어갈란다. 경력 쌓은 뒤 이직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꿨어. 중소기업들이 더 학력 따지고 스펙 따지더라.

왜 대기업 가려고 발버둥치겠나. 보수도 복지도 대출 조건도 (중소기업과) 출발점이 다르니까. 구직자 눈높이가 높은 게 아니라, 기업들 눈높이가 자꾸 높아지는 것 같다.

막걸리 두 통을 비우자 몸도 마음도 한결 풀린 표정들이다. 닭튀김집을 나선 둘은 골목길 한쪽을 두리번거렸다. “아까 과일 파는 할머니가 보이던데.” ‘한무더기 골라서 이천원’이라고 쓴 골판지 앞에, 양파·고구마·귤·사과 바구니를 늘어놓은 가게로 다가가자 할머니가 반겼다. “들여가유. 더 얹어드릴게.” 두 취업준비생은 거의 주먹만한 귤 열댓개가 올라간 바구니 둘을 가리켰다. 귤을 받으면서 할머니 연세도 묻고 건강도 여쭤본다. “매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문을 여는데, 손님이 별로 없다”는 대답에, 둘은 고개를 끄덕이며 마주 본다. 둘이 막걸리잔을 기울이며 나눴던 이야기 “아침부터 밤까지 공부하고, 알바 뛰고, 스펙 쌓아봤자, 오라는 기업은 별로 없잖아”와 닮았다.

힘들어도 넘치는 활기를 배워야지

전통시장 구경을 마치고 시장 골목을 나설 무렵 시장을 둘러본 소감을 물었다.

아직 사회에 첫발을 내딛진 못했지만, 나도 이 사회 공동체의 일원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힘들게 일하면서도 활기차게 사는 분들이 많았다. 새롭게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다.

이웃들이 여러 방식으로 살고 있구나 하는 걸 느꼈다. 시간을 내 다른 재래시장들도 둘러보고 싶다. 맛있는 것도 먹고.

시장 골목을 나서 지하철 입구로 걸어가는, 묵직한 검정 비닐봉지를 든 두 청년의 뒷모습이 참 믿음직스러워 보였다.

글·사진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

■ 알아두면 좋아요

청량리전통시장 먹거리 볼거리

◎ 먹을곳 | 청량리전통시장 옆 골목에 냄비밥집들을 비롯해 순댓국, 칼국수 등을 내는 식당들이 몰려 있다. 광주식당(02-969-4403) 등에서 청국장(사진) 등을 곁들인 냄비밥을 낸다. 김치·된장·동태찌개를 선택할 수 있다. 1인분 4500~5000원으로 2인분 이상 내는 곳이 많다. 전통시장엔 족발집과 닭집도 즐비한데, 닭똥집 튀김을 내는 집은 남원통닭·종구네통닭·꼬꼬댁 등 4집이다. 나란히 모여 있다. 1인분 5000원.


◎ 볼거리 | 약령시장 앞길 건너 동의보감타워 지하 2층에 한의약박물관(사진)이 있다. 아담한 규모지만 서울약령시의 유래와 깊이 있는 한의약 상식을 얻을 수 있는 곳이다. 한의약 도구 등 관련 유물 420점, 사향·해구신 등 한약재 140여종, 서민 구휼기관 보제원과 서울약령시 소개자료 등이 전시돼 있다. 건강 체크 프로그램도 체험할 수 있다. 무료. 10~17시 개관. 월요일과 명절 쉼. (02)3293-49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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